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박우진
04
울음이 가라앉고 조금 진정이 되자 박우진은 나를 업고 물 밖으로 나왔다. 모래사장 끝 쪽의 그늘까지 가 앉혀놓고는 어른들을 불러오겠다며 펜션으로 가려는 박우진을 말리려 잔뜩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티셔츠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몸을 돌리다 만 박우진이 다시 무릎을 굽히고 나와 눈을 맞췄다.
" 안 가면 안 돼? 나 진짜 괜찮아. "
" ...병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
" 그 정도 아니야, 진짜. 그냥 놀라서 그래. 이제 괜찮잖아. "
" 그래도... "
" 괜히 나 때문에 여행 망치기 싫어서 그래. "
" ......... "
" 그냥 넘어가자. 응? "
박우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답을 보채자 깊게 한숨을 쉬며 물에 젖은 뒷머리를 세게 털며 답했다.
" 알았다. 대신 지금 들어가서 씻고 한숨 자. "
" 응. 그럴게. "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박우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일어나 씩씩하게 걷자 박우진은 금세 옆으로 따라붙어 괜찮은 거 맞냐, 병원은 진짜 안 가봐도 되겠냐, 쫑알쫑알 잔소리를 퍼부었다.
" 아, 진짜 괜찮다니까. 너 수영 더 안 해? "
" 그 꼴이 나놓고 수영을 하란다. 어이가 없네. "
" 나는 나고, 너는 너지... "
" 됐다. 혼자 뒀다간 또 뭔 일 생길까 봐 혼자 두기도 겁나네. "
" 그래서 너도 펜션 가겠다고? "
" 어. 너 자는 거 확인하고 나도 좀 자자. "
놀란 건 난데 왜 굳이 니가 따라오냐.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안함 반, 부끄러움 반에 괜히 틱틱대며 펜션까지 가는 길에 내내 투닥거렸다. 펜션 입구에 다다르자 막 나오려는 이모네와 엄마 아빠가 보여 달음박질로 뛰어가자 왜 벌써 들어오냐는 듯한 눈빛에 조금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박우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 김여주가 좀 피곤해 보여서. 나도 그렇고. "
" 그래? 그래도 이렇게 조금 놀아서 되겠어? "
" 내일 놀아도 되고, 뭐. "
박우진이 답하자 그럼 어쩔 수 없으니 들어가서 좀 쉬고 있으라는 이모의 말과 함께, 저녁에는 다 같이 펜션에서 바베큐 파티를 할 거니 기대하라는 아빠의 말까지 듣고 나서야 펜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묵는 호실 안으로 들어가자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느긋하게 씻고 나오자 먼저 나온 박우진은 거실에 서서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 씻었으면 좀 자라. 난 여기서 티비 보고 있을게. "
" 나도 티비 좀 보다 잘래. "
" 그러던가. "
한 손으로 흰 수건을 잡고 제 머리를 털며 리모컨을 찾아낸 박우진은 말없이 채널을 돌리다 예능 프로그램에 정착했다. 넓은 소파 귀퉁이에 각각 기대앉은 박우진과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그닥 졸리지 않아 잠에 들 줄 몰랐는데,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자니 몸도 나른해져 자꾸만 눈이 감겼다. 세 번째 고개가 꺾였을 때에는 박우진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 불편하게 자지 말고 침대 가서 자. "
" 응... "
" 표정 봐라. 가관이네. "
작게 웃는 소리에 뭐라 대꾸할 정신도 없이 반쯤 눈을 감은 채로 비몽사몽 비척대며 발길이 닿는 방에 들어가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듯 엎어져 잠에 들었다.
#남사친 박우진
" ...뭐야. "
다시 눈을 뜨자 방 안이 온통 어둑어둑 했다. 몇 시간을 잔 거야? 언제 덮었는지도 모를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세수를 하려 방 안에 딸린 화장실을 찾을 때서야 그 방이 우리 가족 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바닥을 둘러보자 역시나, 내 짐이 아닌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일단 세수를 해야겠다 싶어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오자 쇼파 우리 빼꼼 튀어나온 박우진의 뒤통수가 보였다. 뭐야, 나보고 쇼파에서 자지 말라더니 자기는 저대로 잠들었나.
" 박우진? "
" ...... "
" 박우진! "
" ...어, 아... 깼나. "
두 번이나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박우진은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비비다,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는 나를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금방 일어나 잠긴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낮고 갈라졌다.
" 내 침대에서 잠은 잘 잤나. "
" ...에? "
" 좀 자려고 들어가니까 이불도 안 덮고 잘 자드만. 깨우기 뭐 해서 그냥 이불만 덮어주고 다시 나왔어. 얼마나 졸리면 지 방도 못 찾아가. "
그러고선 기지개를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괜히 쪽팔리기도 하고, 나 때문에 박우진이 불편하게 쇼파에서 잤을 생각을 하니 미안하기도 해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하다고, 그냥 너도 내 방에서 자지 그랬냐고 하자 박우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 그래도 여자애가 쓸 침대인데 내가 어떻게 자냐. "
이모가 돌아오신 건 그때였다. 내가 답을 듣고 멍하니 벙쪄 있을 때. 이모는 들어와 우리를 보더니 드디어 깼냐고, 바베큐 준비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더니만 둘 다 너무 곤히 자서 못 깨웠다며 웃으며 말씀하시다, 옥상에서 바베큐 파티 준비가 끝났으니 준비하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냉장고에서 술병들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도로 나가셨다. 밤은 조금 쌀쌀하니 뭐 하나 꼭 걸치라는 말도 같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박우진은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도 한 템포 느리게 방으로 가서 대충 조금 두툼한 반팔 티를 입었다. 걸칠 거를... 여름이라 더울 줄만 알고 안 가져왔는데.
" 야 김여주. 멀었냐. "
" 아니! 나 다 입었어. "
뭐 없나 가방을 뒤적거리다, 하나같이 다 같은 반팔이기에 결국 한숨을 쉬며 방 밖으로 나갔다. 박우진은 검은 저지를 걸친 채였다. 박우진은 휑 드러난 두 팔을 보고 눈을 찌푸리더니 걸칠 걸 하나도 안 챙겼냐며 작게 타박했다.
" 추울지 몰랐지... "
" 핑계라고. 이거나 입어라. "
그리고선 제 저지를 벗어 내 쪽으로 홱, 던졌다. 급하게 저지를 받아내자 흰 반팔 차림의 박우진은 이미 신발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허겁지겁 박우진의 뒤를 따라 신발을 신고 복도로 나왔다.
" 야, 나 괜찮아. 너 입어 그냥. 옷도 얇은데... "
" 입혀 줘야 입냐? "
" ...아니... "
결국 주섬주섬 박우진의 저지를 끼워 입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말라서 별 차이 없을 줄 알았더니, 골격 탓인가 팔이며 어깨가 줄줄 흘러내리듯이 커서 낑낑대며 소매를 접고 있자 엘리베이터 벽면에 기대서 있던 박우진이 혀를 차며 소매를 마저 접어주었다. 뭘 먹어야 이렇게 작고 짧냐는 놀림과 함께.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박우진의 어깨를 두어 번 아프지 않게 때리자 엘리베이터가 옥상층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자 바베큐를 굽는 네다섯 테이블들이 눈에 띄었고, 그중 가장 바깥쪽에 어른들이 계셨다. 바다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이었다.
" 우진이랑 여주 왔어? 와서 고기 먹어. 지금 막 다 익었어. "
천천히 걸어오는 박우진을 뒤로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그릴 옆으로 갔다. 앉자마자 입안 가득 쌈을 싸서 우물우물 씹으며 박우진을 향해 손짓하자, 웃기다는 듯 크게 웃으며 다가와 바로 앞 쪽에 앉았다.
" 볼 터지겠네. "
" 야, 진짜 맛있어. "
" 어련하시겠어요. "
그렇게 온갖 리액션을 다 해가며 고기를 먹다 보니 어느새 해가 다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이모네와 엄마 아빠도 고기 굽는 걸 멈추시고 가져오신 술들과 함께 웃으시며 별의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문득 옆에 앉으셨던 이모부가 내 쪽을 보며 맥주병을 흔들거렸다.
" 여주도 한 잔 마실래? "
" 네? 아니, 저는... "
" 그래, 여주야. 술도 마셔 버릇 해야 느는 거야. "
당황해서 눈만 꿈뻑이자 어느새 한 컵을 가득 채운 맥주 잔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제사나 명절 때 어른들이 주시는 걸 한두 잔씩 받아 마셔본 적은 있지만, 이걸 또 이렇게 쉽게 허락하니 뭔가... 박우진이 씹고 있던 고기를 넘기고는 미간을 좁히며 내 쪽으로 팔을 쭉 뻗었다. 고개를 들어 박우진 쪽을 보자 박우진은 이미 받아 마시고 있었던 듯 바닥을 보인 맥주 잔이 있었다. 아무리 이모네가 이런 거에 프리하다고 해도, 쟤는 뭘 마셔도 티가 안 나냐.
" 줘. 넌 마시지 마. "
" ...나도 마셔 봤거든? "
" 나대지 말고. 괜히 취해서 해롱대지 마. "
원래 마시지 말라고 하면 더 마시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냐고, 괜히 오기가 생겨 잔을 들고 크게 들이켰다. 바닥까지 드러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테이블 너머로 박우진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 으, 써... "
" 미쳤냐? 그걸 한 번에 마시면 어떡하는데. "
" 뭐. 니가 먼저 무시했잖아... "
머리가 뎅 울렸다. 차가운 걸 한 번에 마셔서 그런가. 조용히 고기를 몇 점 더 집어넣으며 눈을 꿈뻑였다. 건너편에서 박우진이 꼭 재미있는 걸 보는 것 바냥 웃으며 그런 내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 야. 니 취했지. "
" ...아니거든. "
" 대답 느리고 얼굴 빨간데. 머리도 아프냐? "
" 좀...? "
" 환장하겠네. "
박우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살다 살다 너 같이 한 잔 마시고 취하는 애는 처음 본다. 야, 나 취한 거 아니거든! 작게 투닥대자 이모부는 웃으며 반 잔을 더 따라 주었다. 박우진이 뭐 하냐며 이모부에게 따지는 사이에 반 잔을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그에 박우진이 놀라며 아예 잔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유난이야, 진짜.
" 야 나..., 안 취했거든? "
" 미치겠다 진짜. 야 일어나 봐. "
엄마, 나 얘 좀 데리고 잠깐 앞에 걷다 온다. 그니까 애한테 술 좀 그만 주라니까. 일어나서 내 쪽으로 온 박우진이 이모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부에게 타박하는 소리도. 엄마는 어른들끼리 얘기 좀 하고 있을 테니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알딸딸하고 뭔가...,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술 마시나. 급격히 업된 기분으로 박우진의 팔을 잡고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가자! 헤실헤실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르자 박우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 니 진짜 어디 가서 술 마신다고 깝치지 마라. "
" 왜... 근데 우리 어디 가? "
" 앞에 바다. 그냥 좀 걷다 바로 들어가게.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닷가까지 가는 동안에도 펄쩍펄쩍 뛰며 온갖 방정을 다 부렸다. 모래사장을 혼자서 막 뛰어다닌다거나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거나. 박우진은 질겁을 하며 이런 나를 끌어당겨 바람이 잘 드는 모래사장 위에 앉혀 놓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의 한심함을 가득 품은 얼굴로, 혹시나 또 내가 이리저리 뛰어나갈까 팔목을 꽉 잡은 채로. 가만히 앉아있자니 손 발이 금세 심심해졌다. 발끝으로 모래를 파고들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박우진의 발에 모래를 뿌리며 킥킥댔다. 박우진은 체념한 듯 가만히 앉아서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고. 박우진의 바지 끝에 모래가 잔뜩 튀어 눈치를 보듯 박우진을 보며 실실 웃자 박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다리를 접어 안고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로 박우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박우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박우진이었다.
" 김여주. "
" 응. "
" ...아니다. "
" 뭐야, 뭔데. "
이름을 불러 놓고 잔뜩 뜸을 들이며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에 박우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보채듯 되물어도 그저 아니다, 됐다 이런 말들만 반복을 하던 박우진은 한참을 바라보더니 한 쪽 덧니가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툭 내뱉었다.
" 그냥, 좋다고. "
" ...어? "
" 들어가자 이제. 더 있다가 감기 걸린다. "
맥주 한 컵을 쉼 없이 마신 것보다도 크게 머리가 울렸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이. 말을 마치고 먼저 일어나 터벅터벅 걷는 박우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뒤돌아서 얼른 오라는 박우진의 외침에 그제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걸었다. 바람을 쐬고 장난을 쳐도 알딸딸하던 정신이, 박우진의 말 한마디에 원상태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박우진의 뒤를 따랐다. 묻지도 못할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홍수가 난 듯 자꾸만 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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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장면이 쓰고 싶었던 건지는 저도 잘... 깔끔하게 망했네요! *암호닉은 4화에서만 받습니다. [암호닉]의 형태로 신청해주시면 되구, 글자 수는 가급적으로 다섯 글자를 넘지 않게 부탁드려요!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께는 외전이 추가되어 완결본 텍파 메일링이 됩니당! 짧게 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지루하고 답답한 글이 될 수도... 보고싶은 장면도 많이 남았고, 수학여행과 축제, 운동회 에피소드도 남아있기 때문에! 글이 조금 루즈해질 수도 있다는... ㅠㅠ 최대한 열심히 쓰겠습니당,,,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질문 남겨주셔도 좋아요!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