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2차전
Round 8.
"언니"
"네?"
"그.. 프로젝트 같이 하는 강다니엘씨 있잖아요"
"아, 네. 그 분은 왜요?"
"혹시 여자친구 있으시대요?"
"...글쎄요, 저도 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여느 날처럼 가득 쌓인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는데 점심시간 10분 전쯤인가 옆자리 세윤씨가 살짝 발그레해진 볼로 조심스레 입을 열길래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저런 표정인가 속으로 생각했는데 정말 예상외의, 퍽 당황스러운 질문이라 여전히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고 있던 손가락들이 멈춰져버렸다.
사실, 도담이의 아빠로서 인정은 해 줬지만 - 인정이라기보다는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더이상 숨기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 내 남편이자 영원한 김도담의 아빠로 묶어둘 생각은 없었기에 - 상식적으로 내 행동을 다니엘의 부모님과 친지분들이 이해하실 수 없었을 거고 도담이에게 미운 소리를 듣고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았다 - 애인이 없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마 없으실걸요' 하는 대답이 나갔어야 했는데 그 순간 나는 왜 모르는 척 했을까 하고 스스로가 궁금하고 당황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 어린이집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도담이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잠깐 들리실 수 있으실까요?]
[지금 약 먹고 잠들긴 했는데 아무래도 원에 있는 것보단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뒤숭숭한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마음을 더 복잡하게 하는 문자가 날아왔다. 주말 내내 열심히 논 탓인지 오늘 등원 때에도 영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더니 결국 병이 났나보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잠시 들릴수는 있었지만 딱히 손을 벌릴 수 있는 곳도 없고, 그렇다고 원에 두기엔 만약 감기라면 다른 친구들까지 옮을 수 있으니까 그건 그거대로 걱정이었다. 이럴 때마다 죄인이 되는 워킹맘. 진짜 둘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 일 때문에 애가 더 힘들어지고 정작 필요한 건 못 해 주는 이 고통.
"여보세요, 네. 선생님. 도담이 많이 아픈가요?"
"너무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무래도 감기인 것 같은데 약 먹으니까 열도 내리고 지금은 자고 있어요"
"아.. 열도 났어요? 주말에 좀 신나게 놀았더니 몸살인가.."
"어머님 바쁘신 건 알지만 오실 수 있을까요? 아까도 그렇고 아마 깨어나면 어머님 많이 찾을 것 같은데"
"하... 그게... 선생님 일단 제가 나중에 연락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 일단 연락 주실 때까지 원에서 잘 케어 해 보고 있을게요"
아이가 아프다는 소리에 입맛도 싹 사라졌다. 하필 나의 유일한 구원자인 엄마는 간절기를 제대로 맞아서 감기 투병생활을 하는 중이고 다들 밥 먹으러 떠난 고요한 사무실에서 들리는거라곤 내 한숨 소리 뿐이었다. 어디 도움 청할 곳이 없나 하고 통화목록을 훑어보면 요 며칠새 열심히 연락했던, 아까 그 대화의 주인공 이름만 가득해 결국 창을 지운 채 책상에 폭 하고 엎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도저도 하지 못 한 채 점심시간은 끝나버렸고 머릿 속 가득 아이 걱정을 담은 채 다시 일을 하는데 영 손에 잡힐리가. 그래도 작업 속도가 더뎌지면 퇴근도 더뎌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과 정신줄을 겨우 붙잡고 꾸역꾸역 일을 하는데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티가 났나보다. 대리님이 오셔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영 불안해보이던데"
"네? 아, 그게... 티 많이 났어요?"
"조금? 어떻게든 일을 해 내려 하지만 어딘가 초점이 나간 것 같달까"
"하하.. 아기가 아프다고 해서요. 그래도 할 일은 해야죠"
"아휴... 고생이 많다 고생이 많아. 힘들지?"
나도 일하고 있을 때 애 아프다는 소리가 제일 맘 아프고 힘들었다면서 바짝 집중해서 지금 하고 있는 것만 끝내면 대충 미팅 갔다고 둘러대서 일찍 퇴근시켜 주시겠다는 말에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일을 해 보지만 어째 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인다 싶으면 잊고 있었던 자료 정리가 남아있었고 이젠 진짜 끝이다 하면 옆에서 갑자기 또 다른 부탁이 들어오고. 마음이 급하니 속도도 느려져서 어느새 시계는 3시 반을 넘어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전화를 받은지 약 3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여보세요"
"어, 누나 바빠요?"
"응, 좀 많이. 왜? 무슨 일인데?"
"아니, 얘기하자면 좀 길긴 한데"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하면 안 될까"
"그럼 일단 결론만 말할게요. 도담이 내가 데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어? 도담이를? 니가 왜?"
"얘기 길어지니까 나중에. 도담이 아픈 건 알고 있을테고. 어차피 지금 바쁜 것도 그거 때문 아니에요? 이제 천천히 해요"
"그렇긴한데... 알았어, 일단. 도담이 괜찮아?"
그 말 한 마디에 온 몸을 지배하던 긴장이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결론만 말하라고 한 건 내 쪽이었지만 막상 결론을 들어보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기승전결 하나하나 설명을 다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 딸이 다니엘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도담이가 어린이집을 다닌다는 것도, 그 어린이집이 우리 회사 부속이라는 것도 말한 적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남은 일들을 마저 해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작업 능률도 올라가고 속도고 빨라진 것 같아 5시가 채 되기 전 모든 일을 끝마치고 대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며 얼른 회사 밖을 나가 다니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이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얼굴 마주한 건 두 번뿐이고, 몇 시간만에 아픈 게 나아질리도 없으니 지금쯤 아이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솔직히 말하면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다
"여보세요, 어디야?"
"일 마쳤어요? 아직 퇴근 시간 아닐텐데"
"애 아프다고 양해 구해서 빨리 하고 나왔어"
"그럼 근처 카페에 있어요, 내가 데리러 갈게"
괜찮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진짜 괜찮은데, 계속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게 부담스럽고 무섭다는 것이 솔직한 내 본심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스스로가 두렵고, 욕심 부리지 않기로, 밀어내기로 했던 다짐이 이렇게 계속 가다간 무너질 게 뻔하니까. 섣불리 도망친 주제에 아이로 발목 잡는 게 너무 싫어서 거리를 두고 싶은데 그런 나를 알긴 하는지 다니엘은 계속 밀고 들어온다. 도와주지 말고 웃어주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어? 엄마 저기 있네"
"김도담~ 이제 아야 안 해요? 괜찮아?"
"응. 갠차나"
"엄마가 네 걱정 얼마나 한지 알아?"
"내 걱정은 왜 안 해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나도 놀랬어. 갑자기 네가 애 데리고 있다고 해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한 마디를 안 지지. 애기 괜찮다니까 땡땡이는 왜 쳤어요"
"땡땡이 아니거든? 오늘 내 몫 다 하고 정당하게 퇴근한거야"
그 사이에 얼마나 더 친해진건지 도담이는 나를 보고서도 다니엘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 없이, 매우 안정적인 자세로 폭 안겨 있었다. 쿨패치는 어린이집에서 준 건지, 아님 다니엘이 이리저리 검색 해 보고 사 준 건지 이마에 떡하니 붙이고서는 쌩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내 걱정과 달리 내게 오지도, 나를 찾지도 않는 모습에 조금 심통이 난 건 사실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다니.. 딸 키워봤자 다 소용없네, 뭐
와중에 애를 품에 안고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 하는 덩치 큰 아가 얘기도 들어줘야만 했다. 생각치도 못 하게 도담이를 만나서 놀랐는데 애가 아파서 더 놀랐다. 그래서 곧바로 전화했는데 내 목소리가 딱딱해서 마지막으로 놀라고 심지어 살짝 슬프기까지 했다 하면서 '빨리 나 칭찬 해 주세요. 수고했다고 말 해 주세요' 하고 보채는데 아주 정신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달까.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걱정을 덜기는 했는데 너 어쩌다 거길 간 거야?"
"내가 아직 그 얘기를 안 했구나. 일종의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운명? 운명이가 뭐야?"
"응? 운명이 뭐냐면 만날 수밖에 없는 거. 도담이랑 아빠 사이 같은거지"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고. 도담이 엄마한테 오세요"
"아니야, 시러. 아빠 됴아"
"아빠 좋나? 나도 니 좋다"
한 번 더 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 하는 생각을 했다. 뭐 얼마나 봤다고 저렇게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건지. 그동안 가지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같은건지 아니면 그냥 다니엘이 마음에 들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퍽 다정하고 꿀 떨어지는 투샷을 보고 있더니 그렇게 수없이 다짐했던 욕심 같은 게 자라나는 걸 느꼈다. 한 번쯤 하고 상상만 해 오던 그림이 꽤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아서. 똑같은 얼굴로 똑같이 웃고 있는 모습이 예쁘게도 보여서.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내 욕심에 저 둘에게 또 다른 고통을 줘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아 참, 우리 부서에 세윤씨가 너 마음에 드나 봐. 나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묻더라"
"세윤씨? 그게 누군데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
"뭐야, 나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모르겠다고 했어요? 사람 설레게"
"아니 뭐 그냥. 내가 함부로 말해버리면 좀 그러니까. 네 의사도 있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겠다고 꺼낸 말이 오히려 내겐 독이 된 것 같았다. 저 의심 가득한 눈빛을 받게 된 걸 보니. 대충 둘러대고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래서 어떻게 만났냐니까?' 하고 말을 꺼내자 '아직도 말 안 했어요, 내가?' 하더니 품에 안겨 손장난을 치는 도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꺼냈다. 듣고 있자니 꼭 시트콤이나 소설 같은 그런 이야기들을.
♥라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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