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이름 한 마디 물어보는 게 그리도 어려웠다
2년 만에 다시 마주한 지금도
마음을 숨긴 채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멍청하게도 난 아직도 너를,
좋아해 01
고백이란 걸 너에게 해볼 수 있을까?
그를 좋아한 시간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등학교로 올라가기 전 겨울부터, 스물 셋의 지금까지. 그의 곁에 있으면서 수도 없이 생각해왔다. 고백, 해볼까. 네가 거절해서 우리 사이가 멀어진다고 해도 내 마음만큼은 시원해지지 않을까. 어쩌면 그 후에는 장난이라고 웃어 넘길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러면 마음이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마 정말로 돌이킬 수 없어진다면? 수 없는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재촉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걸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그 아이는 그랬다. 옹성우는 나에게 항상 애매했으니까. 한없이 가까웠다가도 내가 손을 뻗으려고만 하면 그대로 어마어마한 성벽을 내 앞에 떨어트렸으니까. 고백을 하고 나서 지을 표정조차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웃어줄 지, 화를 낼 지, 장난치지 말라고 할 지 도저히 가늠이 안 가게 나를 대했으니까.
그와 나의 관계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못했다. 네가 그 벽을 네가 부수면 이 애매한 사이마저 우리는 끝이 날 거야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ㅡ 옹성우 어제 복학했다더라.
처음에 그 소리를 옹성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는 뭐랄까, 그 알 수 없는 벽이 두 개로 늘어난 기분. 그가 군대에게 가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 애매한 사이를 옹성우와 나는 친구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일은 아니더라도 그 인생에서 그런 중요한 일 만큼은 나도 친구처럼 똑같이 알려줬으면 했다. 하지만 나는 늦은 밤 옹성우가 푹 눌러 쓴 모자를 벗어 밤톨 같이 짧은 머리를 보여주며 나 군대가, 라고 멋쩍게 웃을 때까지 전혀 알지 못 했다. 주변에 강다니엘이던 황민현이던간에 넌지시 언질이라도 줬으면, 그 날 네 앞에서 그렇게 울지는 않았을텐데. 옹성우와 함께 항상 만나던 우리 집 놀이터에서 나는 그렇게도 울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답지 않게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무슨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애써 눈물을 그쳤을 때 옹성우는 말없이 나를 안았다. 그 순간에마저도 나는 그저 옷자락을 쥐고 벌벌 떨었다. 원망도 아쉬움도 표현하지 못한 채.
들어 온 물품을 정리하면서도 내내 황민현에게서 온 문자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오늘 8시에 성우 복학 기념. 너 와야 돼. 알았지? 안 오면 너 일하는 편의점 앞으로 데리러 갈 거니까 알아서 해. -황민현 」
문장 하나에 찍어진 마침표까지 황민현의 의지가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갈 생각은 없다. 어떻게 막아놓은 강둑인데, 더 이상 옹성우가 흘러 나올 공간도 없게끔 메꾸느라 2년을 고생했는데, 그 노력을 한 순간에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나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 잘난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울던 밤이 며칠이고, 수없이 보내려다 보내지 못한 편지만 수십장이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옹성우 사진 한 장 지우는 데도 손이 벌벌 떨렸는데. 옹성우를 실제로 마주한다면 나는 그렇게 모든 걸 쓰러트릴 거란 걸 알았다. 약하게 나마 쌓아올렸던 결심도, 네 앞에서 꼿꼿했던 내 자존심마저.
곧 교대할 시간이 되고 나는 코트를 걸치고 편의점을 나섰다. 다행히도 다음 파트 아이가 일찍 와 준 덕분에 서둘러 도망치듯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황민현은 한다면 하는 애였기에 연락이 안 되는 날 편의점 앞에서 만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편의점까지 오는 루트를 빙 돌아 걸었다. 걸어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정류장에서 황민현에게 붙잡혀 그 술자리에 가느니 시간을 허비하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옹성우는 변했을라나. 2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처음 알 수 없는 번호로 연락이 왔을 때, 옹성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받아버린 날이 있었다. 보이스피싱일지도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야, 김여우! 하고 들리던 반가운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나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바로 끊어버렸다. 그 후로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그 후로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 하는 울음과 함께 보고싶었다고 말해버릴 뻔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옹성우와 내가 함께한 순간들이 가득했다. 같이 다녔던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최신영화가 나오면 같이 보러가던 영화관, 후식을 좋아하는 나 때문에 항상 들리던 카페, 취향이 잘 맞아 매번 같이 갔던 서점까지. 코끝이 시린 건, 그 추억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기억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나는 왜 옹성우를 좋아하게 된걸까. 차라리 그 옆에 항상 있던 황민현이나 대형견처럼 없는 꼬리를 다 흔들어가며 따라다니던 강다니엘이나 툴툴 거리면서도 가장 잘 챙겨주던 김재환도 있었는데. 그 네 명의 무리 중에서도 하필 옹성우일까.
옹성우는 학생일 때부터 모든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그랬다. 길가다 넘어지는 아이가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가서 무릎을 털어주었고, 교과서를 두고 온 것 같아 곤란해 하는 애가 있으면 얼굴을 모르는 사이어도 선뜻 빌려주곤 했다. 그건 남녀 상관없는 행동이었고, 그 덕에 옹성우는 인기가 많았다. 나도 그래서 좋아했던 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 온 그 겨울날 핫팩이 아닌 옹성우의 손이 나에게 닿았다는 걸 늦게 눈치챘던 순간에.
옹성우를 처음 본 건 중학교 입학식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투닥거리며 놀다가 남자애가 장난을 치며 민 덕에 운동장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다. 혼자 넘어졌으면 모를까, 하필 줄을 서 있던 아이에게 넘어져버렸다. 그 아이는 자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충분히 놀랐을텐데도 나를 일으켜 주며 괜찮냐고 무릎을 털어주었다. 나를 밀었던 남자아이에게도 여자애한테는 살살하라는 충고까지 남겼다. 그때 명찰을 봤을 때, 세상에 '옹'씨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것 때문인지 이름을 기억했다. 옹성우. 옹성우. 계속해서 이름을 되뇌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옹성우는 이유 없이 나와 친해졌다. 옹성우와의 첫만남은 기억했지만 어떻게 친해졌는지까지는 기억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옹성우는 내게 이성이 아닌 그저 친구였다. 나를 남자애처럼 취급하는 다른 남자 친구들보다는 좀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친구. 무리를 지어서 자기들끼리만 다니는 것에 익숙한 여자 친구들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털털하게 대해주는 친구. 그래서 3년 내내 옆에 있던 친구는 옹성우 뿐이었던 것 같다. 그 날이 오기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옹성우와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돼서 외롭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옹성우 때문에 짝사랑만 7년을 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날 아침에 유독 눈이 많이 왔다. 나는 애답지 않게 어릴 때부터 눈을 싫어했다. 눈이나 비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다 싫어했다. 구름이 적당히 있고 햇살이 있지 않은 날씨에는 항상 기분이 처졌다. 안그래도 일어나기 힘든 아침이 두 배는 더 힘든 기분이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피로 젖은 속옷을 마주할 때의 절망감이란. 생리대를 찬 순간부터 시작된 생리통이 가시질 않아 최대한 느릿느릿 준비를 하는데, 옹성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여우, 빨리 나와. 이러다 지각한다! 알았어ㅡ. 잠긴 목소리를 애써 쥐어짜며 가방을 들었고 문을 열었을 때 끼치는 눈 냄새가 참으로 싫었다.
그렇게 저기압인 아침이었다. 아침마다 조잘거리던 내가 유독 조용한 게 이상했는지 옹성우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내 대답을 유도했다. 나는 단답을 하며 배가 아파 눈길을 조심히 걸었고, 조금 아슬아슬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옹성우는 천천히 내 걸음을 맞춰서 걸어주었다. 그때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옹성우는 내가 눈을 싫어하는 것도, 조용한 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나는 말없이 엎드려 있었고, 옹성우는 그런 내 옆에 있어주는 걸로.
문제는 집에 갈 때였다. 복통이 심해서 등교보다 더 천천히 걷고 있었고 다리 사이로 뭐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옹성우는 갑자기 내 앞에 멈춰서더니 가방을 내게 건냈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굴을 들여다봤지만 표정을 도통 알 수가 없어 말없이 받아 들었다. 옹성우는 그대로 그 추운 겨울에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도 입던 패딩을 벗어 내 허리에 둘러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고 옹성우는 내 얼굴을 보는 대신에 내 가방을 가져갔다.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닥이 눈 때문에 얼어 미끄럽던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굴이며 귀며 붉어져서 터질 것 같은 와중 바닥이 미끄러워 중심을 잃은 찰나에 옹성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서야 옹성우의 얼굴을 마주한 것 같다.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옹성우의 귀가 터질 것처럼 붉은 게 보여서. 나는 한동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겨우 제대로 선 나에게 옹성우는 손을 내밀었다.
ㅡ 나.. 너무 추운데, 손 좀 잡아줘.
옹성우는 새빨간 귀를 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멍하니 그 손을 잡았다.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꽁꽁 얼어버린 큰 손을 잡았을 때 그게 왜 이리도 뜨겁게 느껴졌는지, 순간 핫팩을 잡은 게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그게 나의 온도인지, 옹성우의 온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던 게 이유였다. 나의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집 앞까지 걸어오니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황민현에게서 온 전화들은 모조리 거절을 하고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은 상태였다. 주변이 온통 어둠이고 가로등 불에 의지한 채로 걸었을 때 보이는 실루엣에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그날처럼 춥고 바닥에 눈이 가득 쌓인 날이다. 옹성우는 그때보다 훨씬 큰 키와 넓은 등을 가지고 가로등 옆에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드는 얼굴이 추위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때의 어린 옹성우가 스쳐지나갔다.
ㅡ ... 오랜만이네.
그 목소리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BY. 메타메타몽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