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없는 나를 너는 항상 마주하려고 한다
나에게 미련만 남겨주고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너는 항상 나와 마주치기를 원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 했다
너와 입을 맞춰버린 그 순간마저도 네가 나에게 던질 성벽이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었으니까
근데 이제는 어쩌면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나약하고도 겁쟁이인 내가..
너를,
좋아해 03
매일 밤을 술에 찌들어 살고, 새벽까지 작업이나 과제에 몰두해 몸을 피곤하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잠에 들 수 없는 나날이 많았다. 그런 나를 말렸던 것도 황민현이고 걱정해주던 것도 김재환이었는데, 나는 매번 옹성우를 찾았던 것 같다. 옹성우의 생일이나 우리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던 날이면 일부러 수면제를 찾아 먹곤 했다. 그렇게 억지로 잠들지 않으면 너를 찾게 될까봐, 지금보다 더 미련해질까봐. 옹성우는 그만큼 내게 열병이며, 고통이며, 그 끝에서 닿는 기쁨이었다. 그런 멍청한 나를 스스로가 잘 아니까 더 옹성우를 밀어내는 연습을 해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난 무서웠던 거야. 네가 여지를 주어도 발걸음 하나 내딛지 못하고, 기회를 주어도 그보다 먼저 네가 내칠 게 두려워 두 발자국 더 물러서고. 지금 이 순간도 옹성우를 원망했지만 결국엔 내가 겁쟁이었고 비겁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너를 마주할 용기조차 선뜻 못 내는 바보니까.
어느새 눈물이 고여있었는지 흘러 귀를 타고 고였다. 귀가 먹먹한 게 느껴지자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지난 밤 가로등 아래서 붙잡은 손이 지금까지도 떨리는듯 했다. 옹성우는 놀랍게도 무작정 달려들은 나를 받아들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에서인지 옹성우는 나를 끌어안았다. 등 뒤로 감아오는 손길이 느껴졌을 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수년간 옹성우가 내게 던질까 겁냈던 성벽을 마주할 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를 끌어안는 네가, 나와 같은 마음에서인지 아니면 성벽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옹성우에게서 떨어졌다. 방금까지 탈 것 처럼 뜨거웠던 감촉이, 강하게 끌어 안아오던 그 힘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옹성우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정적과 뿌연 입김만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눈발이 좀 더 굵어지고 있었다. 우산은 옹성우의 발치 옆에서 굴러다녔다. 이 상황을, 이 순간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생각해야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건지에 대한 생각과 그렇게도 바랬던 옹성우의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하고, 뜨거웠던 것밖에는.. 도저히 어떠한 생각을 밀어넣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처럼 옹성우를 지나쳤다. 옹성우가 붙잡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제발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사라지면, 그 때 너도 가기를. 이 순간이 거짓말이기를. 제발... 너와 내 사이가 더 멀어지지 않기를..
이뤄질 수 없는 기도를, 난생 처음 울면서 했던 것 같다.
* * * *
ㅡ 야, OOO!
ㅡ ㅇ.. 어, 어..?
황민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불렀다. 마주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황민현이 듣는 교양이 미대 옆 건물이라는 걸, 그 교양이 오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분명 어제 참석하지 않은 술자리에 대한 말로 나를 추궁할 게 뻔했다. 그 자리에 옹성우가 있었던 건지 없었던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 늦은 밤 옹성우를 우리 집 가로등 앞에서 만났던 건 잊혀지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황민현은 작업실에서 물감을 섞고 있는 나를 잡아 끌었다. 손이 온통 물감 투성이라 화장실에서 손을 씻겠다는 말에도 꿋꿋이 나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도 작업복 벗을 시간은 줘라, 좀. 내가 포기한 듯이 투덜대자 그제서야 내 팔을 놓아줬다. 잔뜩 굳어진 얼굴이 한 잔소리 심각하게 할 것 같았다.
ㅡ 어제 알바 안 했어?
ㅡ 했어. 근데.. 너 온다고 해서 좀 일찍 끝냈지...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 황민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하고 웃었다. 간만에 짓는 웃음에 얼굴 근육이 낯설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작업할 때는 그 누구와도 말을 잘 섞지 않으니까, 더더욱 입을 열 일도 웃을 일도 없었다. 새삼스레 이렇게 찾아와서 잔소리를 하는 황민현이 고맙게 느껴졌다. 황민현은 그 이후로도 잔소리를 계속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짝 찢어진 눈과 오물조물 말하는 입이 지겹기도 하면서도 반가워서 나는 작게 웃었던 것 같다.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아, 좀. 너 핸드폰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도대체! 우리가 어제 얼마나 전화를 했는 줄 알아? 너 잠수 타면 밥도 안 먹고 술 들이붓는 거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잖아. 재환이가 발 동동 구르고 너 어디 쓰러져 있는거 아니냐고 완전 울상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민현아. 푸하하, 하고 웃는 내 모습에 황민현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았으니까 이제 잔소리 그만 해도 돼. 어제 배터리 없어서 작업실에 충전 해놨어. 들어가서 확인해볼게.
낯선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눈치챘을 때는 황민현의 묘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울상이기도 한, 바보 같은 표정. 나는 아차 싶은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황민현은 그 큰 눈으로 바라본다. 또 그런 눈빛이다. 다 안다는 듯, 괜찮다는 듯이. 네가 뭘 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건데, 바보야.
ㅡ .... OOO.
ㅡ .. 왜
ㅡ 너 되게 오랜만에 웃는 거 알아? 몇 년간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본다.
성우 군대가고 그러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역시 옹성우야? 나는 아까의 민현이처럼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역시 옹성우냐고? 대답을 원한건지 아니면 흘러 넘기는 말인지 황민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미대 건물을 빠져나갔다. 성우가 와야, 네가 웃네. 나는 한참을 거기에 서 있던 것 같다. 황민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둥둥 떠다녔다.
어젯 밤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작업에 몰두하고, 과제를 제출하고, 옹성우가 군대 간 뒤로 피었던 담배마저 끊어버리고. 씁슬한 입 안에 매캐한 냄새가 닿으면, 그 뿌연 연기 끝에서 옹성우가 보일 것 같아서 꽉 차 있던 담배갑도 휴지통에 구겨 버렸다. 그런데도 순간 순간, 허공의 부유하는 먼지가 살에 닿는 그 짧은 찰나 마저도 머릿속은 옹성우로 가득했다. 내 그림에 색을 채우는 것도, 그게 너여서이기 때문인가. 손끝에 닿는 축축하고 차가운 물감액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도, 어젯밤 일어났던 그 일이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기분이어서, 그래서 다 좋아보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잠시 멈췄다.
생각도 요동치는 마음도 웃음도 울음도.
캠퍼스 끝에,
네가 보였다.
BY. 메타메타몽몽
이번 편이 유독 짧게 느껴지네요 독자님들도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음편 분량 조절을 잘 못할 것 같아 이번 편만 짧습니다
댓글과 추천 감사드립니다
생각지도 못 했는데 제게 힘이 되고 소재가 되고 기쁨이 되네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을 하던걸 확인 제대로못 하고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