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도 면책될 수 없는 인간의 죄여
우리 모두는 차라리 고통을 택했구나
" 오늘 연주회 올거지? "
" 응 꼭 갈게 "
" 늦어도 괜찮으니까 꼭 와 오늘 마지막 연주곡 새로 준비한 거니까 "
" 응 약속해 "
입술이 한 번 닿았다 떨어졌고 나는 우리 사랑이 식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어지러운 정신이 들 때 쯤 그가 나를 더욱 힘을 주어 안았다 아찔했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 처럼
비가 내렸다. 주차장을 지나 가로등 하나 없이 앞이 캄캄한 길을 무작정 얼마나 걸었을까 신발 앞 코가 진흙 투성이었다 비싼 구두가 진흙에 푹푹 밟히기 시작했으며 이내 원래의 색깔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있었다 훗훗하고 외롭게 걷다보니 뒤에서 차 한 대가 클락션을 울리며 다가왔다 ' 누나 비 많이 와요 타세요 ' ' 어 그래 ' 나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는 구두를 뒷발로 퍽퍽 땅에 몇 번 치대어 조금이나마 말끔하게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들어온지 얼마 안된 후임이 내게 수건 하나와 내릴 때 뒷자석에 던져둔 내 자켓을 조심히 건넸다 ' 집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선배님 차는 제가 내일 갖고 오겠습니다 ' ' 아냐 내가 알아서 갈게 ' 후배는 전조등을 켜고는 빗속 사이로 빠르게 운전했다 그러고는 내 말에 짐짓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몇 번 깜빡였다 ' ..잠시 쉬시는 겁니까? '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 고개를 살짝 저으며 ' 아니 좀 더 두고 기다려 보래 실장님이 ' ' 아아.. ' 나는 물기를 털다가 차 안의 에어컨 바람에 몸이 노곤노곤 풀려 시트에 완전히 기대었고 ' 도착하면 깨워줘 ' 하고는 그 뒤로 정신을 잃은 듯이 잤다
아슬아슬한 밧줄 위를 걷는 이 엿같은 삶을 이십 년 이상 살아오다보니 모든 일에 다 무디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새벽에 임무를 끝내고 집에 들어와 쓰러지듯 잠드는 일도 내겐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고 어릴 때부터 같이 일해 온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죽임을 당하는 일도 이젠 눈 하나 깜짝 안하게 되었다. 슬펐다. 나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아니 사실 티를 낼 시간 조차 없었지. 뜬 눈으로 죽어버린 동료의 눈을 손으로 대신 감아준다거나 꽉 매인 타이를 살짝 풀어 조금이라도 답답함을 덜어주는 게 다 였다. 그 이상은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용납치 않았고 나는 그걸 알고 있기에 피가 이리저리 튀는 임무 수행 중에도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을 마냥 슬퍼할 수 없었다 엉겹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무뎌져 갔고 결국 난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기 시작했다. 보여주면 나만 손해니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거든 죽기 전에 여지를 남겨두더라도 그건 그냥 죽은 사람의 흔적일 뿐 의미 부여 같은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나 뿐만 아니라 이 판의 모두가 다 안다 나를 다 보여주게 되면 나 스스로에게 총을 겨눈것과 같아서. 누군가 그 방아쇠만 잡아당기면 내 삶은 종결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리석은 짓을 하지않을 거라 굳게 다짐해왔고 조만간 이 다짐은 끝날것이다
뮤지컬 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피아노 선율이 홀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무대를 쳐다보곤 연주순서를 확인했다 에어컨의 습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자리가 비어있는 쪽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고 이내 익숙한 얼굴의 연주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손바닥을 높이 들어 그에게 마구 흔들어댔다. 그는 나를 찾기라도 하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객석 맨 뒤에 앉아있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얼굴이 살짝 어두워진 채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괜히 더 일찍 올걸 하는 걱정에 흔들어대던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관객들의 박수가 잦아들고 어떠한 소음이 들리지도 않은 약 10여초간 공백을 유지했다 그리고는 피아노 건반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고 그는 연주를 시작했다 이것도 오늘이면 마지막 이구나
그는 오늘 죽는다 내 총알에 맞아. 서영호 본명은 JOHNNY SUH 그는 시카고계 한국인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그를 죽이라는 임무를 받은 우리 조직은 내게 그 명령을 내렸고 나는 이렇게 그의 사생활 안으로 들어와 그의 정보를 캐는 것도 오늘이면 벌써 한달째다. 사실 그 전 임무들 같았으면 한달이 채 되기도 전에 죽여서 시신을 감추고도 남았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워낙 중요한 임무라고 하도 귀가 닳도록 들어서 도저히 제대로 죽일 엄두가 안났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는 내 사살대상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한다. 어쩌면 사랑이 더 적절한 단어일지도. 며칠 째 코트의 가슴 안팍 주머니에 총을 갖고 그를 만나는 일도 이젠 질린다.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멍청해야 하나 하루에도 열두 번을 고민한다 그냥 죽여버려? 아니면 고백? 내가 사실 널 죽이라는 임무를 받은 킬러다 근데 널 좋아해서 못 죽이는데 이런 나랑 도망칠래? 근데 거기서 거절 당하면 어떡하지 화가 나서 홧김에 죽일 수도 있다 근데 저 사람 앞에만 서면 모든 게 정지될 게 뻔해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 마시고는 옆사람에게 물었다 ' 혹시 마지막 곡 이름이 뭔가요? ' 옆사람은 음악을 감상하고 있던지라 내 말이 귀찮았는지 ' amor desespereado 요 ' 나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곤 나를 엿보기라도 하는 듯 실장님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조용히 홀을 나왔다
" 어디야 "
" ..밖입니다 "
" 오늘 일 제대로 마무리해 잘되면 휴가에 승진까지 시켜줄 테니까 "
" 네 "
나는 휴대폰을 끄곤 주머니에 넣었다
모든 건 준비 됐다 마무리만 잘하면 된다 내가. 모든 건 내 손으로 시작해 내 손으로 끝나는 일이다 숨통을 끊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홀 문을 열자 뜨거운 박수소리가 귀를 아프게 때려댔다
그의 연주는 끝났고 이제 내가 연주를 할 차례다
" 오늘 연주 어떘어? "
" 응 잘들었어 잘하던데? "
" 내 마지막 곡이 뭐였는데 "
" amor desespereado "
" ... "
" 아.. 아니야? "
" 아니 맞아 어땠어? 맘에 들어? 너한테 들려주고 싶었어 "
" 응 좋더라 맘에 들어 녹음할 걸 그랬나? "
내 농담에 영호는 눈웃음을 그렸다. 나도 따라 웃으며 꽃다발을 건네주었고 그에게 말했다
' 한 번 더 들려줘 또 듣고 싶어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은 그는 외투를 챙기며 대답했다
' 그래 홀로 다시 나가자 거기가 제일 크게 잘 들려 '
사람들이 다 나가고 없는 홀에 가 우리는 피아노 앞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푹신한 의자 위에 앉아 고개를 위로 올려다보니 그 안의 모든 조명들 중 무대만을 비추고 있었고 이곳엔 우리 둘 뿐이었다. 시간이 채 얼마남지 않았다. 12시까지는 단 삼십분 실패하면 모든 게 다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기만하면 다행이지, 임무 수행을 실패할 경우 임무를 수행하던 일원은 죽는다. 물론 소리 소문없이 즉시 사살. 근데 마음이 어지럽다 누가 내 머릿속에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거 같아
" 내가 이 곡을 한 세 달 간 연습했어 처음엔 너무 힘들었는데 보상이 있다 생각하니까 견딜만 하더라 "
" 보상? 하긴 아까 반주 치는 거 보니까 좀 어려운것 같긴 하더라 그리고 오늘 곡도 세 곡이나 연주했잖아 힘들만해 "
" 근데 아직 고생할 게 더 남았어 보시다시피 내가 워낙 일이 많잖아 right? "
영호야 이런 너를 내가 죽여야 한다는 게 말이 안돼
" 연주해줄게 아까 그 곡 "
나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조명의 시린 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를 보는데 하마터면 피투성이의 그가 겹쳐보여 울음이 터질 뻔 했다 코트 안 주머니에 있는 권총 하나가 자꾸 가슴을 툭툭 쳐댈때마다 가슴이 저릿하다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냥. 하지만 후회가 눈물이 되기 전에 널 놓아야만 한다 나는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기다 눈을 살짝 떴다. 피아노 건반 위로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감상하다가 내 왼손을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고 총을 잡았다 근데 뺄 엄두가 안나 한참을 잡고 망설였다. 그때 갑자기 그의 연주가 끝났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건반 위에 열 손가락을 살짝 올렸다. 내가 어떻게 핏기 없는 저 손을 볼 수 있을까 도무지 볼 자신이 없어 그때 영호가 일어서며 내게 말했다
" 이제 끝났어 "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대 위의 조명이 그의 머리칼 때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난데없이 귀에 걸려있던 처음보는 이어폰을 빼냈고 그랜드 피아노의 닫혀있던 덮개를 열어 그 안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내게 말했다
" 이 연주가 네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슬퍼하는 꼬라지하고는
그냥 적당히 다치고 도망가지 왜 헛되이 마음을 줘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
" ..뭐? "
' 철컥 '
" at last.. mission complete "
'탕 '
총성이 울려퍼졌다
심장을 겨눈 그의 총구는 피투성이가 되어있었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를 안경 너머 곁눈질로 보다가
의자 위에 올려둔 재킷을 들곤 재빨리 객석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무언가 잔뜩 억제하고 있는 걸 감추기 위함인 듯 등뼈가 아주 곧게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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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에 온것같아요 사실 3부작 이상으로 쓰려고 했는데 다음 달에 시험도 있고 해서 도무지 쓸 시간이 안나더라구요 ㅜㅜ 그래서 그냥 짧게 제가 쓰고 싶었던 소재에 쟈니를 넣어서 써봤습니다 최대한 영호 손가락이랑 비슷한 움짤을 찾느라 고생점 했어요으 항상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댓글도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