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늦은 시간, 나를 보러 온 너에게
뭐라 말 한마디 제대로 남길 수 있을까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지금도
난 너를,
좋아해 02
옹성우가 나를 당겼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아주 가끔씩, 내가 지쳐 나갈 때 즈음에 옹성우는 나를 제대로 한 번씩 당겨줬던 것 같다. 계획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나왔던 행동이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 당김 한 번에 옹성우의 코끝까지 끌어당겨졌다. 그런데 내가, 너를 놓을 수 있었을까.
수능이 끝난 날,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울었다. 고3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옹성우 옆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과 내가 원하던 목표 성적 사이에서 휘둘릴만큼 휘둘렸던 것들이 터졌던 거였다. 3년을 꾸욱 참아왔던 것들이 수능이 끝났다는 허탈함과 함께 와르르 쏟아졌던 것 같다. 한참을 울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흉하게 보든 이상하게 보든 엉엉 울어대며 옹성우를 쏟아냈다. 고등학교 3년 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던 옹성우가 이렇게도 많이 차올라있다는 걸, 그 때 울면서 깨달았던 것 같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고 집 앞 놀이터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참으로도 익숙한 실루엣이 멀뚱히 서서 이리저리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옹성우일까, 내가 많이 울어서 헛것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오늘은 수능이 끝난 날이었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나는 터덜터덜 놀이터로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실루엣이 뒤를 돌았다.
"OOO!!!!!"
빈 놀이터에 옹성우의 목소리만 울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다가가던 발걸음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옹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옹성우의 앞머리가 땀에 젖어 덕지덕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은 무슨 일인지 액정이 산산조각 나 있었고, 외투는 어디에다가 버렸는지 얇은 맨투맨 하나가 다였다. 그것도 진한색으로 젖은 채로. 옹성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게 불안한 눈동자였는지 아니면 화가 난 눈동자였는지 잘 구분이 안 됐다. 옹성우는 큰 다리를 성큼성큼 걸어서 나를 끌어당겼다. 가로등 빛 아래로 다가가자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살펴보며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ㅁ.. 뭐, 뭐하는거야..!"
"다친 데는 없는거야? 뭐 나쁜 새끼들한테 걸리거나 그런 건 아니고!?"
옹성우의 다급함에 말을 잇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제서야 옹성우의 흠뻑 젖은 얼굴이,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손길이 이해가 갔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연락도 안 되고 어디에 있었어!! 옹성우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내 어깨를 붙잡고 화를 냈다. 나는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옹성우가 무서운 것도,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옹성우는 곧 울 것 같은 내 모습을 봤는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내 어깨를 붙잡던 손을 내리고 뒤를 돌아 한참을 서 있었다. 옹성우의 머리 위로 하얀 입김이 피어 올랐다. 성우야, 너 나를 찾아 다녔어? 그래서 그렇게 땀에 젖은 거야? 나 하나를 위해서? 턱 끝으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옹성우는 한참 뒤에서야 풀어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얼굴이었다.
"...... 걱정했잖아..."
전화도 안 받고, 계속 하는 데 전화기 꺼지고, 시간은 늦어지고, 집에는 없다 하고.. 널 아는 여자애들한테 다 연락해봤어. 같이 시험 본 애는 너 혼자 집 갔다 그러고, 다른 애들은 모른다 그러고... 근데 왜 울었어...? 진짜 무슨 일 있었어..? 나 좀 봐봐, OOO... 화 내서 미안해.....
옹성우는 몸에 힘이 빠지는 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내 손을 잡았다. 눈물 범벅인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눈물을 계속 닦아줬다. 바들바들거리는 옹성우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너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 이젠 네가 좋아서 우는 건지, 네 행동에 좌절할 내가 아파서 우는 건지도 모르겠어. 성우야, 옹성우.
* * *
옹성우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내가 무슨 우유를 좋아하고 안 마시는지, 견과류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있다던지, 하루 동안 어떤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지, 어떤 남자애와 접촉이 있었는지까지. 그렇게도 모든 걸 아는 애가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알지만, 이 거리를 두는 게 옹성우가 내게 주는 관계의 유지성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랬기에 나는 옹성우를 좋아한 7년을 아팠고 지금 이 2년만에 만난 이 순간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너와 이 유지하고 있는 이 거리를 감당할 수가 없어, 옹성우.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옹성우에게 한 마디 말 건낼 수가 없었다. 바라봐주는 눈빛이 다정해서,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눈빛인데 나에게 흘러오는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나는 또 한없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나는 가로등 빛을 받고 있는 자리에서 두 걸음 물러섰다. 옹성우가 서 있는 자리에는 내가 남긴 발자국만 남았다. 이것보다 멀어서도 안 되고 가까워서도 안 되는 거잖아. 네가 세운 그 성벽이 이 거리가 아닐까. 나는 물끄러미 눈 쌓인 바닥만 바라보았다. 2년 간 투박하게 지었던 강둑이 부서지고 있다. 느껴진다. 옹성우가 나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발개진 볼을 하고 나타나 있던 순간부터 내 강둑에 다시 옹성우라는 강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메마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다시는 흐르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건데.
ㅡ ... OOO.
ㅡ ... 잘 갔다 왔어?
옹성우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입을 열었기 때문인지 할 말이 끊긴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막고 싶었다. 네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물으면? 내 스스로 너와 이 애매한 사이를 끝내고 싶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왜 오늘 술자리에 가지 않았냐고? 너를 보면, 다 무너져 내릴까봐. 보고싶었던 마음의 크기가 너무 커서 너를 본 순간에 터져버릴까봐 그게 무서웠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이후로도 정적이 찾아왔다. 옹성우와 함께했던 6년의 시간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할 말이 딱히 없어도 옹성우는 항상 내 대답을 원하는 영양가 없는 질문들을 많이 하곤 했다. 너는 왜 눈이 싫어? 그냥. 비나 눈이나 떨어지는 건 다 싫어. 어울리지 않네. 내가 비랑 눈에 다 젖어서 무너질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왜 무너져. 옆에 내가 있는데. 네가 짧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작은 눈이 하나 둘씩 내렸다. 갈색 코트 위로 떨어지는 눈이 원망스러웠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힘들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옹성우는 커다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눈이 올 걸 미리 알았던 건지, 더 이상 내 코트 어깨자락 위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소한 것 까지 하나 기억해주는 너는 너무나 다정하다.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만큼.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보이는 네 얼굴이 반가웠고, 2년 간 맡지 못했던 너의 체취가 가까웠고,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내 말을 기다린다는 듯한 너의 다정한 눈길이 나에게 닿았고. 검은색 우산이 하얀 눈밭 위로 떨어져 굴렀다. 옹성우의 옷자락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 입술에 닿은 이 감촉이 정녕 꿈이 아니기를.
나를 끌어안는 이 손길이 분명 옹성우이기를.
BY. 메타메타몽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