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들 '꽃다운 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18살이 된지도 3개월이나 지나 새학기를 맞이하였다. 교실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담임이 들어왔다. "자, 다들 반갑다. 작년까지 3학년에 있다가 내려와서 나를 아는 애들은 많이 없을거같은데, 이름은 박성우라고 하고 담당과목은 수학이다." "앞으로 1년동안 잘 부탁하고, 일단 자리부터 정할까?" 그래, 새학기의 묘미는 자리정하기지. 누구랑 짝이 될지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는 그 설렘이 너무 좋지 않은가, 나만 그런거면 말고. - "자리 다 확인했으면 이제 각자 자리 찾아서 짐 옮기고 수업 준비해라. 나는 교무실에 있으니까 용건있으면 교무실에 오면 된다." 나는 창가쪽 맨 뒷자리를 뽑았다. 자리배치는 딱 좋고, 짝이 누가 될지가 제일 궁금했다. 아, 떨려떨려- 나랑 잘 맞는 애였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혼자, 짝꿍이 얼른 오기를 바라며 기다리는데 한 남자아이가 내 옆자리에 가방을 놔두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첫 인상은 나쁘지않다. "어, 안녕. 너 이 자리야?" "응. 잘부탁해, 짝꿍" 잘부탁한다며 웃어보이는데 웃는 것도 예쁘다. 약간 그 뭐냐, 그.. 하트 상표 닮긴 했지만. 쨌든 첫 짝꿍도 잘 만난 것 같고 올 한 해 왠지 느낌이 좋다. - 개학한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반아이들과도 친해졌고, 짝꿍이랑도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짝꿍의 이름은 황민현이라고 했다. 아, 가끔 무표정으로 있으면 나라잃은 황제같아서 황제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쌤 수업 진짜 지루하다' 한국사 시간에 갑자기 포스트잇에 쪽지를 적어 건네는 민현이였다. 나도 수업이 많이 지루했던 터라 밑에다가 'ㅇㅇ 그거 개인정. 잠이 솔솔 와.. 거의 뭐 불면증치료클리닉 아님?ㅋㅋ' "크흡" 황민현이 내 쪽지를 보고 빵터져서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한참 수업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선생님의 시선을 더불어 반아이들의 시선까지 우리에게 고정되었다. "아, 기침이 나와서요.. 큼큼, 죄송합니다." 애써 기침인 척 무마하는 황민현에 다행히 이번은 그냥 넘어갔다. "야, 소리내서 웃으면 어떡해! 걸릴 뻔 했잖아. 우리 이 쪽지 걸리면 최소 황천길이야" 난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한테 가려 안보이게 한 후, 황민현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아니, 웃긴걸 어떡해. 불면증치료클리닉 너무 맞는 말이라서.." "거기 맨 뒤에 둘, 아까부터 자꾸 거슬린다. 복도로 나가." 우리는 나름 소곤소곤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졸지에 교실에서 추방당한 우리는 복도로 나갔다. "야, 너때문이잖아. 니가 웃지만 않았어도 안걸렸어" "어라? 니가 그냥 쪽지로 얘기했으면 조용히 지나갔을걸?" "아, 몰라몰라. 진짜 솔직히 저 쌤 수업듣는 애들 제일 대단하다. 잠 안오고 배겨?" "그니까. 저 쌤 항상 코도 빨갛고, 이런 말하면 안되는거 알지만 술..주정뱅이 같아.." "푸흐흡-.. 야 진짜 인정인정" 드르륵- "너네는 복도에서도 떠드냐. 둘다 손들어!" 한참 선생님 뒷담화를 까던 중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선생님은 앞문을 열고 나와 손까지 들게 하셨다. 손들고 서있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뭐가 그리 재밌던지 큭큭대며 웃기 바빴고, 쉬는시간종이 치고 나서야 우리는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쌍둥이별자리처럼 항상 너는 나 나는 너였다. - [수능 D-103] 칠판에 적혀진 디데이를 보자 한숨이 나온다. 벌써 수능이 코앞이다. 고2때 첫 짝꿍으로 만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함께 지내온 민현이랑은, 운명인건지 3학년 때도 같은 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올해도 우리는 변함없이 항상 함께였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힘든 수험생활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야 나만 놀러가고싶냐' 교실도 너무 갑갑하고 얼마 전 입시상담을 했던 터라 속도 답답하던 어느 여름 날, 문득 '놀러가고싶다.'라는 생각에 바로 옆자리인 민현이에게 쪽지를 보냈다. '나도 놀러가고싶다' '바다ㄱ? 원래 수능 백일 전에는 터닝포인트를 하나 만들어야한댔음' 내 쪽지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던 민현이는 포스트잇에 뭔갈 끄적이더니 나에게 건넸다. '콜 부산ㄱ' - "와, 진짜 우리 바다온거야? 대박-" 결국 우리는 주말에 부모님께 독서실간다하고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고, 바다를 보러왔다. "민현아, 진짜 숨통이 탁 트인다. 너무 좋아!" 바다를 보자마자 방방 뛰는 나와, "그러게, 진짜 좋긴 좋다!" 환하게 웃는 민현이였다. 한참을 방방대며 물놀이 아닌 물놀이를 하던 우리는, 얼마 안가 지쳐서 가만히 모래사장에 앉아 한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민현아, 진짜 좋다. 그치" "응, 이렇게 바람 쐴 겸 나오니까 좋네." "빨리 수능끝나고 놀고 싶다. 민증 이마에 붙이고 밤새도록 부어라마셔라 하고싶다!" "그러다 술병나봐야 정신차리지." "남이사. 주량 두모금이 말이 많다. 작년 수학여행 기억 안나시나본데요, 황민현씨." "야... 이 좋은 바다까지 와서 그 흑역사를 들추고 싶냐, 넌.." "왜, 재밌기만 한데?" 그렇게 우리는 1년 전, 복도에서 떠들다 같이 혼나던 그날처럼 티격태격하며 서로의 기억 속에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갔다. - 미치겠다. 나 아무래도 황민현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이런 감정을 느낀지는 얼마 되지않았다. 아닌가, 오래되었나.. 잘모르겠다, 뭔가 이상해. 황민현이 웃으면 심장이 간질간질한게 커피를 많이 마셨을 때처럼 심장박동이 빨라지기도 한다. 공부하다말고 뜬금없이 황민현이랑 사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이건 좋아하는게 맞다. 애써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황민현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온통 황민현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고백, 절대 안할거다. 고백은 커녕 걔가 내 마음을 알게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이미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있고, 나는 그걸 깨고싶지않다. 그게 깨졌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고싶지도 않다. 괜히 무서웠다, 너와 내가 '친구'라는 이름으로조차 함께하지 못할까봐. 그 놈의 친구. '친구'라는 단어가 참 밉다. - 황민현을 향한 내 마음이 예전과는 다르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황민현을 피하게 되었다. 여전히 급식도 함께 먹고 하교도 같이 했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거는 횟수도 줄었고 연락하는 횟수도 줄였다. 행여나 니가 눈치챌까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넌 공부하느라 내 미묘한 변화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수능날이 다가왔고 난 망친 성적은 아니였기에 내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민현이 또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수능이 끝나고 매일매일 같이 놀자던 약속은 지켰다. 그동안 지내면서 어느 정도 감정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던 탓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 너와 여전히 함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감정을 숨기면 숨길수록, 널 향한 마음은 보란듯이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졸업식이 다가왔다. 너와 나는 같은 서울권에 진학하긴했지만 다른 학교에 가게 되어 떨어져야만 했다. 2년동안 항상 옆에 있던 니가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더라. 결국 졸업식 전 날, 너와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벌써 졸업이라니 믿기지않는다, 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눈물이 터졌다. "ㅇ..야, 왜 울고 그러냐. 우리 뭐 영영 못봐? 아니잖아, 자주 만나면 되지! 뚝, 울지마-" "...몰라..." "울면 못생겨져. 짬보야-" 대학가서도 보면 된다고, 나를 달래주던 너의 서툰 손길에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쳐다봤다. 아쉬운 감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였는지 너도 눈가가 촉촉해져있었다. "푸흐, 야 너도 우네. 누가 누구보고 짬보래-" "야, 안울어 안울어. 하품한거야! 진짜야!" 자기도 남자라고 자존심은 있는건지, 우는거 아니라고 열심히 부정하는 모습에 그냥 눈 한 번 감아주기로 했다. - "아, 할 것도 없는데 오랜만에 싸이나 들어가볼까." 어느 덧 대학교 4학년이 된 나는, 종강을 하고 할 일 없이 집에서 빈둥대던 나는 문득 고등학교 때 즐겨하던 싸이월드가 생각이 났고, 추억팔이나 할 겸 들어가보자 싶어 노트북을 켰다. "대박..이 땐 진짜 이랬었지.." "와, 이 사진 진짜 고대유물 수준인데?" "헐 희영이다. 진짜 애기네 애기.. 사진 저장해서 보내줘야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번도 안들어왔으니 거의 4년만인가? 오랜만에 예전 추억들을 꺼내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파도타기를 하던 그 때, 문득 황민현이 떠올랐다. 민현이랑은 졸업 전 날 했던 약속과 달리, 대학교에 올라오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 초반에는 그래도 연락은 자주 했으나, 그마저도 서로의 삶이 바빠 점점 뜸해지다 결국 끊기고 말았다. SNS는 고등학교 때 하던 싸이월드만 간신히 남겨져있을 뿐, 아무것도 안하는 민현이였기에 주위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듣는게 전부였다. '걔 과탑도 하고 엄청 잘나간다더라, 인기도 엄청 많대. 걔가 좀 잘생기긴 했어 그치?' '민현이한테 대시하는 여자 되게 많대. 근데 다 철벽친다더라. 알고보면 황민현 게이 아니야?' 사범대학에 진학한 민현이는 들려오는 소식마다 인기 많다더라, 라는 이야기뿐이였다. 가장 최근 들은 소식은 '걔 제황여고에 국어교생으로 실습나간대. 인기 터진다더라, 역시.' 이번에도 빠지지않는 인기많다더라. 역시는 역시다. 생각난 김에 나는 고등학교 때 민현이랑 둘이 썼던 다이어리에 들어가봤다. 커플 다이어리였나? 둘만 볼 수 있는 다이어리라 정말 쓰잘데기없는 아무말의 향연이여서 재미는 있었는데. 졸업하고나서는 처음 들어가는거라 무슨 글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보자....201..3년? 엥? 2013년이면 스무살때잖아. 뭐지?" 원래는 2012년으로 끝나있어야할 다이어리에 2013년 8월 날짜로 한개가 더 올라와있었다. [여주야, 잘지내지? 니가 이걸 언제 볼지 모르겠다. 우리 졸업 전 날 대학와서도 자주 보자는 약속해놓고 얼굴은 커녕, 연락도 못하고 있네. 많이 바쁘지? 난 아직도 기억나, 우리 짝꿍일 때 떠들다가 복도에서 혼났었잖아. 벌서면서도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그 때는 몰랐는데 이제 알 거같기도 하다. 나 아무래도 너 좋아했나봐. 어쩌면 아직도 좋아하는거같아. 너랑 함께했던 시간동안 친구라는 단어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 우리 사이 되게 정리할 수 없는 사진같지,생각하면 가슴아리고 그렇다. 수능 백일 전쯤 너랑 갔던 여름바다도, 함께라서 소중했던 마음이였어. 혼잣말이라서 미안해. 사실 널 사랑했던거같아. 차마 너에게 직접 전할 용기는 없더라, 바보같지. 차라리 들켰다면 너를 한번이라도 품에 꽉 안아줬을텐데. 힘들겠지만 우리의 뜨거웠던 여름처럼 안녕. ] 열번 정도는 읽은 것같다. 이게 꿈은 아닐까, 볼도 몇번이나 꼬집어봤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있다. "..뭐야..눈물은 왜 나는거야, 허.." 나도 모르게 흐르고 있던 눈물을 닦고 다시 한번 천천히 읽었다. 그러니까.. 얘도 나를 좋아했었단 말이잖아. 치, 누가 국어교사 아니라할까봐 글 한번 끝내주게 잘썼네. 그나저나 얘는 나한테 연락도 안하면서 다이어리에 글 쓸 여유는 있었나, 연락이나 하지. 아무리 자연스레 멀어졌다지만 생각해보니 너무하네, 어쩜 연락 한 통 없냐.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뜨거웠던 여름처럼...안녕" 안녕은 무슨, 누구 맘대로.
민현 시점 |
"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첫사랑?" 여고에 교생실습 갔던 선배들이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야, 첫사랑 얘기 꼭 준비해가라. 필수 관문이야' 첫사랑이라.. "궁금한거 있으면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방식으로 얘기해줄게-" "첫사랑 언제 만났어요, 쌤?" "음, 고등학교 2학년? 딱 너네 나이에 만났어-" "오오오오오- 어떻게 만났어요? 같은 반이였어요?" "응, 3월달에 짝을 뽑았는데 짝꿍이였어. 그렇게 알게 됐지?" "헐,대박!! 첫 눈에 반한거에요?" "첫 눈에 반한건 아니고, 짝꿍하면서 친해져서 매일 밥도 같이 먹고 하교도 같이 하면서 점점 스며들었던거같아." "꺄- 스며들었대!!!! 그래서 사겼어요? " "아니, 정말 많이 좋아했는데 고백은 못했어. 친구라는 이름이 너무 무겁게만 다가왔었거든. 결국 그렇게 하고싶었던 말도 못하고 끝났지, 뭐.." "헐....쌤.....그럼 그 분이랑은 아직 친구에요? 연락해요?" "대학교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어. 너네 혹시 싸이월드 알아?" "아, 쌤 당연하죠!!! 도토리 도토리!!!" "허허, 맞아맞아. 거기에 걔랑 나랑 둘만 볼 수 있는 다이어리가 있었거든. 고등학교 졸업하고 걔랑 연락 끊기고 나서 여름에 생각이 너무 많이 났었어. 직접 연락할 용기는 없었고 그래서 그 다이어리에 내 마음을 다 적었어." "대박, 그래서요? 그 분도 봤어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읽었는지. 나도 올리고는 한번도 안들어가봤어." "에이, 뭐에요- 근데 왜 하필 여름에 생각났어요?" "이상하게 여름에 추억이 되게 많았어. 고3때 수능 세달 남겨놓고 바람쐬러 바다도 갔었거든. 그 때 진짜 예뻐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흐허허" "꺄아악- 완전 사랑꾼!! 쌤, 아직도 그 분 좋아해요? 못잊었죠?" "응, 못잊었지. 어떻게 잊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