아침부터 예감이 좋은 하루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03
모의고사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수학에서 미끄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어제 영민이가 이런 문제는 반드시 나올 것이라며 가르쳐 준 문제가 모두 나온 덕분에 2등급이 나왔다. 10년 전의, 아. 이젠 10년 전이 아닌가. 어쨌든 전에 쳤던 고2 6월 모의고사 성적과 비슷했다. 3등급으로 내려가진 않을까 내심 걱정이 심했는데 다행이었다.
“야, 잘 쳤어?”
반 아이들의 가채점 표를 거두던 김종현이 싱글벙글 웃는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표정 보니 잘 쳤나 본데, 하며 내 채점표를 가져간 종현이는 오 좀 했다? 라며 내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종례를 하러 온 담임이 수고했다며 내일이 체육대회니 오늘은 좀 쉬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하자 반은 곧 축제 분위기였다. 아, 내일이 체육대회였구나. 하긴, 난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한 1, 2년 전도 아니고 무려 10년 전인데. 언제가 체육대회고 언제가 방학인지 그런 것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야 김종현, 나 어느 종목 나가?”
“너? 일단 운명 달리기는 나갈걸. 각 반 반장 부반장이 나가는 거니까”
“그래?”
“어,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동호한테 물어봐. 근데 그거 정한지가 언젠데 벌써 까먹었어?”
“어…. 어? 그러게…하핫”
하핫은 내껀데- 너 요즘 좀 이상하다? 너 기억력이 이렇게 나빴어? 라며 가볍게 장난 겸 나를 추궁해오는 종현이의 시선을 뒤로 무시하며 체육부장한테 내가 출전할 경기 종목을 물으러 갔다. 내가 나가는 종목은 운명 달리기랑 줄다리기였다. 10년 전엔 어쨌더라, 청팀이 이겼나 백팀이 이겼나. 반티는 뭐였더라? 시험지를 갈무리해 가방에 대충 넣은 뒤 김종현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니 아직 낮이라 그런가 집에는 아무도 없고 대신 구김 없이 걸려져 있는 옷이 눈에 띄었다. 항상 교복이 걸려져 있던 자리에 있는 걸 보아하니 반티인듯싶었다. 잘 다려진 경찰복이었다.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뛰고, 줄다리기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뭐 어때, 하루인데. 오랜만에 입는지라 내일이 기대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김종현은 항상 나와 등교를 같이 했다. 친하기도 친했고, 일단 바로 앞집이었으니까. 8시인 등교 시간에 맞춰 7시 40분에 각자 집에서 나오는 건 우리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7시 40분에 집을 나오자, 곧이어 문을 열고 나오는 김종현이 있었다. 경찰복을 입은 김종현이 오늘따라 꽤 멋져 보였다.
“야, 좀 멋지다?”
“하핫- 웬일로 칭찬이래, 고맙다. 너도 예뻐”
“너도 웬일로 칭찬이야”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대로 반에 도착해 앉아서 쉰 다음 운동장으로 나갔다. 단상 위에서 체육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체육대회는 시작되었고 미리 배정받은 자리로 이동했다. 김종현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고 나는 다른 친구 옆에 앉아 이어지는 경기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운명 달리기의 차례는 빨리 다가왔다. 각 반의 반장과 부반장은 운동장으로 나오라는 안내에 따라 김종현과 함께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나의 차례가 다가왔고 전속력으로 달린 뒤 미션 카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체육복 입은 사람과 함께 달리기>>
이게 말이야 방귀야, 체육대회에서 체육복을 입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두 반티를 입고 있는데? 그때 머릿속에서 영민이가 떠올랐다. 전학 온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반티가 없을 것이고, 그럼 체육복을 입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끝나자마자 우리 반 스탠드로 가서 임영민을 찾았다.
“영민아, 임영민!”
“…어! 왜?”
“빨리 와봐!”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해 벙쪄있는 영민이의 손을 이끌고 다시 운동장을 향해 뛰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제대로 된 영문도 모르고 내 손에 이끌려 뛴 영민이는 내 차례의 운명 달리기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여주야, 나 왜 뛴 거야?”
“…하…. 잠깐만…숨차”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숨이 찼다. 역시 몸이 열아홉이어도 내가 스물아홉에서 온 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원래 저질 체력이기도 했고. 덕분에 영민이는 한동안 뜨거운 운동장 위에서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 체육복 입은 사람이랑 같이 뛰라 해서”
“내가 체육복 입은 건 어떻게 알고? 나 아침까지 교복이었는데”
“너 반티 없잖아, 그래서 체육복일 것 같았어.”
“오,김여주 똑똑한데?”
내가 같이 뛴 이유를 말해주자 그제야 표정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는 영민이가 귀여웠다. 다시 스탠드로 올라가자- 라는 영민이의 말에 같이 다시 우리 반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순서표를 보니 줄다리기까진 아직 충분히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시 운동장을 바라보니 거의 마지막 순서에서 뛰고 있는 김종현이 보였다. 김종현은 뭐가 걸리려나, 미션 카드를 집어 들자 종현이의 얼굴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며 순식간에 빨개진다. 뭐가 걸렸길래 저러지?
“…야 여주야, 김여주! 나와봐”
“왜?”
“아 빨리 나와봐 같이 뛰어야 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내 손목을 잡아채 운동장으로 날 끌어낸다. 영민이가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한 바퀴를 더 뛰려니 힘들어 죽겠다. 겨우 한 바퀴를 다 뛰고 아까보다 더 심하게 헉헉거리며 김종현한테 이유를 물었다.
“야, 야 나 왜 뛴 거야?”
“…아 몰라”
이유를 물었더니 뛰느라 벌게진 김종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수확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토마토처럼 더 빨개진다. 도대체 미션 카드에 뭐라고 적혀 있었길래 저래.
“왜 뭐라고 적혀있었는데?”
“아 그냥 머리 묶은 애 데려와서 뛰래”
“에이…. 근데 네 얼굴이 그렇게 빨개져?”
“뭐래, 더워서 그런 거거든”
애써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김종현이 못 미더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믿기로 했다. 난 또 뭐 반에서 제일 예쁜 애랑 달리기 그런 거일 줄 알고 내심 기대했는데. 아깝다
운명 달리기 다음은 반 대항 피구였다. 20명만 뽑아서 나가는 거라 나는 스탠드에 남아있었고, 종현이는 나갈 준비를 했다. 피구왕 통키처럼 다 날려버리고 오겠다며 나름 비장한 표정을 보이던 김종현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마자 아웃되었다. 통키는 무슨, 통키가 다 죽었다. 주변 애들의 장난 섞인 야유가 들리자 김종현은 멋쩍은지 하핫,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비록 김종현은 졌지만, 나머지 애들이 열심히 커버친 덕분에 우리 반의 승리로 경기는 끝이 났고, 아직 줄다리기까진 시간이 좀 남았다. 운동장에서는 제일 인기없는 농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원래 농구 자체는 남녀노소 인기 많은 종목이지만 이상하게 우리 학교엔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나 둘 씩 시선이 다른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잠시 보다가 영 맥이 없는 경기에 예쁘게 꾸민 김에 셀카나 찍을까 하고 폰을 꺼내들었다.
“나 찍어주게?”
빛을 찾다가 정착한 방향의 렌즈가 하필이면 김종현을 보고 있어서, 김종현은 벌써부터 포즈를 잡고 난리였다. 너 찍을 거 아니거든? 용량이 아깝다- 하면서도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카메라 앞에서 온갖 잔망을 떠는 김종현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른 친구들과도 사진을 찍고 노니 금새 농구 경기는 끝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줄다리기를 해야 할 차례다. 준비된 장갑을 끼고 중간 즈음 자리 잡고 줄을 당기는데 상대편 반이 힘센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줄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점점 빠르게 반대편으로 가버리는 줄을 끝까지 붙잡는데
“아-”
그만 팔이 줄에 쓸려버리고 말았다. 피가 점점 팔에서 몽글몽글 맺히고 있었다. 피를 잘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만 눈을 감았다. 줄다리기도 지고 팔도 쓸리고. 최악이다
줄다리기를 2:0으로 시원하게 지고 운동장 한쪽에 만들어진 임시 보건실로 가니, 평소 보건 선생님과 친했던 김종현이 엄살을 부리며 팔목에 뿌리는 파스를 10m 밖까지 냄새가 진동하도록 뿌리고 있었다. 통키처럼 공을 날리려다가 삐끗했다나, 뭐라나. 영웅담처럼 자신의 (한껏 부풀린 풍선껌처럼 과장된) 피구 이야기를 하다가 좋지 못한 표정으로 들어온 나를 본 김종현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
“김여주,어디 다쳤어?”
“줄다리기하다가 팔에 조금 쓸려서”
치료를 하고 있는 내 팔을 계속 쳐다보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 좀 하지, 라고 말하는 김종현이 웃기고 또 고마웠다. 엄살을 부리긴 하지만 팔목이 삔 자신도 아프긴 할 텐데. 역시 김종현은 다정하다. 한 번씩 틱틱거려도 저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김종현을 보며, 이번에는 꼭 김종현을 살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또다시 했다.
조금 늦은 3화네요 하핫..
4화는 좀 더 재미있게 빠르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