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 23세.
3년 전 사고로 인해 다리신경이 마비되는 희귀병을 앓고있음.
고아였던 어릴 적 좋지 않은 환경 탓에 돈과 사람에 대한 집착이 있음.
2. 치즈인더트랩(cheeze in the trap)
"형도 갔는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맘대로 하세요."
나를 안아주고 떠난 임영민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며 여운에 젖어있는데, 세운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낯선 향기. 분명 부드럽게 말하는 그였지만, 세운에게서 난 알 수 없는 냉정함을 느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대하는 태도,말투 전부 다정했으니깐. 그저 삐뚤게 자라온 내가 습관처럼 날을 세우는 것 뿐이다.
처음만난 이에게 의심부터 품으며 재빨리 그의 마음을 꿰뚫는 일. 어릴 적부터 들어선 내 버릇이었다. 지금껏 모든 이에게 그래왔고, 그래서 쉽게 사랑을 받질 못했다. 다만 유일하게 의심을 품지 않은 이는 영민이 하나였다. 그 때 정신없이 아픈 상태여서인지 아님 나를 구해줬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에게는 온전히 나를 맡겼었다. 깨어났을 때 마주친 그의 선한 눈동자에 매료된 것 같기도.
이번엔 세운의 차례였다. 영민의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해서 그를 좋게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습관처럼 그를 꿰뚫었고, 늘 그렇듯 경계모드에 들어섰다.
"저는 정세운이예요. 형이랑은 10년간 알고지낸 사이이고..."
"들었어요. 친한 사이라면서요."
그러니깐 나를 맡겼겠죠. 나는 그가 하려던 말을 끊고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시선은 땅에 꽂은 채로. 세운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아마 그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부탁받은 상대가 이렇게 비호의적으로 나오니.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고, 세운은 민망한 듯 제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제가 맘에 안 드시나봐요."
"........"
"전, 누나 맘에 드는데"
네? 순간적으로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세운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쪽은 세운이 아니라 나였다. 이렇게 빨리 포커페이스가 깨져버리다니. 내가 이렇게 당황한 것은 저 익숙한 대사 때문이었다. 3년 전 임영민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그 대사.
"깨어났어요?"
"...누구세요?"
"아, 저는 임영민이라고 해요. ㅈ...제가 구했어요, 그 쪽을"
어둠 속에서 희미해질 때 들렸던 환청이 있다. 살아줘요, 제발 숨 좀 쉬어요. 애절하게 누군가가 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게 환청이 아니었구나. 정말 내가 들은 거구나. 임녕민이라고 자기 이름조차 발음 안 되는 이 남자에게서. 그 때 난 말없이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어째 나보다 더, 내가 산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고마워요. 데려와줘서"
"제가 더, 고마워요. 살아줘서"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이 때 처음 들었다. 나는 늘 찬밥처럼 버려진 존재였는데. 게다가 나를 구해준 이 남자는 내가 일어난 이후에도 날 떠나지 않았다. 돈이 없어 병원을 나가겠다고 하니, 직접 돈을 대주겠다며 치료받자며 내 손까지 굳게 맞잡았다. 대체 왜? 내 물음에 그는 수줍게 대답했다.
"여주씨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의 대답은 그동안 얼어붙었던 내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들었고, 지금껏 그를 사랑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근데 이 대사를 그의 친구인 세운에게 듣게 되다니. 굉장히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여...영민이가 들었으면 오해하겠어요"
"뭘요. 며칠 같이 있을 건데 서로 맘엔 들어야죠."
"그거야 그렇지만...듣기엔 불편하네요.."
"불편한 사이는 안 되었음 하는데. 조심할게요, 제가"
그는 말을 굉장히 잘했다. 퉁명스럽게 말을 해도 그의 대답은 침착했고, 표정 또한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영민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이 남자는 동요없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순간, 그를 향한 내 판단이 뇌리를 스쳤다. 경계하자. 방심하면 그의 미소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아가씨 B
W. 슈가링
"아 근데 여주씨"
"......."
"우리 꼭 이 집에서 살아야하는 건 아니죠?"
뻘쭘히 서 있다 어색함을 못 참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집을 흘끗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린 그의 모습. 그의 눈동자에 비친 집의 모습은 초라했다.
이 곳은 영민이와 내가 도망치듯 이사왔던 곳이었다. 범인이 더이상 나를 해치지 못하게, 날 보호해주기 위해 영민이가 고른 외딴 집. 처음 이 집을 찾았을 땐 거의 폐가와 다름없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도 전혀 없고, 깨진 창문과 소복히 쌓인 먼지만 가득할 뿐. 그 땐 나도 세운처럼 이 집에 들어서는 것을 께름칙해했다.
"영민아 나 이런 데서 못 살아. 그냥 돌아가자"
"위험한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다시 가"
"여기 있다간 귀신에게 잡혀가겠어. 응? 영민아? 나 여기 싫어"
정말 불쾌할 만큼 싫었다.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곳이었고. 산 속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들의 은신처 같았다. 임영민의 팔에 매달리며 난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낯선 집을 이리저리 훑었다. 스산한 공기에 몸이 차가워졌다.
그 때였다. 집을 훑던 영민이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걸어가던 나 역시 그 옆에 멈춰섰다. 무슨 일이냐며 영민을 쳐다보는데,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
뭔가에 홀리듯 초점없이 앞만 멍하니 보는 영민의 모습. 이미 어두운 분위기에 압도당한 터라 두려움은 금세 찾아왔다.
"...영민아?"
"살려줘."
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보며 조용히 외쳤다. 귀신에 홀린 듯이.
영민의 낯선 행동에 나는 그의 팔을 더욱 꽉 붙들었다.
"장...난치지마.."
"제발 살려줘."
"........."
"너에게 빠진 것 같아. 살려줘"
"....야! 임영민!!!"
집을 떠올리다보니 장난치던 영민의 모습이 같이 떠올랐다. 그 때 해맑게 윙크를 해대는 임영민을 얼마나 팼던지. 정말 귀신이 씌인 줄 알고 두근거렸다고. 그 와중에 윙크하는 모습은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그 화사함에 취해 난 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임영민, 그는 먼지나 나풀대던 텅빈 공간을 따뜻하고 아늑한 곳으로 바꿔주었다.
옛 생각에 잠기자 곁에 없는 영민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영민이 없는 집이 한없이 초라해보였다.
.
.
.
"그래서 싫어요?"
말없이 추억에 잠겨있는 내게 세운이 다시 말을 걸었고, 그는 뜬금없이 더 좋은 곳에서 살게 해주겠다며 다른 곳으로 가자고 나를 부추겼다.
내가 당신을 뭘 믿고 움직여. 어디로 갈 줄 알고. 그 쪽은 모르겠지만, 난 여기서 나가면..
....죽는단 말야.
내가 왜 이곳에 영민이랑 숨죽여 산 건데.
나는 말없이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죽기싫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여기가 좋아요 라며 머뭇거릴 뿐이었다. 세운은 내 거절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걱정마요, 죽게 안 놔둬요."
".......?"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임영민 하나인데. 왜 초면인 사람에게 내 신변을 걱정받아야 하는건지. 의문스런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자, 세운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형이 다 얘기해줬어요.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저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음을 느꼈다. 임영민, 나에겐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더니. 방금까지 영민에 대한 그리움이 한가득이었는데, 세운의 말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아무리 친했어도 그냥 잘 맡겨달라고 했으면 되는 건데. 굳이 처한 상황까지 다 말해가며 맡길 필요는 없는 건데.
왠지 모를 허탈함은 내 자존감을 계속 갉아먹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내 목숨을 구걸하며 을이 되고 싶진 읺았다. 그러나 이미 난 그에게 약점이 잡혀버렸다. 한순간에 을로 전락한 나는 기운없이 세운에게 말했다.
"그럼 영민이가 말한 거 들었겠네요. 이 집, 나가지 말라고"
"글쎄요. 그건 형이 능력이 없어 하는 소리고"
"...그럼요?"
"제 저택에 있는 게 더 안전할 텐데"
"솔직히 누나도 밖에 나가고 싶잖아요?"
저 말은 내 심장 안쪽을 파고들어 숨겨놓은 야망을 찾아 빠르게 관통해버렸다. 여유있게 날 바라보는 그의 표정. 그는 내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곳은 영민이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며 내 신변을 보호받기 위해선 나가서는 안 될 보호막같은 공간. 달리 말하면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다. 사실 난 가끔씩 밖에 나가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영민이가 날 끌어안고 자는 그 순간에도, 창 밖을 바라보며 밖의 세상을 염원했을 정도로. 정말 간절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영민이를 위험한 장소에 보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닌, 결국은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이었다.
또, 지금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저택' 이었다. 세운이 던진 그 말에 나는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고작 그 한 단어에, 관심없던 그에게 궁금증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단순히 궁금증을 벗어나 금세 호감으로 변해갔다는 점. 이 것이 내가 얼마나 약은 존재임을 증명했다.
"저택이라면 많이 넓겠죠?"
"상상하는 것보다는 넓겠지요. 며칠만 있어요. 형 오기전에."
방금 그의 말은 내게 어떤 말 한마디를 문득 떠오르게 했다. 떠나기 전에 임영민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말.
'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그 누구도 믿어선 안돼. 아무나 따라가선 안돼.'
그래, 나는 그 말을 어기려 드는 것이었다. 내겐 영민이가 있다. 덫에 걸리더라도 날 행복하게 만들, 치즈같은 그가 있다. 달콤하게 날 안아줄 영민이가.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가면 안 돼요. 영민이가 아무도 따라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제가 그 아무나는 아니지..요? 영민이 형이 부탁한 사람인데"
"...그게 누구든 믿지 말라고 했는데"
"나 여기서 못 자요. 너무 좁아서"
그는 보잘 것 없는 집을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택에 사는 남자가 이런 좁고 구석진 곳에서 살 수 있을까. 내가 봐도 그건 무리한 부탁인 듯 했다. 나는 아직 아픈 몸이고 앞으로 그에게 짐이 될 텐데, 잠자리라도 그에게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변명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겠다던 그와의 약속을 하나씩 지웠다.
"형에게 잘 말할게요"
그의 유혹은 성공이었다.
이 집이 덫이고, 영민이가 날 잡아두는 치즈였다면
정세운, 그는 그 올가미를 쥐고 있는 손이었다.
결국 그가 지금 내가 제일 의지해야 할 존재였다. 이를 깨닫자마자 나는 세운의 손목을 꽉 부여잡았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세운은 약간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아뇨, 영민이에겐 말하지 말아요"
"...왜요? 형 때문에 걱정하는 건 누나면서"
"빨리 가요, 우리."
영민이가 허락해줄 리 없잖아. 절대 가지 말라고 세운을 설득할 테니깐. 그럼 난 이 곳의 덫에 걸려 이미 식은 치즈만 물고 늘어져야 하는가. 그래, 깔끔하게 인정하자. 난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비겁하지만 내 야망은 양심보다 컸다.
이것이 임영민이 나를 다른 남자에게 덜컥 맡겨놓고 쫒기고 있는 내 상황까지 다 털어놓았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아님 이젠 영민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삶을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던 내 이기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이미 홀가분한 상태로 세운의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