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 10.
w.규닝
10. Andante
전주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사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번화가를 벗어나 세번째 버스를 갈아타고나서야 든 생각이었다. 자꾸만 귀찮게 떠들어대는 우현을 뒤에 달고 버스에 오른 성규는 그때서야 그냥 혼자 올걸,하는 생각이 마악 들었다. 시골집이라며, 완전 도시잖아? 번잡스러운 시내를 두리번거리던 우현이 종알대며 물었다. 시골집이라길래 조금은 운치 있는 풍경이길 바랬던 기대감이 푸욱 꺼지는 기분이었기에 우현이 자꾸만 귀찮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거짓말친거야? 그에 성규는 가까이 다가온 우현의 얼굴을 밀어내며 대답했다. 가만히 안 있으면 길 한복판에 던져놓고 갈거야.
그 뒤로도 끊이지 않던 우현의 재잘거림이 서서히 멈춘 건 조금씩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으로 옮겨갈 때 즈음이었다. 성규는 어느새 동그란 눈으로 주위 풍경에 집중하고 있는 우현을 보다가 픽 웃었다. 서울 토박이인 거 티내고 있네. 성규가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흔들리는 창문에 기대 턱을 괴었다.
"완전 멋지다…."
한시간을 꼬박 달려온 버스에서 내린 시각은 정오가 조금 넘어가던 때였다. 늦지는 않았네. 성규는 우현이 자리에 멈춰서 한바퀴 돌면서 주위를 둘러싼 산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혹시라도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김명수는 미리 차단시켜 놓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성규가 정류장 표지판 밑에 멀뚱히 선 우현을 돌아다보았다.
"뭐해? 빨리 와."
"공기도 대빵 좋은 것 같아. 완전 신기하다,여기."
"지랄하네. 공기는 다 똑같으니까 빨리 좀 걸어."
"아냐,달라. 이런데서 살아서 니가 그렇게 자란거야?"
우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에 반해 성규의 눈썹은 어이없다는 듯 꿈틀거렸다.
"그렇게 자란 게 뭔데?"
"천사가 됐냐고."
공기 좋은 마을의 천사. 거기까지 말했는데, 히 웃던 우현의 뒷통수엔 제법 강한 힘의 타격이 날아들었다. 성규가 답지 않게 다이나믹한 표정을 지으며 우현의 웃는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존나 징그러워. 성규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날씨는 따뜻했다. 1월이라 논 곳곳에 남아있는 눈들은 산이 내린 그늘에 져 녹지 못한 채로 꽁꽁 얼어 있었으며 주욱 이어지는 비포장 도로 옆 쪽, 드문 드문 세워진 전봇대에서는 채 떨어지지 못한 눈더미들이 부스스하게 떨어져내리기도 했다. 성규는 눈을 들어 앞 쪽에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다가, 이내 올곧은 시선을 발 아래쪽으로만 두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에 너무도 자주 돌아다녔던 길바닥이 변한 것 없이 생생해서ㅡ어쩌다 꿨던 꿈처럼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억이 싫었다. 성규는 걷고 있는 제 신발코를 내려다보며 앞을 보지 않아도 익숙하게 걸을 수 있는 길바닥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반면 다섯걸음정도 느리게 성규의 뒤를 좆던 우현은 간간히 들려오는 까치 소리에도 호들갑을 떨며 우와,우와를 연발했다. 까치 라이브는 처음 들어봐. 그렇게 말하며 느려졌던 발걸음을 빨리해서 성규 옆으로 따라붙은 우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규는 얼어붙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제가 걷고 있는 길바닥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마을 역시 신작로가 들어선 것을 제외한다면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마을 문턱에서 잠시 주춤했던 성규가 아무렇지 않은 발걸음으로 구불구불한 길에 들어섰다. 겨울이라 헐벗은 마른 나뭇가지들도, 낮은 담벼락에 스치는 한기 어린 1월의 찬바람도 쓸쓸함을 각인시켜 주듯이 작용해오는 느낌이 싫어서 그렇잖아도 꺼진 고개를 더욱 수그렸다. 우현은 뒤쳐졌던 발걸음을 빨리해 성규의 옆에 따라붙었다.
"저기야?"
난데없이 아는척을 하며 우현이 어느 한 집을 가리켰다. 그러자 숙였던 고개를 슬그머니 든 성규가 우현의 손 끝이 가리키고 있는 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 맞췄다."
직감. 우현이 웃는 듯 만듯,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안 사는 것 같아서."
그에 성규는 의미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개새끼라 촉은 좋네."
*
옥탑방의 대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낡아보이는 회색 대문이 녹슨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 한번에 열리지 않아 한참동안이나 앞뒤로 당기며 씨름하던 성규가 기괴한 마찰음과 함께 열리는 대문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이윽고 눈앞엔 가뜩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데다가, 1월의 황량함을 그대로 떠안고 있는 마당이 드러났다. 성규는 몇년동안이나 방치되어있던 파삭한 마룻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와, 전형적인 시골집이네."
"가본적도 없다면서 전형적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냐."
"내가 드라마를 좀 많이 봐서 척보면 척이지. 너 어렸을 때 저 마루에서 막 뛰어놀았을 것 같다."
우현의 손끝이 낡은 대청마루를 향했다. 잠시 기와지붕을 올려다보던 성규가 우현의 말에 눈을 내려 마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성규가 대답 없이 우현의 앞쪽을 지나쳐 갔다. 맞구만. 우현이 씨익 웃고나서 저를 무시하는 성규의 뒤를 그림자마냥 좇아갔다.
"몇년만에 오는건데? 완전 거미줄 투성인거 봐. 꽤 오래 아무도 안 살았나봐."
"십년."
"왜 욕을 하고 그래."
"욕은 씹년이고."
십년이라 했다. 성규가 짐짓 짜증을 드러낸 눈으로 우현을 쏘아보았다. 장난스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우현이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아아 장난친거야. 째려보지마.
"조용히 좀 하면서 따라와. 귀찮아 죽겠어 여러모로."
"근데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진지하게 있으면 너ㅡ우울증 걸릴걸, 아마도."
우현이 성규의 왼쪽에 따라붙어 어깨를 으쓱했다.
"날 데려온 건 잘한 선택이야."
"……."
"너한테 난 꼭 필요하거든."
그건 내가 한달간 너를 지켜본 후 내린 결정이지. 정처없이 걷던 성규의 발걸음이 한 단계 느려짐을 깨달은 우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기서 몇마디 더 했다간 오히려 내쳐질 수 있으니까 적당히. 속으로 이상한 다짐을 꾹꾹 억누른 우현이 닭살스러운 제 말에 아무런 반응 없이 걷기만 하는 성규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랄하지마, 개새끼야. 적어도 이런 말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성규의 다물린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뿐만 아니라, 힐끔힐끔 훔쳐보는 제 시선을 느낀 것인지ㅡ고고하게 앞쪽만 보던 성규가 반대편으로 살짝 시선을 비켰다.
우현은 새삼 하늘에 기도했다. 욕으로 돌아올 줄만 알았던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것으로도 김성규에 감사해서.
그렇게 한참을 집 안에서 서성거린 결과, 성규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뒷뜰에 있던 큼지막한 나무 아래였다. 솔직히 성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어 마냥 신비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집 안 곳곳을 느린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던 성규의 행적을 따라가보자니 더욱 더 싱숭생숭해진것은 우현 쪽이었다. 쾌쾌한 냄새마저 풍기는 낡은 집은 10여년 만에 오랜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규 또한 어린날의 흔적을 돌아보고 있는 것 같았기에 우현은 계속해서 열 발자국 쯤 뒤에 물러서 그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다. 천사라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인간다운 면을 보니 새로운 마음도 들고 해서. 우현은 멋쩍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성규의 행적을 따랐다.
뒷뜰에 무성한 잡초들은 집이 드리운 그늘에 가려져 채 녹지 않은 얼음을 끼고 있었다. 걸음 걸음을 뗄 때마다 파삭 거리며 깨지는 얼음들을 느끼며 멈춘 곳은 오래돼 보이는 나무 아래. 앞서 걸음을 멈춘 성규가 고개를 꺾어 마른 나뭇가지를 올려다 보았다.
집을 둘러볼 때 느낀 건데, 다른 집들에 비해 평수가 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나온 나무들도 많은데 유독 이 나무 아래 멈춰선 까닭은 아마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우현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떼어 성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성규가 한참동안이나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두손을 모아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우현의 직감이 빨랐다. 여기 묻고싶어?
성규가 가벼운 상자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릴 듯 말듯한 고요한 대답이 뒷뜰 위로 조용히 흩어졌다.
넌 개새끼니까 삽질은 니가 해. 이 곳에 상자를 묻자고 결정한지 몇분 뒤에 성규가 내린 명령이었다. 허탈하게 웃은 우현이 쳐다보자 성규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원래 개새끼들은 땅파는 거 잘하잖아. 그리고나서 넘겨받은 건 그냥 삽도 아닌 손바닥만한 모종삽이었다. 오래된 창고를 뒤적거리더니 나온 것이라곤 작은 모종삽 하나. 진심이냐는 듯한 눈으로 우현이 묻자 성규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두개도 아니고 한개니까 니가 파야지. 그렇게 말해오는 주제에 요구사항은 많았다. 좀 더 둥글게 파. 더 깊숙히 파. 성규는 우현이 땅을 파는 구멍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을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만하면 됐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 깊숙히.하고 들려오는 대답은 얄밉기는 했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얕게 팠다간 빗물이나 외부 타격에 금방이라도 드러날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성규의 눈빛은 절대 장난식의 눈이 아니었다. 가만히 구멍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우현은 작디 작은 모종삽으로 낑낑대며 땅을 팠다. 그렇게 해서 팔이 절반 넘게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성규에게서 됐다는 대답이 떨어졌다.
성규가 굽힌 무릎 위로 두 손을 올려두고 한참동안이나 차가운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왜? 더 파?"
"아니. 됐어."
"그럼 왜 그러고 있어, 넣어야지."
"…알아, 넣어야지."
"잠깐."
"왜?"
"방금 그말 야했어."
아! 기어이 성규에게서 필요 이상의 강도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우현이 악소리를 내며 맞은 곳을 손으로 감쌌다. 제 딴엔 앞서 설명했듯이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을 뿐이지만. 진짜 지랄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성규가 날카롭게 째려보던 눈을 거두고 구멍 안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쓸데없는 농담 뒤에 찾아든 정적은 예상외로 길게 이어졌다. 날이 섰던 눈을 거둔 성규의 표정은 어느새 아까 전과 같이 담담하게 굳어 있었으며 무릎 위로 고정시켰던 손을 다시금 천천히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성규가 눈을 들어 빤한 시선으로 우현의 얼굴을 쳐다봤다.
성규가 꺼내든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한참동안이나 우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성규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꺼내어 든 물건이었다. 뭐하는거야? 우현의 물음에 성규는 그저 짧게 대답했다. 할 말이 있어서. 이극고 사각거리며 움직이던 연필은 고요한 뒷뜰 안에 더욱 묘한 분위기를 몰아넣었다.
아마 못다한 말을 종이에 풀어 상자와 같이 묻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마도 꽤 오래 걸리겠지. 구덩이를 사이에 두고 성규의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우현이 잔디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떠들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며ㅡ아예 발랑 드러누운 우현이 제 팔을 배게 삼아 머리를 받친 후 개인 하늘로 눈을 돌렸다.
연필이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조금 크게 귓가에 다가왔다. 주위가 너무 고요한 탓인지 쿵쿵,하고 그에 맞춰 심장이 울려오는 것도 같았다. 우현은 제 위에 바로 보이는 헐벗은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까치다.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날아가버려 오래 시선을 두진 못했지만. 흐음 하고 숨을 들이킨 우현이 무심코 성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연필소리가 잠시 끊겼다고 생각했더니 성규는 글씨를 써내려가던 손을 멈추고 우현의 옆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민망하게 쳐다보고 있는거야. 의아한 눈을 둥글게 뜬 우현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왜?"
"할 말은 많은데, 계속 글씨로 쓰려니까 손 아파서."
성규가 가지고 있던 연필을 조물거리다가 잔디 위로 내려놓았다.
"말로 할까 해. 근데 니가 있어서. 그러니까…들어도 되는데 다 듣고나면 모른척 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성규가 어느새 구깃해져있던 종이마저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말로 한다고? 의아한 눈을 하고 성규를 보던 우현이 머리를 들어올려 자세를 고쳤다. 정자세로 누웠던 몸을 틀어 구덩이 쪽으로 고개를 가져온 우현은 그대로 턱에 손을 괸 채 성규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구멍에다가 대고 말을 할거라니. 입술을 쭉 내밀고 구덩이를 들여다본 우현이 픽 웃었다. 성규는 어느새 우현과 마찬가지로 배를 깔고 잔디 위에 엎드려 있었다. 구덩이를 쳐다보고 있던 우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멍을 향해 머리를 숙인 성규 때문에 우현은 성규의 정수리밖에 마주할 수가 없었다.
큼,흠흠. 하고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첫마디의 운을 뗐다.
"나 머리카락 잘랐어."
"……."
"좀 이상하지. 너무 짧아져서 적응이 안돼. 엄마도 아마 이상하다고 생각할거야. 엄만 내 머리카락 좋아했었는데 멋대로 잘라서 미안해."
평소 저에게 대하던 것과는 달리 한껏 누그러진 말투였다. 조곤조곤히 구멍을 향해 말하는 목소리에ㅡ고백을 듣는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흐뭇하게 웃은 우현이 눈 앞에 드리워진 정수리를 쳐다보며 꽃받침을 했다. 귀여워 죽겠다, 김성규.
"근데 어쩔 수 없었어. 엄마 탓이야.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불 지르고 도망가래? 내 앞머리가,"
"……."
"엄마 때문에 다 타버렸잖아."
하지만 그 대목에서는, 흐뭇하게 올라갔던 우현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굳어지며 내려갔다. 꽃받침을 하던 손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던 것도 아마 성규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 불,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으리라. 여전히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머리통에 딱딱한 시선을 고정한 우현이 잔잔하게 흘러오는 성규의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놓고 혼자 도망가냐, 진짜로 나 죽일려고 했냐…엄마.
"그렇게 내가 죽었으면 엄만 행복했을까?"
"……."
"그럼 그냥 죽을 걸 그랬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우리 둘다 괴로워 질 줄 알았으면. 도망가지 말고 그대로 누워서ㅡ진짜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죽어줄 걸 그랬어. 그게 엄마가 나한테 만들어 준 기회였다면."
그런 주제에… 그렇게 사라져놓고 다시 나타난다는 게, 이런 꼴이냐 엄마. 먼 곳으로 도망가서 꽁꽁 숨어 살아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돌아왔어. 그렇게 말하는 성규의 목소리는 아까 전보다 훨씬 더 푹 꺼진 목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냥 죽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 빠져나온 것이 후회스러울정도로 그래. 그러니까 나…. 명수를 계속 보게된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
"나 그 사람이랑 잤다…몰랐지."
"……."
"행복했어."
엄마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사람이랑 자게 돼서 행복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적어도 며칠간은 엄마한테 최고로 멋진 남자가 되어줬으니까. 그렇게 엄마가 웃고 살면 나도 행복했고ㅡ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어. 내가 눈감고 그렇게, 딱 한번만 하는 날이면…, 엄마도 명수도 며칠간은 걱정 없이 웃고 살았으니까."
그게 난 그렇게 좋았어, 엄마.
성규가 팔을 조금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구덩이에 고개를 박고 있던 성규가 불편한 자세를 고쳐 잡은 후 한참동안 손등 위에 턱을 기대었다.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그랬다는 말을 끝으로 구덩이에 얼굴을 묻고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우현의 얼굴에선 이미 표정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불을 질렀다는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표정을 잃은 우현은 가만가만히 말해오는 성규의 머리칼에 꽂았던 시선을 거두어 그와 마찬가지로 구덩이 안쪽으로 시선을 꺼트렸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사실 알 것도 같지만 역시 전부 다, 모르겠으니까. 끝까지 제 쪽으로 얼굴을 들어올리지 않는 성규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우현이 굳어있던 미간을 살짝이 찡그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곁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만 가득했다. 점점 늦은 오후로 접어들어갈수록 바람도 함께 차가워져 오는 탓인지 그나마 밝았던 공기가 차츰 식어간다고 느꼈다. 끊임없이 죽음을 말하고 있는 김성규에 뭔가 말을 거들고 싶지만 입조차 움직이지 않아 어물거리던 우현이 있잖아,하고 들려온 성규의 목소리에 작게 움찔했다.
"제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할까 말까 망설였어, 계속."
성규가 말을 할 때마다 보고있는 머리칼이 흔들렸다. 바람은 계속해서 잡초들 사이를 스미고 있었고ㅡ 나란히 누운 잔디 위는 어느새 군데군데 보이던 살얼음마저 어느정도 녹았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엄마,"
"……."
"난 아직도 그렇게는 못하겠어."
성규의 고개가 살짝 들어올려졌다. 그렇게 팔을 움직인 성규가 구덩이 옆 쪽에 놓아두었던 나무 상자를 가져다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은 주제에 상자를 구덩이로 내려놓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성규가 구덩이 아래로 상자의 위치를 바로잡는 것까지 지켜보던 우현이 끝내 고개를 옆쪽으로 돌리고야 말았다.
"명수 용서 못해서 미안해."
잘못한 것은 없지만, 다 제 잘못 같았다. 멋대로 성규를 천사로 판단해버렸던 지난 날의 안일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흩뜨려놓았다. 그렇게 성규의 고해성사가 시작되고 나서 이상하게도ㅡ이유 없는 죄책감이 들어오던 것도 다 그 탓이었다. 불을 질렀던 날이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도 다, 편의점 앞에서 천사를 처음 만나던 날 보았던 그림이 너무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져서.
천사의 앞머리는 까맣게 불에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우현은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신비롭다. 마치 나를 위해 내려온 그런, 묘하고도 아름다운 페로몬을 지닌 천상의 사람일 것이라고 찬양을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 때의 황홀함은 지금, 너무도 아프게 우현의 마음속을 헤집어대고 있었다.
네 상처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천사니 뭐니하며 떠들어댔던 게 미안해. 나는 너에 대해 백분에 일도 모르면서 곁에 있겠다고 매일을 졸라대서, 그게 너무 미안해. 우현은 아까 성규가 그랬던 것처럼 짓고 있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꺼트린 고개를 들어올릴 줄 몰랐다.
한참이 지나 구덩이를 메운 성규는 작은 비웃음을 흘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가 울긴 왜 울어?"
"……."
"일어나. 옷 더러워져."
성규가 우현에게 장난식의 발길질로 허리께를 쿡 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현의 숙여진 고개는 좀처럼 들어지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배를 꾹 누르면 터져나오는 아이러브유, 뭐 그런 녹음인형처럼 미안해란 말을 뱉은 우현의 목소리에는 역시나 물기가 가득 서려있었다. 우현의 입에서 새어나온 미안하단 말과 동시에 장난스러운 발길질을 멈춘 성규가 한동안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게 되었다. 그렇게 성규는 한참동안이나 우현의 주어 없는 사과를 듣고있어야 했다.
우현이 서울로 올라가기를 재촉했다. 언제는 비빔밥 먹고 가자며.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때는 언제고, 어느새 표정을 고치고 올라가리를 재촉하는 우현의 팔을 툭 치며 말한 성규가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 바꾸기는.
미안해, 미안해. 성규의 귓가에서는 아까 전 우현이 늘어놓았던 의미가 불분명한 사과가 맴돌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묻고 싶지만 또,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꼭 제가 상을 당한 사람처럼, 뒷뜰에서 있었던 기억은 지우고 싶은 모양인지 그에 대해선 일절 말을 꺼내지 않고 있는 우현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본 성규가 내려왔을 때처럼 창가 쪽에 자리하면서 생각했다. 명수를 용서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저의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터진 우현의 독백에 오히려 당황해버린 것은 제쪽이었음으로.
우현은 기차 속에서도 말을 잃었다. 분명 시작하기 전에, 다 듣고 나면 모른 척 해달라고 당부를 했음에도 우현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심란한 머릿속이 있는대로 표정에 비쳐져 더욱 가라앉은 성규가 어둑어둑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젠 같이 있는 사람이 우울하면 안되는 거라면서, 개새끼. 여러모로 말을 바꾸고 지랄이다. 그렇게 성규가 어두컴컴한 논둑 위로 쏟아지는 별과,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가로등에 시선을 마악 던지고 있을 때였다.
"미안해."
우현의 사과가 다시 한 번 터졌다. 성규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며 창문 위로 미친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 반문했다. 뭐가 미안한데? 자꾸. 그 뒤로는 성규의 입에서 정말이지 무의식적이기 그지없는 말이 터져나왔다.
"하나도 안 미안해 해도 돼."
"……."
"난 오늘 너 때문에ㅡ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
…안아본거야.
올 때와 달리 지금은 비록, 나무 상자는 품에 안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잠시동안이지만 정오 즈음에 남우현의 손에 의해 제 품에 안겼던 상자의 느낌을 떠올리면서 말한 성규가 뻣뻣한 고개를 여전히 창문 밖으로 고정시켰다.
그렇게 기차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덜컹거리는 소음을 내며 둘 사이의 정적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성규는 제 말에 미동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우현의 옆모습을 힐끔대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바깥 공기는 아주 찬 것 같다. 성규가 어쩌다 내쉰 한숨에 창문 위로 김이 서리는 것을 보고 아파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1월은 아직 너무 추우니까. 아까 개새끼를 닦달해서 나무 상자를ㅡ 더 깊이 묻고 온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2:09 |
오늘은 두시 오늘도 아무도 없겠져?^^;꿈나무들..언넝 자세요 키 쑥쑥 커야죠 p.s 그대들 전편에서 다들 짠것처럼ㅋ.ㅋ/명수는 짝이 없으니까 워더!/하시는데 ★아닙니다 제가 이미 가져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