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강다니엘은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벌써 한 달 하고도 2주 째였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정말 끈기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대뜸 ‘나 출장 가’ 라며 일주일 간 못 올 거라는 말을 일방적으로 전해오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난 여느 때랑 다름없이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긋 웃으며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를 잡고 앉아 나를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 강다니엘이 출장을 간 일주일은 정말 조용했다. 내 마음도, 카페도 모두. 사실 강다니엘이 매일 같이 카페에 찾아오기 시작한 후 손님이 꽤 늘었다. 그것도 여자 손님으로만. 카페 근처에 회사가 많아 주로 회사원들이 점심시간 쯤 많이 찾아오곤 했는데, 언제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매일 같이 찾아오는 강다니엘을 보러 근처 여러 회사의 여직원들이 자주 카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카페에 보이지 않자 허탕을 쳤다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며 다시 돌아가는 여직원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여자들을 떠올리니 난 참으로 그녀들이 안타까웠다. 걔 그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는 여자들 싫어하는데. 그래서 내가 여자인 친구가 별로 없고. …미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강다니엘과 함께 했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애써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냈다. 익숙함이 참 무서운 거라고, 요 근래 매일 얼굴을 보다 며칠 안 보니 자꾸만 그가 떠올랐다. 정신 차려야지, 이여주. 정신 차리자. 딸랑- “어서오세요-” 카페의 고요함을 깨며 경쾌하게 울린 종소리와 함께 목에 사원증을 건 여직원 한 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회사원들은 다 퇴근했을 시간인데, 야근을 하는 모양이다. 시원한 가을밤인데다가 불금인데 불쌍하네. 그렇게 내심 괜한 오지랖을 부리며 여직원의 얼굴을 보니, 최근에 카페에 자주 찾아오던, 누가 봐도 강다니엘에게 사심이 있어 보이던 여자였다. 나는 적당한 미소를 띠며 카운터 앞에 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이요.” “네, 만 사천원입니다.” “저기요, 언니.” “네?” 누가 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언니라니. 나는 괜히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날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 매일 여기 오는 남자분이랑 무슨 사이예요?” “네? 무슨….” “매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남자 있잖아요. 갈색 머리에 키 크고, 약간 사모예드 닮은 남자.”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모를 리가 없잖아요. 보니까 여기 매일 오던데. 혹시 그 남자랑 사귀는 사이예요?” “아니요.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홱 돌아 음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혼자서 죽을 맛이었다. 겨우 진정하고는 다 만든 음료를 캐리어에 담아 픽업부스에 내려놓으니 그 여직원은 끝까지 나에게 강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제 명함인데, 혹시 그 남자 다시 오면 저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번호 따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여자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커피를 들고서 그냥 나가버렸다. 난 가만히 서서 손에 들린 명함을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게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버리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한지 모를 일이었다. 계속 되는 찝찝한 기분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죄송하지만,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 그렇게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서오세요- 라는 말을 뱉은 나는 카페에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단체손님 진짜 싫은데. 심지어 술 취한 아저씨들이야. “여어, 아가씨! 여기 커피 다섯 잔 좀 갖다 줘 봐.” “난 설탕 많이 들어간 거!” “저… 손님, 계산 먼저 도와드릴게요.” “아이, 돈은 다 마시고 줄게. 얼른 커피 좀 줘.” “죄송하지만 선불이라서요.” “아이, 참…….” “형님, 커피는 제가 살게요. 자, 아가씨 여기 카드 받아 가.” “…….” 분명히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내뱉는 반말에 날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난 애써 표정을 풀고 아저씨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카드를 가져왔다.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 다섯 잔을 계산하고는 잽싸게 커피를 내렸다. 다시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카드와 커피를 내려놓고 카운터로 돌아온 나는 간이의자에 앉아 마음속으로 열심히 기도하기 바빴다. 제발 저 아저씨들 마감 전에 제 발로 나가게 해주세요. 저 오늘 약속 있단 말이에요. - 내가 너무 큰 걸 바랐던 걸까, 내 기도는 신께 보기 좋게 무시당한 듯 했다. 마감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저 아저씨들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결국 난 자리에서 일어나 아저씨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제 카페 문 닫을 시간이라…” “뭐야, 아가씨 지금 우리 쫓아내는 거야?” “아니, 쫓아내는 게 아니라 원래 영업시간이 10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보고 나가라는 거잖아. 그게 쫓아내는 게 아님 뭐야?” “아…….” 시발. 도대체 마음속에 참을 인을 몇 개나 새겼는지 모르겠다. 이 아저씨들은 술을 쳐 마셨으면 곱게 집에나 갈 것이지 왜 여기서 진상을 피우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입 밖으로 이 말을 내뱉을 수 없는 나는 그저 조곤조곤 진상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놀자.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지 않아?” “남자친구는 있어? 우리 아들놈 소개 시켜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손님, 이 손 좀 놓으시고… 이제 영업이 끝났다니까요.” “아이, 거 참 되게 비싸게 구네. 여기 좀 앉아봐, 아가씨. 같이 놀자니까?” “아, 이거 좀 놓으라니까ㅇ…” “그 손 놓으시죠.” 이 진상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내가 미처 종소리를 듣지 못했나보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문 앞엔 꽤나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한 강다니엘이 서 있었다. 출장 간다는 게 진짜인 듯 그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바지를 입고 자켓을 손에 들고 있었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금세 내게 다가온 강다니엘은 내 손목을 꽉 쥐고 있던 아저씨의 손을 떼어냈다. 아저씨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시뻘개진 손목을 쥐고 조용히 고통을 삼켰다. 취한 상태여서 그런지 힘이 더럽게도 셌다. 강다니엘이 웃고 있지 않을 때는 내가 봐도 참 무서웠다. 그의 무표정에 낮은 목소리까지 더하니 아저씨들도 슬쩍 눈치를 보다 괜한 시비를 걸지 않고 바로 카페를 나가버렸다. 아, 더 짜증나. 나 완전 개무시 당했던 거네. “괜찮아?” “왜 또 왔어.” “손목 좀 줘 봐. 완전 빨갛던데.”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영업 끝났으니까 너도 가.” “여주야" “나가라니까?” 난 강다니엘을 뒤로하고 카운터로 가 정리를 한 뒤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신발도 하이힐로 갈아 신었다. 탈의실 안에 작게 달린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니 강다니엘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난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카페 밖으로 나섰다. 날 뒤따라 나온 강다니엘은 카페 문을 잠그는 내 곁에 서서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어디 가?” “…….” “너 발목도 안 좋으면서 이렇게 높은 신발 신어도 돼?” “…….” “손목 아직도 빨갛네. 찜질 꼭 해.” “…야.” “어?” 난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자꾸만 알짱거리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건지. 게다가 오늘 이상한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내 기분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가 거슬렸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네가 뭔데 자꾸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야? 너 자꾸 나 찾아와서 이러는 거 진짜 이해 안 되고, 뭐 때문에 자꾸 찾아오는지 몰라도 난 네가 너무 싫어. 제발 내 눈 앞에서 좀 사라져줘.” “…….” 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친 후 곧장 도로변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으려 두리번거리니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빈 택시 찾기도 쉽지 않았다. 난 한숨을 쉬며 친구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다시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빈 택시를 찾았다. 그 때 내 앞에 검은 세단이 멈춰섰고, 창문이 내려갔다. 보나마나 강다니엘이었다. “…타. 태워줄게.” “됐어, 그냥 가.” “너 약속 시간에 늦는 거 싫어하잖아. 빨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 그는 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난 약속시간에 늦는 걸 그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 이 차에 타도 될 지 너무나도 고민됐다. 결국 난 못 이기는 척 그의 차에 올라탔다. 절대 강다니엘이 좋아서 탄 게 아니라, 약속장소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빈 택시를 도저히 못 찾겠어서 탄 거라고, 그렇게 혼자 합리화하면서. “…….” “…….” 약속장소로 향하는 길,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최근에 카페에서 보였던 능구렁이 강다니엘은 어디 갔는지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이었다. 괜히 혼자 어색해진 나는 가만히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며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도로 위엔 차가 너무나 많았고, 15분이면 갈 거리를 벌써 20분 째 도로 위에 서 있었다. 아,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빨랐겠다- 하는 생각만 계속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약속장소에 도착해 차가 멈춰섰다. 나는 바로 벨트를 풀고 내리려고 했으나, 낮은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저기, 있잖아.” “…….” “나 다시 보는 거 네가 싫어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내가 이러는 거 염치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그거 다 감수하고 너 매일 찾아오는 거, 내 입장에서도 어려웠던 선택이라는 것만 알아주라.” “…….” “네가 나한테 상처 받았던 거 다 갚을게. 마음 다시 돌려줄 때까지 너 찾아올 거야.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고, 내 나름대로의 사과 방법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난 그의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짧은 인사만 남긴 채 곧장 차에서 내렸다. 술집에 들어선 뒤에야 겨우 숨을 고르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친구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날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저 친구는 내 몇 안 되는 동성친구 중 가장 친한 친구였다. 강다니엘, 그리고 황민현과 있었던 모든 일을 다 아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고. “늦어서 미안, 차가 너무 많이 막히더라. 혼자 마셨어, 벌써?” “얼마 안 마셨어- 차 끌고 왔어?” “어?! 아, 아니...” “뭐야, 왜 그렇게 화들짝 놀라? 왜,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아니야아- 나도 술이나 좀 줘 봐.” 친구랑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고, 취기도 어느 정도 올랐기에 나는 은근슬쩍 친구에게 강다니엘 얘기를 꺼냈다. 내 전남편 있잖아, 로 시작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거래. 로 끝이 났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앞에 놓인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댔고, 술을 마시는 척 하며 앞에 있는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친구는 이내 나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넌 다시 합치고 싶어?" “…아니.” “왜?” “똑같은 이유로 싸우고 똑같이 헤어질까봐.” “그럼 더 확실하게 끊어냈어야지. 벌써 두 달이나 그랬다며.” “…아직 두 달까지는 안 됐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년아. 싫으면 진작 싹을 잘라야 되는 거 잘 아는 애가 왜 그랬어?” “…….” “내가 보기에 너도 강서방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도 알잖아.” “알지, 그래도 강서방 잘못만 있는 건 아니지. 너도 잘못은 했잖아.” “…그래도,” “맞바람 잘 한 거 아니야. 강서방이 먼저 그랬다고 너도 그래도 된다는 거 아니잖아. 자꾸 합리화하면 정말 끝도 없다?” “……알아, 나도.” “강서방은 정말 간절할 수도 있는 거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말고 얘기 좀 들어 줘.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정말 단호하게 딱 끊어내고.…근데 내가 볼 땐 너희 둘, 다시 합칠 것 같다.” “…….” 친구에 말에 머릿속이 더욱 더 복잡해져 취기가 싹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친구의 말이 모두 다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난 정말 단호하게 그를 끊어내지도 못하고 그냥 혼자서 합리화만 계속 하고 있었다. 이래서 이런거고, 저래서 저런거야 하면서. 왜?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강다니엘이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고 난 후로, 난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매일 휘둘리고 있었다. 창 밖엔 바람에 휘둘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
안녕하세요, 녤루입미다. 처음으로 인사 드리네요 하핫^^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셔서 눈물 1210리터는 뽑았어요ㅠㅠㅠㅠ❤️ 우선 질투의화신은 애초에 단편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썼던 거라...ㅎㅎㅎ 그래도 많은 분이 원하시면 열심히 머리 쥐어짜내서 뒷얘기 이어볼게요! 그냥 단편으로 둘지 이어갈지 의견주세요:) 그리고 구남편은 대충 큰 그림은 그려뒀는데 세부적인 에피소드 정리가 덜 돼서.... 게다가 작가 현생이 바빠서 연재텀이 조금씩 생길것같아요ㅠㅜ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연재하도록 할게요! 지난화에 암호닉 신청해주셨던 [녜리] [0226] 님 외에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제 부족한 글에 칭찬이 너무 많아서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진짜ㅠㅠㅠㅠㅠ 암호닉은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그럼 오늘도 제 못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화에서 만나요!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