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성우의 겨울
안개가 짙은 날이면, 네가 생각났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날에도 네 생각은 항상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핑계삼아 말한다면 안개 짙은 날은 더욱 그랬다. 구름이 적당히 있어야 하고, 해가 꼭 떠야하고, 눈이나 비가 와서는 안 되는 날씨여야 기분이 좋다는 네 말에 실소를 터트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안개가 짙어 시야가 앞이 뿌연 날에는 네 얼굴이 더 아른거렸다. 내가 너를 더 이상 친구가 아닌 그 이상으로 보게 된 날이, 그런 안개 짙은 날이라고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그 전에 친구 이상이라는 말로 먼저 도망갈지도 모르겠다. 너는 항상 내가 다가간 만큼 멀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다가가지도 멀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만 서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 때가 중학교 3학년이 되기도 전이었을까. 너와 자전거를 타러 간 날이었다. 유독 안개가 짙어 한강 주변이 흐릿하고 칙칙한 분위기였다. 날씨가 이러하니 집에만 있고 싶다는 너를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가뜩이나 체력이 안 좋아서 이리저리 픽픽 대는게 안쓰러운 마음에서였다. 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터벅터벅 걸으며 자전거를 끌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혼자 웃었던 걸, 나도 모르게 붉어진 귀를 만지작거렸던 걸, 넌 모르겠지.
옹성우, 나 너무 귀찮아...
목소리를 늘어트리며 칭얼거리는 너를 자전거에 겨우 태웠다. 막상 타면 좋다고 쌩쌩거리며 달릴 거면서도, 한 번 안장에 올라타는 게 어려워 투덜거리는 모습에 혀를 찼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내 모습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얼굴을 꾸깃, 하고는 패달을 밟기 시작했다.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웃겨서 네가 나보다 먼저 앞서 달려간 후에야 하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웃음 끝에 닿는 안개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져 나도 찬 바람을 느끼며 같이 달렸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저 친구로써 향하는 마음일거라 생각했는데.
앞서 달리던 네가 갑자기 사라졌다. 주머니가 무겁다며 핸드폰을 들어달라는 말에, 너의 핸드폰은 내 외투 주머니에 있었다. 나는 순간 초조해졌다. 하필이면 공사 중이라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자전거 도로에서 너를 잃어버리게 된 거였다. 공사하는 도로를 지날 때 보이는 비탈길을 조심하라는 표지판에 불안감이 휩싸였다. 이 앞이 비탈길인데 너는 조심히 지난간 걸까? 아니면 나를 기다리고 서 있을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패달을 밟은 속도를 늘렸다. 허리를 세우고 목을 길게 빼며 주위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네가 어딘가 멈춰 서서 나를 기다리기를. 아니면 다시 뒤를 돌아 나에게로 달려 오기를. 하지만 몇 십분이 지나도 너는 나타날 기색이 안 보였다. 목 뒤로 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한기가 돋는 것 같았다. 너를 잃어버렸구나, 하는 마음에 손끝이 떨렸다. 네가 애도 아니고 열 다섯이나 먹은 사람인데, 제대로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고 길을 모르면 물어물어 오면 되는 건데, 그런데 나는 왜 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지금 미쳐버릴 것 같은건지.
어디에 굴러서 다쳐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미칠 무렵 내 키보다 큰 갈대들이 주위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ㅡ .. 어, 옹성우!!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 이름에, 그 목소리가 익숙한 너라는 걸 깨닫자마자 자전거를 멈추었다. 뒤에서 쌩쌩 달리던 아저씨가 지나가며 뭐라뭐라 신경질을 내는 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자전거를 끌었다.
ㅡ ... 옹성우우.... 여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갈대 숲으로 들어가자 나뒹굴고 있는 자전거와 꺽여진 갈대들, 그 사이에서 주저앉아 있는 네가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네 앞으로 뛰어갔다. 무릎에는 상처가 났는지 피가 계속 나고 있었고 발목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혼자 이 고립된 곳에서 무서워 떨고 있었을 네가 너무 안쓰러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전거를 바로 세웠다. 병원부터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너를 일으키려는데, 갑작스러운 따뜻함에 나는 온 몸이 굳었다.
두 팔이 옆구리 사이로 들어오고, 네 짙은 향기가 목 근처로 다가왔을 때, 그 숨결이 틈없이 가까워진 순간에.
너는 나를 보며 안심이 된 듯, 엉엉 울었다. 평소 같으면 우는 너를 토닥이며 또 우는 울보라고 놀렸겠지만 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멈춰버렸다. 바들바들 떠는 몸을 쓰다듬어주지도 못한 채 허공에 손을 들고 굳어 있었다. 너와 나의 심장이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안도감과 울컥함에 뛰는 네 심장이 느껴졌다.
근데, 지금 불안정하게 뛰는 내 심장은 뭘까.
안개 낀 갈대 밭에서의 첫 떨림이었다.
* * * *
나를 모르는 건 너였다.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것 투성이었다. 네가 하루 중 언제 제일 졸려 하는지, 뭘 먹고 배가 아파오는 건지, 네 기분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 오늘 네가 나를 향해 웃어준 게 몇 번째인지 셀 수 있을만큼 나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만큼 내가 너를 향해 있다는 걸, 너는 몰랐고 지금도 모르는 것 같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성인이 되고 그리고 군대. 이 기나긴 시간동안 네 옆에 내가 있는 이유를 알아주길. 다른 곳을 바라볼만한데도, 오로지 너를 향한 내 시선을 눈치채주길. 네가 조금 더 다가와주는 걸 바란다면 너무 큰 바램일까. 너는 언제든 항상 내게서 물러나기만 했다. 그 한 걸음에서 손만 뻗어주면 되는데, 너는 그 손을 뻗기를 항상 주저했다. 그래서 더욱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아니까,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온도가 너를 향한 나와 같다는 걸 아니까.
네가 미술을 하는 걸 나는 좋아했다. 너는 붓이 종이에 닿는 느낌이 좋아서, 완성된 그림의 색감을 보는 게 기뻐서 미술이 좋다고 했다. 그림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짓는 미소는 내가 본 너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건 아마 내가 너를 그렇게 웃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그때마다 저릿한 마음은 익숙해져서 결국 무뎌져 코 앞의 너를 제대로 바라 볼 수 없게 만든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 네가 나를 그려준 적이 있었다. 교정에 핀 꽃들이 그렇게도 좋은지 아침부터 해맑은 미소가 가득했던 날이었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 따뜻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맑은 그 날씨에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나를 스케치 해주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너로부터 시작된 시선이 내 코와 입술, 눈과 귀를 지나갔다. 따뜻해. 네 눈동자가 닿는 곳 하나 하나가 꽃잎이 내려 앉은 듯 잔잔하고 설레고.. 심장이 뛰었다. 그 때만큼은 너와 나 둘 다 서로를 바라보고 싶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 순간 네 눈은 나를 향해 사랑을 내비쳤던 것 같았는데. 언젠가 때가 된다면, 네가 그려준 그 그림이 항상 내 지갑 속에 너의 증명사진과 함께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내게 넌 잊을 수 없는 짙은 꽃향기와도 같은 존재다.
군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한시라도 빨리 갔다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네 곁에 머무를 수 있겠지 싶어서. 하지만 대학 1년, 그 순간만큼은 너와 함께이고 싶어 조금 뒤로 미룬 것뿐이었다. 대학교에 적응하면서 너에게 불쾌하게 구는 이는 없는지부터 나라는 사람에게 네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각인 시키고, 내가 없는 동안 안심하고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는지까지. 그렇게 주위를 황민현과 강다니엘, 김재환으로 채웠고 그들에게서 신뢰를 받을 때까지도 무던히 애를 썼다. 나는 나름대로 바쁘게 너를 중심으로 1년을 보냈다. 어차피 군대는 나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너도 그걸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는 줄 알았다. 군대 가기 전날까지 너에게 말하기 어려웠던 것도 그 이유였다. 만약 눈치를 챘다면 먼저 말해주면 좋을텐데. 그러면 난 홀가분하게 갈 수 있었을텐데. 나는 너에게 그것마저 바라고 있었다.
사람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그 놀이터에서 엉엉 우는 네 모습에, 그제서야 내가 정말 이기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에게 묻지도 않고 내 생각이 맞을 거라 다짐했구나. 생각보다 담담하게 보내줄 지도 몰라, 하고 생각한 건 정말 착각이었구나. 네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러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구나. 여태까지 너는 나에게 다가와 달라고, 나를 잡아 당겨달라고 말없이 외치고 있었던 건데.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네 눈물에 나도 울고 싶었지만,
기쁨이 컸다면 난 정말 나쁜 놈인걸까.
* * *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술자리에 나간 건 오로지 너를 보기 위한 이유였다. 그 2년 동안 내게 단 한 번이라도 연락을 해준 적이 없는 네가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조마조마한 심장을 부여잡고 너를 기다렸는지. 네가 오지 않으면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를 보냈다는 황민현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안 올 것 같아. 황민현은 설마, 너 온다고 했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안 올 거야... 아마. 일이 끝난다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황민현은 정말로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정확히 네 마음을 모르겠지만,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밤톨 같이 깎은 머리를 보여줬을 때, 예상치 못하게 터트렸던 너의 눈물. 초조한 마음으로 걸었던 전화에,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끊기던 전화. 그리고 여전히 소리샘으로 이어지던 수많은 통화들. 그리고 편지마저 반송되어 왔을 때, 네가 이제 나를 밀어내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선 안 되는데. 나는 이제.. 시작도 안 했는데. 내가 그런 너를 두고 군생활을 제대로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마 기적이 아니었을까.
어딜 가냐며 붙잡는 애들을 두고 옷을 챙겨 나왔다. 밖은 어느 새 어둠이 내려 앉았고, 옅게 쌓인 눈 덕에 바닥이 찰박거렸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보이는 가게에 무작정 들어가서 가장 커다란 우산을 샀다. 네가 내 곁에 서 있는 동안은 절대로 눈을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눈에 젖어 무너질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 겨울 어린 날의 네 모습이 떠올랐다. 눈보다 새하얀 얼굴을 하고, 눈보다 맑은 웃음을 짓던 열여섯의 너. 뿌옇게 입김이 차오르고 있었다.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2년 만에 만난 얼굴은 그대로 예뻤다. 달라진 건 없었다. 새하얀 얼굴도, 여전히 길게 내려오는 긴 머리도, 내가 바들바들 떨며 닦아주던 그 눈가마저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귀가 서서히 아득해진다.
너는 나를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를 가장 잘 알지만 마주하는 얼굴이 말하려는 의도를 찾기가 힘들다. 너는 숨기는 것에 능하다. 지금 이 순간에마저도 자꾸 감추고 숨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너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네가 오히려 더 도망칠 것 같았다. 춥고 따뜻했던 겨울의 너는, 내 손을 잡아 주었었는데. 발갛게 달아오른 내가 안쓰러워서 인지, 그게 네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맞닿은 손바닥에 밤잠을 설쳤던 그 어린시절의 내가 지금도 여기 서 있는데.
ㅡ ... 오랜만이네.
힘겹게 내뱉은 내 말에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다. 당장에라도 다가가 그 눈가에 입 맞추고 싶었다.
이제야 네게 다가가게 되어서 미안해.
너와 함께한 수 많은 겨울 동안 단 한 번도 너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을만큼,
너를,
좋아해
04.
BY. 메타메타몽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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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추천도, 조회수도 올라갈 때마다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어요
재밌게 읽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