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멀리 가는 딸자식 새 신발을 신겨 보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운동화 뒤축이 발목 뒤 살가죽에 닿았다 떨어지자 손톱만 한 상흔이 생겼다. 독사에게 아킬레스건을 콱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아무리 화냥년 태생이 불우하기로서니 딸애까지 저처럼 살게 두긴 싫다더니, 엄마가 영영을 배웅하며 쥐어준 것은 결국 내 오랜 불우였고, 약점이었다.
수몰지구 (水沒地區) A
Ju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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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 1 ;
원일 사립 고교 (元日 私立 高校). 교문의 흑녹색 푯말과 교정 한 가운데의 분수대에 새겨진 이름이 그랬다. 말이 학교지,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부패 사회의 축소판이 따로 없었다. 기업 총수의 자녀, 정재계 인사의 자녀, 저명한 교수의 자녀. 대한민국 윗대가리란 윗대가리의 씨는 다 여기 모이는가 보다고 그 언젠가 이대휘가 혀를 내둘렀다. 정작 그렇게 말을 하는 이대휘도 화가 아빠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엄마를 뒀다. 미술 하는 작자들은 적어도 밥 빌어먹고 살 길을 찾지 못해 허덕여 본 적은 없을 게 아니냐고 따져 물으려다 관뒀다. 이유는 첫째로 구질구질해서. 둘째로 이대휘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애는 영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이상주의적인 구석이 있었으나 그래도 퍽 귀여웠다. 아무데나 정 붙이기를 잘 해서, 못 봐주게 뻣뻣한 나하고도 친구를 먹어주는 곰살맞은 애였다. 가끔 이대휘가 급식실로 향하는 길에 팔을 감아오면, 나는 아주 보통의 열일곱이 된 것 같아 숨을 참았다. 이대휘와 팔짱 끼는 일이 좋았다.
원일고는 총 4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큰 건물이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본관이고 그 옆에 딸린 별관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교정의 양 끝 가장자리에 위치한 나머지 두 건물은 각각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로, 때를 불문하고 이성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말이 그렇지 사실 붙어먹을 놈들은 잘만 붙어먹었다. 번듯한 기업 자제끼리의 연애는 어떤 방식일지 궁금해 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나와 한 방을 쓰는 어느 카드사 사장 딸 C는 밤마다 제 남자친구를 방으로 불렀는데, 매주 그 남자친구가 달라진다는 게 고역이었다. 왜 숨을 참는 것처럼 청각도 자의로 차단할 수는 없는 걸까. 파티션 새로 흘러드는 웃음소리는 C가 내게 주는 마지막 눈치였다. C는 비록 1인실을 배정받을 만큼 재력 있는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사장 딸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었고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어리고 가난하여 고개 숙임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로인해 나의 안위와 그들의 지위가 안전하게 되므로.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사흘은 방을 나와 별관의 여교사 휴게실에서 잠을 청했다. 잠긴 기숙사와 별관 출입문을 따는 일은 어렵지가 않았다.
매 달 두 번째 수요일에는 자율 동아리 활동을 했다. 나는 방송부엘 같이 들자던 이대휘 몰래 모집인원이 가장 많았던 도서부 신청서를 냈다. 다수에 섞여 물도 술도 아닌 무언가가 된다면 나는 아마도 보통처럼 숨 쉴까. 도서부 활동 보고서에 빽빽이 감상문을 채워 넣다보면 그럴듯한 학생이 된 것도 같았다. 그 때 마다 발목의 데일밴드를 매만졌다. 화냥년 딸년. 화냥년 딸년. 멀쩡한 집안 잡아먹고 그 뒷배로 학교 다니는 화냥년 딸년. 지 남편 죽어갈 때 다른 남자랑 눈 맞아서 그 집 본처를... 끊임없이 학대하고 매질해야만 숨이 쉬어지는 기이한 패턴의 연속. 나는 매 달 두 번째 수요일마다 쏟아지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 날 밤에는 이대휘네 방송부장이 C를 찾아왔다. 양 손에 가득 든 군것질거리 사이로 캔맥주가 보였다. 나는 또 방을 비워주고, C의 친구들은 내가 열고 나온 문으로 들어가고. 두 개의 자물쇠를 따는 사이 달이 점멸했다. 별관으로 난 길이 유난히 어두워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딘 밤이었고, 여교사 휴게실 앞에 섰을 때는 왜인지 죄책감까지 밀려들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문을 열었을 때 희미한 빛이 샜다. 나는 확실히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훗날 나의 죽음 앞에 가장 강렬히 회고될 순간. 첫 번째 목격. 두 눈이 빛에 익숙해짐에 따라 두 사람이 엉켜있는 실루엣이 차츰 선명해졌다. 한 쪽은 올해 첫 부임했다는 여교사 J였다. 그녀는 상냥했다. 그것 외에는 더 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 밤에도 예외 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자꾸 불렀다. 다니엘. 다니엘. 다니엘. 이름의 주인이 고개를 틀어 J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꼭 독사처럼 형형한 눈빛에 발목 뒤가 시큰했다. 사실은 한 번도 독사를 본 적이 없었지만 본능이 그랬다. 물릴 것 같다. 나의 만성적 무력과는 또 다른 무력의 압박을 느꼈다. 감각의 마비. 독사의 눈이 나를 옭아매기 전에 숨을 참고 뛰었다. 교정을 미친 듯 가로질러 기숙사로 돌아갔다. 벌컥 문을 열어제끼자 한창 게임 중이던 C가 역정을 냈다. 야! 너 뭐야! 나와 그들 사이를 차단한 파티션 너머에서 술에 절은 고성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것 뿐. 술에 절은 C는 내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다. 매트리스와 이불 사이에 내 몸을 끼워 넣고 죽은 듯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 쿵 거세게 뛰어대는데, 나는 웃기지도 않게 죽은 체를 한 거다. 3월 초 대강당 단상 위에 올라 학생 대표로 선서하던 뒷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하나, 우리는 원일 사립 고교의 학생으로서 교칙을 준수한다. 하나, 우리는 본교의 인재상인 창의융합적 리더로서 갖춰야 할 지식과 교양을 갈고 닦는다. 하나, 우리는 협동하여...... 원일 사립 고교 학생회장, 강다니엘 선서.
목격 2 ;
미술 선생님 결국 관뒀대. 나는 그 선생님 마음에 들었는데. 상냥하시구, 착하시구, 예쁘시구, 또... 어깨를 한 번 들썩인 이대휘가 못내 아쉬운 투로 비보를 전했다. 오늘의 미술수업은 자습으로 대체된다는 반장의 전달은 애들 잡담에 먹혀 아스라졌다. J가 사직했다. 그 날의 목격으로부터 나흘이 지난 오늘부로. 나는 어젯밤 J가 독사의 눈을 하고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다. 어김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다니엘, 다니엘, 다니엘. 차라리 내가 청력을 잃었으면 했다. 물 속 깊이에 처박히던 상공 높이로 떠오르던 해서.
J의 사직에 책임을 묻는다면 내 지분은 어느 만큼이 될까. J가 그날 문 틈새로 나를 봤다면. 학생과 붙어먹는 교사 타이틀이 겁나 제 발로 걸어나간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조금 억울해진다. 그 둘의 부도덕적 관계를 소문내긴 커녕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다 수면제를 구입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들킨 쪽도 아닌데 나는 두려워했다. 당장 오늘은 매 주 월요일 아침마다 있는 전교생 아침조례를 빼먹고 기숙사에 남았다. 모든 학생들은 대강당에 집합해 주십시오...이번 주의 전달사항은 교내 흡연 금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강다니엘은 J의 사직에도 태연하게 조례를 진행하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겠지. 식은땀을 지나치게 흘려 샤워를 다시 했다. 이상한 것들에 좀먹어 제 기능을 상실한 뇌가 자꾸만 사이렌을 울려대고. 발목 뒤의 상처가 독사의 잇자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문제가 있는 상상들.
강다니엘은 유명했다. 한국은행 은행장의 적손으로 유명했고, 원일고 학생회장으로 유명했고, 전교 1등으로 유명했고, 수려한 외모로 유명했고, 사생활이 깔끔하기로 유명했고, 선을 넘지 않는 다정함으로 유명했고... 강다니엘이 유명한 이유를 찾으라면 갖다 댈 것이 아주 많았다. 완벽에 가까우니 더 흠을 내고 싶은 사람이라고 C가 그랬던가.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들을 쥐고 태어난 강다니엘. 나와는 옷깃이 스칠 가능성조차 0에 수렴하는 부류. 귀한 것을 욕심내면 안된단다. 너는 그런 걸 욕심내지 마.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마다 날 껴안고 울었다. 엄마는 흙바닥에서 손을 뻗어 샹들리에를 붙잡고, 무너지고, 그 반짝이던 찰나에 일생을 매달려 살았다. 구질구질하게. 이름 모를 엄마의 샹들리에가 나를 여기 입학시켰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빚을 지는 일에 무뎌지는 게 싫어 학기 초에는 매일 발목 뒤에 상처를 냈다. 딱지가 졌다 싶으면 뜯어 내고, 굳은살이 박혔다 싶으면 피를 냈다. 그렇게 하면 이대휘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았다. 확실히...문제가 있는 습관들.
J를 향한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정확히는 반나절만에 한 물 지난 가십 취급을 당했다. 당연히 J가 학생회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말은 누구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목격 이후 J의 수업마다 보건실로 도피했던 나는 어딘가가 찝찝해 석식을 걸렀다. 이대휘의 걱정어린 문자를 받고 답장도 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J의 마지막 모습이 '그 밤'인 것에 대한 말 못할 불쾌함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이례적으로 C는 그날 밤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쉬이 잠에들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차마 별관에 발을 들이진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J는 이 곳을 떠난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여교사 휴게실에 J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다. 수면제를 연이어 복용한 부작용이 틀림없다. 별관 밖으로 둘러 난 길을 따라 3번을 배회했을 때, 담벼락 밑에서 작은 불씨가 꿈틀대는 걸 목격했다. 빨간 불씨는 연기를 만들며 타올랐다. 매캐한 담배냄새가 났다. 끝까지 채운 셔츠단추와 넥타이.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두 눈이 이내 나를 봤다. 길게 뻗은 손 끝에서 빛나던 담배 불씨가 담벼락에 뭉개졌다. 이번 주의 전달사항은 교내 흡연 금지...... 아침에 들었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경고 이상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강다니엘은, 학생회 배지를 달고서...통금시간을 훌쩍 넘긴 새벽에...대체 무엇을... 잔디 밟히는 소리가 났다. 두번째 목격. 나는 이번에는 숨을 참지 않고 도망쳤다. 기숙사 건물 앞에 다다르자 목구멍이 따끔했다. 숨을 몰아쉬다가, 인지 못한 통증에 발목을 살폈다. 데일밴드를 붙여놓았던 자리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정신없이 뛰다 상처가 풀에 긇혀 이 지경이 된 거다. 곤히 잠든 C를 깨우지 않으려 피딱지를 잔뜩 매단 채 몸을 웅크려 이불 밑으로 기어들었다. 꿈에서 빨간 불씨가 보였다. 계속해서 나를 쫓았다. 나는 피하는 법을 몰라서 매케한 담배 연기에 질식할 때 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킬레우스 ;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내가 기숙사로 갈까??]
[괜찮아]
[오지 말고 수업 들어]
이대휘는 텍스트에도 목소리를 싣는 능력이 있었다. 작은 머리통으로 온갖 걱정을 다 하고 있을 이대휘. 귀여운 이대휘. 뒤이어 날아온 메시지는 제가 선생님께 내 상태를 최대한 잘 말 해둘 테니 걱정 말고 푹 쉬라는 내용이었다. 머리맡에 휴대폰을 던지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오전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치부를 두 번씩이나 목격한 사람 치고는 피폐했다. 입학식 때 선서하던 강다니엘, J에게 입맞추던 강다니엘, 아침조례를 이끄는 강다니엘, 뒷뜰에서 담배피는 강다니엘. 이상하게 싸늘했던 눈빛. 피하고 피해도 결국은 부딪히게되는 묘한 인력. 나는 모든 걸 털어놓고 강다니엘을 마음껏 힐난하고 싶다가도,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신경쓰지 않았던 발목은 꽤 깊이 패어있었다. 발목 뒤에 활을 맞고 죽었다는 아킬레우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발목이 아니라 심장 같은 데가 뚫려 죽었으면 한다. 약점을 안고 산다는 건 너무 끔찍하니까. 헛생각을 떨치려 찬물에 머리를 박았다. 오후에는 이대휘를 달래러 나가볼 참이었다. 코끝에 남은 담배연기를 지우려 몇 번이고 물 속에서 머리를 흔들었다.
수업 종이 치기를 기다리며 본관 앞을 서성였다. 이대휘가 점심을 먹으러 본관을 나오면 그 때 깜짝 놀래켜 줄 생각이었다. 다리를 절며 몇 분을 보냈을까, 클래식을 짜집기한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퍼졌다. 물밀듯 나를 지나치는 수십의 발걸음 사이에서 이대휘의 자그마한 뒷통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파가 한차례 빠져나간 뒤 나는 서프라이즈를 포기하고 메신저창을 켰다. 나 지금 본관 앞에... 막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밤새 나를 질식시켰던 매캐한 향이 풍겼다. 메스껍다. 나는 이전의 목격 때마다 그랬듯 도망을 꾀했지만 아킬레우스가 내 발목을 잡았다. 강다니엘은 예의 그 선을 넘지 않는 다정한 얼굴을 하고 내게 말 했다. 밝은 곳에서 그를 처음 마주한 감상은... 그의 피부가 생각보다 하얗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이나 봐놓고 왜 그냥 가."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고 거칠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보다 두 뼘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서 나는 매캐한 향이 값비싼 우드 계열 향수라는 것을 알았다. 강다니엘은 무릎을 굽혀 깊이 패인 내 발목에 새 밴드를 붙였다. 나는 습관처럼 숨을 참았다. 심장을 난도질 당한 듯 빠른 리듬으로 고막이 울렸다. 그가 일어섬과 동시에 물에 잠기듯 귀가 아득해졌다. 수몰이다.
"숨, 쉬어."
그 세 음절이 뭐라고, 깊이 가라앉던 나는 다시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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