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당신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클림트를 만난 건 랜덤채팅 어플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우리의 첫 만남장소가 어플인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당신도 클림트를 만나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1.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오로지 텍스트로만 교감을 나누고, 지극히 본능적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나는 그 어플에서 순전히 진솔한 대화상대를 찾는 공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성욕 해소를 위한 최적의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프로필란에는 한껏 섹스어필을 하고, 하룻밤 관계를 위해 돈을 지불하겠다는 코멘트는 옵션이며, 대부분은 영양가는 없고 그저 속이 느글거리는 인사나 건네는 수컷들이 활개를 치던 판. 그리고 그곳이 그들의 주무대며, 일탈의 장소.
나는 수컷들의 적나라한 구애현장을 목격한 후, 무료한 삶에 이 어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주길 바랐던 것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성욕에 눈이 먼 자들에겐 일상적인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어플의 접속자는 1000명이 넘어가는데 나는, 왜, 그 누구와도,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할까.
-[미술관 좋아하세요?] 클림트
페이, 숏, 롱, 화끈한 밤과 같은 낯뜨거운 단어들만이 가득한 게시판 속에서 저 한 마디는 단연 이색적이었고 독보적이었다. 아마, 사막을 횡단하다 오아시스를 마주한 기분이라면, 바로 이 기분이었을터.
-[보고 느끼고 듣는 것은 다 좋아합니다.] J
저 한 마디에 차감되는 30 포인트가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깝지 않다. 돌아오는 클림트의 대답이 퇴폐 업소 홍보 문구가 아닌 이상.
-[저도요.] 클림트
한껏 메마르고 건조한 대답이 내게 사소한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2.
클림트는 전반적으로 유쾌한 이미지였지만 나를 상당히 경계하는 모습도 더러 볼 수 있었다. 친밀하게 굴다가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선을 그어버린다거나, 사적인 질문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 싶으면 답장을 일부러 늦게 해 화제거리를 빠르게 전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날은 유난히 이상했다. 비가 이상하게 많이 내리던 날이었고, 나와 클림트의 대화 분위기도 이상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클림트
-[그러게요. 우산은 챙겼어요?] J
-[아뇨.] 클림트
-[데리러 갈까요?] J
-[010-XXXX-XXXX, 내 연락처예요.] 클림트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상황에서 그녀 자신의 번호를 선뜻 알려줬다? 솔직히 난 인신매매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전혀 엉뚱한 타이밍에서 얼떨결에 연락처를 알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거기다 연락한 지 이제 이틀 째 밖에 되지 못했다. 적어도 이틀이 아닌, 2주 이상은 연락해야 자신의 번호를 건네줄까, 말까 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 것을. 이렇듯 그녀는 이상한 데서 나를 경계했고, 또 이상한 데서 친밀한 느낌을 줬다.
“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세찬 빗소리와 함께 축 처진 음성으로 전화를 받은 여자는 클림트가 맞았다.
3.
클림트는 예뻤다.
층낸 단발머리에 짙은 고동색 눈동자, 하얀 피부를 강조시켜주는 듯 검정 티와 블랙 진은 가히 그녀를 위한 색이었다라 말하고 싶다. 21살이라던 그녀는 소녀와 여자 사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덜 빠진 젖살을 보면 고등학생 같다가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을 보는 듯한 눈과 핏기를 머금은 듯 검붉은 오동통한 입술은 그녀를 관능적으로 보이게 했다. 굳이 웃고있지 않아도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여느 남정네들 또한 그녀의 늪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와이퍼는 계속 불쾌한 소리를 내며 차창을 규칙적으로 닦고 있었고, 에어컨 바람은 조금은 젖은 듯한 그녀의 몸을 말려주기 바빴다. 라디오는커녕 음악도 나오지 않는 차 안 속에서 그녀와 나는 그런 작은 소음들과 함께 그저 비 내리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대랑 11살 차이네요.”
“풋.”
“왜 웃어요?”
“아아, ‘그대’라…… 나이 차가 확실히 느껴지네요.”
“익숙해질 거예요, 곧.”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클림트는 오랫동안,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잔잔한 웃음 소리와 중간 중간 섞인 날숨들이 듣기 좋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축축한 공간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그녀의 향수 잔향과, 묘한 분위기를 나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나이 때문에 불편한가요?”
“아뇨, 전혀.”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은 클림트와 눈을 마주쳤다. 대답을 하고 나서 눈을 피할 법도 한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긋이 나를 쳐다봤다.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에 내가 먼저 눈을 피했더랬다. 눈싸움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눈을 통해 나누는 그 잠깐의 정서적 교감도 아닌, 나의 모든 것을 벌거벗기는 기분.
“J, 지금 미술관 갈래요?”
차분한 목소리가 나를 타이르는듯 얘기한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왼쪽 손으로 쓸어넘기며 내게 묻는 저 몸짓은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본래 타고난 성질인 것인지 궁금하기 시작했다.
4.
클림트는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줄 알았다. 예컨대, 진득한 초콜렛향이 폴폴 나는 싸구려 초코맛 과자를 먹을 때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종일 끼니를 걸렀다던 그녀는 그 작은 과자를 집어먹는 것 따위에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것마냥 기뻐했다.
“저는 초콜렛을 사랑해요.”
과자가 그녀의 입안에서 본체를 잃었을 때 불쑥 꺼낸 말이다. 애절하지도, 그렇다고 애정이 듬뿍 담긴 것도 아닌 가벼운 어조의 ‘사랑해요’가 그 순간 진심처럼 들렸다. 파인애플도 사랑하고, 망고도 사랑하고… 하며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표정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들을 지금 당장 먹고 있지도, 지금 당장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만 했을 뿐이었는데도 정말 그것들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나도 초콜렛 좋아해요. 화이트 초콜렛.”
“전 화이트 초콜렛 싫어해요.”
클림트는 화이트 초콜렛을 좋아한다는 내 말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왜요? 초콜렛을 사랑한다면서요. 내 물음에 그녀는 들고있던 과자봉지를 내려놓고 물티슈로 부스러기들을 꼼꼼히 닦아내며 말했다.
“화이트 초콜렛은 느끼하고 텁텁해요, 먹으면 속이 느글거릴 정도로.”
“그럼 초콜렛을 사랑하지 않는 거네요.”
그녀는 자신이 초콜렛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하는 듯했다. 초콜렛의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더러운 물티슈가 빈 과자봉지 안에 힘없이 추락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가 아랫입술이 삐쭉대더니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다크 초콜렛만 사랑하는 걸로 정정할게요.”
말을 바꾼다는 말 대신 정정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그녀의 나이에 퍽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아이처럼 한낱 다크 초콜렛을 사랑한다며 대뜸 고백하다가도,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어보면 표현이 성숙했다. 클림트의 말을 끝으로 난 대꾸 대신 그녀에게 작은 웃음을 보였고, 그녀는 특유의 눈썹을 올리며 눈을 반쯤 감았다 뜨는 행동으로 내 반응을 되받아쳤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는 거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은 사람에 대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물질적인 것이나,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었을 때 혹은 음식이 다였다.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이따금 한 번씩 생각 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망설임없이 없다고 했다. 담배 한 개피를 입에 가져가 물며 불을 지피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나이에, 저런 분위기는 어떻게 낼 수 있을까하고 신기해 했지만서도, 한 편으로는 썩어문드러진 상처의 치료를 포기하고 그저 그런대로 살아가는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