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끝부분이 잘 기억이 나시질 않는다면 다시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08. " 타. " " ....... " " 밖에 날씨 좋대. 좀 걷자. "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박우진의 목소리와 눈앞의 박우진이 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겹쳤다.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할 말이 뭐냐고, 엘리베이터 앞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거냐고,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저 청자켓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잡을 뿐이었다. 어색하게 옆에 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층계를 응시하는 박우진도 말이 없었다. 1층입니다, 오늘따라 유독 인위적이게 들리는 안내 목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넓은 로비가 보였다. 먼저 내려 정문으로 걸어가는 내 손목을 잡는 박우진에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조금 긴장되어 보이는 표정의 박우진이 입을 열었다. " 말고, 뒷문. " " ...뒷문? 왜? " " 바다 보이잖아. " 아. 숙소의 통창 밖으로 탁 트인 바다가 있던 걸 잊고 있었다. 앞장서 나가는 박우진의 뒤를 따라 숙소 뒤쪽으로 나가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모래사장과 어두워진 하늘과 같이 까만 바다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한여름이지만 바닷가라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팔다리를 포근히 감싸듯이 스쳤다. 조형물 야자수 나무들이 세워진 길을 지나가자 바닷가를 걷는 몇몇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우진은 바다와 조금 떨어진, 모래사장 끝의 벤치에 앉아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손으로 벤치를 탁탁 쳤다. 벤치에 앉으며 박우진에게 청자켓을 내밀었다. " 이거. 고마워. " " 덮고 있어. 조금 있으면 추워져. " 따뜻하게 입어서 괜찮다고, 다시 청자켓을 흔들어 보이자 박우진은 작은 한숨을 쉬며 청자켓을 받아 다시 내 어깨 위로 덮었다. 생각보다 큰 사이즈의 청자켓이 반팔 위를 덮자 따뜻함이 훅 끼쳐왔다. 길어지는 정적에 신발코로 벤치 아래의 모래를 뒤집고 엎을 동안 박우진의 입에서는 여러 번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좀처럼 말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 박우진에 결국 참다못해 먼저 말을 꺼냈다. " 박우진, 무슨 일 있어? " " ...어? " " 아니.., 자꾸 한숨 쉬길래. " 그리고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말에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눈을 마주 보고 있던 박우진은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따라 상태가 왜 이러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깨에 걸쳐진 청자켓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박우진을 살피다 어느 때보다 붉게 물든 귓바퀴가 눈에 띄었다. 얘 요즘따라 자주 이러네... 무의식적으로 박우진의 귓가로 손이 올라가던 찰나였다. 여전히 손에 얼굴을 묻은 박우진이 조금 웅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 ...애들 술 마시는데, 나 한 방울도 입에 안 댔어. " " 어? 뭐라고? " " 지금 완전 맨정신이라고. "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박우진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깊게 초점이 박힌 눈빛이 얽혀들었다. 갈 곳을 잃었던 손이 조용히 제자리인 벤치 위로 내려앉았다. 그 얼굴이 뭐랄까... 11년 동안 박우진을 봐 오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과 분위기라, 밀려오는 낯설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발끝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언뜻 보이는 벤치 위의 박우진의 오른손은, 벤치 끄트머리를 감싸 쥔 채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길게 뜸 들이지 않고, 박우진은 말을 이었다. 소름이 돋도록 차분하고 낮은 말씨였다. " 그리고 지금 너한테 고백할 거야, 김여주. " #남사친 박우진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다시 박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박우진. 일순간 찌르르 울려 퍼지던 매미 소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소거됐다. 귀에 익어 이질적인 줄도 모르고 듣던 소리가 사라지자 박우진과 나의 주변에 정적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다. 문득 긴장한 듯 나를 보는 박우진의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아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 없이 살짝 벌어진 입술과 놀란 듯 조금 커진 눈을 담고 있을, 박우진. 박우진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도, 매미는 다시 울지 않았다. 꼭 자리라도 피해준 듯이. " 좋아해.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친구는 아니야. " " ........ " " 이렇게 빨리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 너나 나나 좀 더 컸을 때, 지금까지 기다렸으니까 그때까지도 기다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내 쪽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로 스스륵, 닿아오는 게 느껴졌다. 온통 얼굴을 가렸을 테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박우진한테 지금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입안이 바싹 말라서 크게 침을 한 번 삼켰다. 온갖 곳이 전부 심장인 것처럼 목이나 팔, 다리 할 것도 없이 온통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열이 나는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러웠다. 사실 아직도,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 ...아무래도 우린 너무 오래 친구였으니까. " " ....... " " 더 늦으면 이대로 굳어질 것 같아서.., 그게 싫었어.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 친구...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만약 박우진을 더 이상 친구로도 볼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면 그때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메었다. 나도 좋아해, 아까부터 줄곧 내뱉고 싶었던 말이 목 끄트머리에 걸린 것처럼 따가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앞이 새하얗게 바랠 정도로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박우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 지금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니야. 독촉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너를 이렇게 보고 있었다고. 니가 알았으면 해서. " " ........ " " 그리고 이제 막 들이대려고, 미리 예고하는 거야. "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우진을 봤다. 긴장이 풀린 건지 박우진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후련한 듯이. 얘, 이런 표정도 있었구나.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꾸만 모르는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뭐라도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생각해본 적 없다는, 모르겠다는 거짓말이라도.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고 해도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박우진은 받으라는 듯이 턱짓을 하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느릿느릿,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은주였다. ' 여보세요? 여주야, 어디야? 쌤들 1반부터 인원체크 돌고 있대! ' " ...아, 나 지금 잠깐 밖에 나왔는데... 들어갈게. " ' 응응. 빨리 와! '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어색하게 핸드폰을 내려놓고서 작게 말했다. 들릴까 싶을 정도로, 아주 작게. " 그, 인원체크 시작했다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 " 어. 먼저 들어가. 나도 곧 갈게. " " ...갈게. " " 여주야. " " ....... " " 그냥, 이름 불러보고 싶어서. 가. 시간 많이 늦었다. " 그 작은 목소리에도 박우진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주제를 확 바꿔버리는 말에도, 박우진은 기분 나빠하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말한다. 엉거주춤 일어나 박우진을 뒤로하고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보고 있을 박우진이 신경 쓰여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걸음을 더욱 빠르게 해서 로비 안으로 들어가자 다리에 힘이 풀려 다리를 굽혀 앉았다. 다시 돌려주지 못한 청자켓이 바닥에 닿았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연거푸 마른 세수를 하며 박우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한거번에 여러 번의 폭풍이 몰아친 느낌. 차마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한 건 역시, 박우진의 말대로 우리가 너무 오래 친구였기 때문일 거라고. 마음속이 둥둥 울렸다. 온통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남사친 박우진 숙소로 돌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 선생님이 들어와 인원체크를 하고 나가셨다. 남자애들 숙소도 지금쯤 하고 있을 텐데, 박우진은 잘 들어갔으려나. 남자애들 술 마신 거 들켜서 같이 혼나면 어떡하지. 박우진은 안 마셨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씻고 나오자 벌써 잠든 아이들도 있었다. 다시 가방 위에 가지런히 놓인 청자켓에 시선을 주고는 바닥에 깔아진 이불 위에 누웠다. 옆에서 핸드폰을 만지던 은주가 웃으며 이쪽을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 박우진 만나고 온 거야? " " 어? " " 근데 둘이 언제부터 사귄 거야? 중학교 땐가? " " ...박우진이랑 나 말하는 거야? " " 아니야? " 한껏 휘둥그레진 눈을 한 나를 본 은주 역시도 놀란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난 당연히 사귀는 줄 알았는데.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은주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이불 위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 중학교 때도 박우진이 너 좋아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 " 무슨... " " 걔 그때 한창 인기 많았잖아. 그래서 막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 때 선물 되게 많이 받았는데 걔가 그거 다 까서, 어떤 여자애가 물어봤거든.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냐고. " " ........ " " 그때 박우진이 있다고 했을걸? 오래 좋아한 사람 있다고. 그게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 뒤통수에 뭐라도 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전부터도? 문득 박우진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좋아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친구는 아니야. 입술이 조금 더 벌어졌다. 멍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은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너도 박우진 좋아하잖아. 그래서 지금쯤이면 사귀고 있을 줄 알았지. " " 나, 나? " " 아는 사람이 보면 티 엄청 나. 박우진은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삽질이래. " 너네도 참 힘들다. 은주는 타박하듯 말하고는 다시 엎드려 핸드폰에 열중했다. 표정이 우스워 보일 것 같아 은주에게서 돌아누워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박우진과 나. 우린 이제, 어떻게 될까. 눈을 질끈 감았다. 모순적이게도, 눈앞에서 박우진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불 끄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 잠은 다 잤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보기 |
[투지니] [하늘연달] [수 지] [데헷] [띵띵] [봉봉] [우진아♡] [분홍소시지] [부기부기] [뇽] [자두] [순진] [엣헹] [함께] [복숭아] [쥬쥬] [져아요헿] [빠숑] [정면] [강낭] [1102] [짹짹] [별두개] [우진아악] [꿍이] [여름동화]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우진이 시점이에요. 댓글 늘 감사드리고 부족한 글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