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도련님들과 그녀의 상관관계 A
W. 백리향&안개꽃
“수고하셨습니다!”
모든일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보 마냥 헤실헤실 웃으며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언뜻 미친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의 이상한 표정이었으나, 행복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만의 독특한 표정이었다.
이토록 그녀를 기쁘게 만든 이유는 일을 시작한지 무려 여섯달 만에 휴가라는 포상과 함께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휴가 동안 뭐하며 보내지?”
그녀는 흥얼거리며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기는듯 했으나, 이내 다이어리를 피고 가계부와 휴가에 대한 계획을 세세히 적어 내렸다.
얼마안가 술술 나아가던 팬이 멈추고, 그녀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띠리리
한창 행복에 빠져있는데, 눈치없게 휴대폰이 울렸다. 평소 자신의 분신 같던 휴대폰이 귀찮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휴대폰 액정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모르는 번호.
'누구지?'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받을까 말까?
잠시동안 뜸들이던 그녀는 급한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주야, 나 좀 데리러 와줘.]
이 목소리는 민현이다. 그런데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 바르고, 다정다감한 민현과는 사뭇 다른 말투.
항상 존댓말을 쓰는 그가 반말이라니.. 거기다 목소리 또한 다른때 보다 낮고, 거칠었다.
순간 낮의 일이 떠올랐다.
'오늘 클럽에서 친구들과 약속 있어요.'
'도련님이 그런곳도 가요?'
그녀가 새삼스럽다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보자, 민현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저도 즐길줄 아는 남자에요.'
'그럼 다녀올게요.'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생각에서 벗어나 민현이 많이 취했겠음을 깨달았다.
"거기 어디에요?“
.
.
.
그를 데리러 가기 위해 급하게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았다.
기사아저씨께 목적지를 말하고, 조금은 마음이 놓인듯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를 편안히 의자에 기대었다.
창 밖의 풍경은 알록달록한 색들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괜찮아요.”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moment’ 라는 고급진 화려함을 뽐내는 간판이 보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그녀의 차림새와는 대조적이었다. 잘 찾아온것 같네.
양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은 입구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확인증 보여 주십시오."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 애초에 그녀에게 확인증이 있으리 없었다.
이 곳은 흔히 말하는 상류층 자제들만 드나들 수 있는 클럽이기 때문이다.
“S기업 아들 황민현군 데리러 온건데 확인증이 필요한가요?”
“확인증 없이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데리고 나가기만 할게요. 정 뭐하시면 황민현군과 통화라도 시켜드릴까요?"
"이곳의 규칙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역시 통하지 않는다. 융통성이리곤 없는 사람들 같으니.
그녀는 마음속으로 경호원들을 원망하며 이를 갈았다. 그런다고 해결책이 나오진 않지만.. '아, 진짜 어떡하지?‘
그녀는 이도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리며 어정쩡히 입구 앞에 서있었다. 경호원들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지는듯 했으나,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은듯 했다.
'그냥 무작정 돌진해버릴까? 막 나가?!' 정말 진지하게 어처구니 없는 고민을하던 그녀는 이내 다짐한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정말 실행에 옮기려는지 한발 앞으로 나아 가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덮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큰 키에 차가운 분위기를 가진 미남자가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당히 찢어진 날렵한 눈매와 거만한 눈빛, 시선을 끄는 붉은 입술이 매우 매혹적인 남자였다.
“비키지?"
남자는 자신 앞의 조그만 여자가 거슬리는듯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냈다.
왠지 모를 남자의 카리스마에 압도 당한 그녀는 예의없는 그의 태도에 기분이 나쁜 것도 잊은채 살짝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는 한발 뒤로 물러나, 자신을 지나치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서오십시오."
경호원들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확인증 검사도 하지 않은 채 길을 비키며,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자신과는 확연히 다른 경호원들의 태도에 그가 어마어마한 재벌이라는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VIP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경호원의 말에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채 필요 없다는듯 제스처를 취하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저 남자야! 유일하게 나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남자!'
이럴 때 말 보다 행동이 먼저 나간다고 하는건가?
-덥썩
저질렀다..
순식간에 종현의 얼굴은 혐오스러운것을 보듯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옷깃을 잡은 작은 손에 시선을 고정한채 말했다.
"놔."
딱 한 글자인데 그것은 강력하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 남자 포커페이스 장난 아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저기를 꼭 들어가야 하거든요? 제발 한번만 도와주세요.."
그녀는 작게 속삭이며 경비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친근한척 그에게 팔짱을 끼는것도 잊지 않은 채.
그녀의 뻔뻔한 행동에 그는 어이없단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엄청 무섭게 보인다는걸 자신은 아는지 모르겠다.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삐딱히 한채 그녀를 내려다 봤다. 처진 눈으로 애절하게 자신을 올려다 보는 여자가 꼭 버려진 강아지를 연상시키는듯 했다.
단순한 꽃뱀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외모나, 옷 등 그 밖의 모든것들이 수수했다.
종현은 이 작은 생물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물론 경비원들에게 말하면 바로 끌려나갈테지만 어째선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안타까워 보여선가?
"마지막이야. 알아서 나가."
"부탁드릴게요. 사정은 들어가서 말씀 드릴..!"
-탁
이 정도면 그의 성격에 많이 참은듯 하다. 몇번의 경고에도 그녀가 떨어질 생각 않자, 결국 종현은 여자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던 경호원들은 그의 행동에 확신을 얻고,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였다.
거친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머지않아 여자가 소리쳤다.
"아, 놔요! 잠깐이면 된다니까. 민현도련님 잘못되시면 책임질거에요?!"
유유히 걸어가던 종현이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민현?' 종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여자가 지금 민현이라 말한건지.
물론 자신이 아는 민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글자에 모든 사고가 멈춘듯 했다.
무엇 보다 이 클럽은 상위층만 들어갈 수 있고, 대부분의 자제들은 조금씩 친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이름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민현이란 이름은 자신이 아는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렇다는건 자신이 알고 있는 황민현일 확률이 높다는 뜻.
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줄기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의 끝자락으로 가라앉았다. 붉은 입술이 뒤틀리며 그 사이에서 신음 같은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설마설마 저런 여자 입에서 그 이름을 듣게 될줄이야.‘
여자의 말투에서 민현과 꽤 친근함이 느껴졌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것으로 보아 민현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그럼 더 말이 안되지.
일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그가 클럽에 자신이 고용한 여자를 불렀다고?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즐거운 일이 떠오른듯 그의 입술이 유려한 선을 그으며 휘어졌다.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면 퍽이나 재밌겠군.‘
종현은 다시 뒤돌아 한창 씨름 중인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진짜 조금만 시간주시면 금방.."
"그만 놓아줘."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렸하게 들려온 음성에 경호원들과 그녀는 한순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갑작스런 종현의 제지에 세 사람 모두 당황한듯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벙한 표정으로 종현을 바라보는 그녀가 눈에 띄었다.
예뻐서도, 귀여워서도 아닌 너무 바보 같아서.
종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아는 사이야. 안으로 들어가는게 문제가 된다면 내가 책임지지."
종현은 그렇게 말한 뒤 자연스레 경호원에게 잡혀있는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뭐라 말할 것 같던 경호원들도 의외로 입을 꾹 다물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가 감격의 물결로 요동쳤다.
.
.
.
클럽 안은 상위층만 들어올 수 있는 곳 답게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지나다니는 곳곳 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장식품들과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에 눈이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단연 그 중 제일 눈에 띄는것은 클럽 중앙을 가득 매운 빤짝빤짝 빛나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즐기는 모습도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한참 멍하니 종현의 손에 끌려다니던 그녀는 문뜩 정신을 차렸다.
'이 남자한테 계속 손목 잡혀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여기 온 목적이 뭐였지?...... 맞다 도련님!'
미쳤다. 제일 중요한걸 까먹다니! 그녀는 깨달은 순간 열심히 걷던 걸음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녀의 발에 맞추어 걷던 종현도 덩달아 멈추게 됐다. 종현은 왜 그러냐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뻘줌히 웃으며 자신의 손목을 가리켰다.
"일단 손 좀..."
아..종현도 손목을 잡고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지했는지 작게 탄식하곤, 별다른 감흥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아줬다.
"그리고 아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쪽 아니였으면 저 들어오지도 못할뻔 했어요. 지금은 도련님을 찾는게 시급해서 더 길게 얘기는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먼저 가볼게요!"
또박또박 말한 그녀는 당차게 뒤돌았다. 물론 머지안아 다시 뒤돌게 되었지만..
-훽
'!'
갑작스런 힘으로 인해 기우뚱 그에게로 돌려진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듯 입을 벌렸다. 남자가 거칠게 팔을 잡아 자신을 돌려 세운거다.
'뭐야, 이 남자 왜이래?'
그녀의 귀여운 인상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급해 죽겠는데 이 남자가 왜이러나 싶었다.
조그만 입술을 삐죽거리며 뭐라 말하려 할때 종현이 먼저 가로챘다.
"찾는거 도와줄게."
아까까지는 도와주기 싫은듯 날 뿌리치더니 갑자기? 거기다 너무 친절해졌잖아! 찾는것도 도와준다니..
그녀는 의심스러운듯 그의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나 지금은 한시가 급한 때.
이내 시선을 거두며,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돌아섰다.
"어?"
마침 돌아선 그녀의 시야에 민현이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에 여러명의 친구들과 둘러앉아 있었다.
민현은 많이 취했는지 머리를 뒤로 젖히고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도련...민현씨!"
그녀는 다급하게 민현을 부르며 다가갔다. 앞에 있는 많은 인파들을 생각 못하고 성급하게 뛰다싶이.
그게 문제였을까? 자신 앞 여성의 구두에 발이 걸려버렸다.
'오늘 진짜 일진 왜이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기우는게 느껴지자,
억울함에 마음속으로 미친듯 소리치며 눈을 감았다.
한편 불안불안하게 그녀가 뛰어가는걸 지켜보며 뒤 따르던 종현은 아니나 다를까 발에 걸려 넘어지려는 그녀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휙 감싸 안았다. 놀랐는지 그녀의 입에서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본다면 백허그라 생각할 것 같은 모습이었으나, 종현은 아무 생갇 없는 듯 보였다.
그에 반대로 그녀는 많이 당황한듯 정신 못차리고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반응이 꽤 재밌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꽤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종현은 눈을 치켜뜨고 앞을 바라봤다.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그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황민현?'
민현은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팔에 시선이 닿았다가 천천히 종현의 눈으로 옮겨갔다.
살짝 풀린 눈 사이로 거친 눈빛이 뜨겁게 흔들렸다. 맞닿은 그들의 눈빛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두사람 사이에서는 미묘한 기류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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