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를 보는 이 눈빛이, 손길이, 말투가 모두 나를 좋아해서 라면 하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네 곁에 머무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내가,
너의 사랑이 될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짧은 순간 마저 나는 너를,
좋아해 05
겨울이 좋았다. 너를 좋아한 그 날도 뽀얗게 입김이 차오르던 어느 겨울의 오후였고, 너를 만난 날도 설렘과 추위가 가득한 3월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그 겨울날 밤, 집 앞 놀이터에서 나를 마주한 이후로 나는 눈 오는 밤이 제일 싫어졌다. 그 때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매 순간순간 어깨자락에 쌓여 나를 짓눌렀다. 네 품에서 눈물이라는 눈물은 다 흘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날씨면 술에 취해 있어야 그나마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래서 겨울은 힘들었다. 네가 없던 그 2년의 시간이 내게는 항상 고통이었단 걸, 지금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는 알까. 해도 뜨지 않고 먹구름 가득한 그런 날씨가 너무나도 추웠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간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차다는 걸, 성우야.
네가 알까.
ㅡ .. OOO.
황민현이 미대 밖으로 사라지고 멍하니 서 있는 내 앞으로 옹성우가 다가왔다. 황민현이 알린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나를 찾아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캠퍼스 끝자락에서 그 얼굴이 나타나는 걸 봤을 땐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하지만 옹성우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언덕을 올라오는데도 마주친 눈을 피할 생각도 못 했다. 그 눈빛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2년 전에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빛이었다. 진한 푸른색의 물감이 의도치 않게 떨어져 종이에 번져 나가듯, 그렇게 천천히, 진하게 나를 옭아맨다. 속이 울렁거렸다.
옹성우는 당장이라도 무슨 말을 내뱉을 것 같이 와 놓고선, 내 이름을 한 번 부르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도, 내가 한층 위로 올려다 보는 얼굴은 여전히 고요하고 그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이마 위로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허다했는데도, 살갗으로 닿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마치... 마치.....
나를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진한 청색의 물결이, 모래를 적시듯이.
ㅡ OOO.
ㅡ ...
ㅡ 대답해. 도망칠 생각 하지말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젯 밤 빠르게 그를 지나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거다. 옹성우는 어젯밤 일을 들춰서 나와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였다. 도망가지 말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너에게서 도망가지 말라는 건지, 자기가 이제부터 할 얘기에서 도망가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작은 확신이 드는 것은 옹성우가 지금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황민현에게 붙잡혀 나온 터라 두 손은 여전히 물감으로 엉망이고, 작업복은 두 팔에 걸려 있다. 어젯밤 잠을 설쳐 눈가가 여전히 따끔거리고 이런 꼴로 옹성우를 담담하게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옹성우의 표정이 굳었다. 아랫 입술을 깨무는 네 행동이 당황스러워서 한 발자국 더 물러섰다. 화가 난건지, 그 무거운 기운에 휩싸인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왜 그래, 옹성우..
ㅡ 너 나한테 할 얘기 없어?
옹성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는데, 옹성우가 시선을 맞추며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는다.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게 꽉 쥐는 느낌에, 무너질 리가 없다고 자부하던 나의 강둑이 결국 부서지고 만다. 옹성우의 거센 물결이 마음 속으로 쏟아져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잡은 힘 때문에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이 관계를 무너트린 나를 책망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이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마주하는 걸까. 안 되는데. 이렇게 네가 넘쳐 흐르는데, 너를 놓을 수가 없는데. 손끝의 혈관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어젯 밤에 너의 입술을 찾은 건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너를 못 보는 건 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경우도 예상하지 못하고 너무 충동적이었다. 꿈에서만 그렸던 그 찰나가 너무 반가워서, 그렇게 갔던 네가 아직도 원망스러운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도는 열기가 터질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랬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다.
나는 다급하게 옹성우의 팔을 붙잡았다. 네 입에서 나올 가시들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ㅡ 미, 미안해, 옹성우. 미안해.. 어젠.. 내가 너무... 그니까...
버벅거리는 말의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까. 그저 실수였다고, 내가 그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해야만 하는걸까.
근데 싫어. 옹성우, 나는 그걸 실수로 정리해버리고 싶지 않아. 근데 너를 잃고 싶지도 않아.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옹성우의 동공이 떨리는 게 보였다.
ㅡ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왜 네가 나한테 미안해 하는데..!
ㅡ ...
옹성우의 목소리가 불안정하다. 눈물이 터졌다. 어젯밤 울었던 탓인지 눈가가 따끔거렸다.
ㅡ 나한테 키스한 게 미안하다는 거야? 아니면 도망쳐서 미안하다는 거야?
ㅡ .. 오, 옹성우..
ㅡ ....
ㅡ 그, 그니까.. 있잖아 성우야...
갑작스레 옹성우의 스킨향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게 옹성우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울지마.. 제발..
목덜미에 닿는 옹성우의 숨결에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너 이렇게 또 나한테 다정하게 굴지.. 내가 정말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너만 보게, 이렇게 따뜻하게.
그 날은 그저, 나를 안은 품이 좋아서, 그래서.
너를 잡은 손을 죽어라 놓지 않았던 것 같다.
* * * *
조금 우습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2년 전의 그저 그런 사이로 다시 돌아갔다. 그 때 옹성우의 왜 미안하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을 여전히 못했지만, 옹성우는 더이상 따로 물어본다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옹성우에게서 느끼는 건, 그저.. 더 이상 성벽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그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확신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옹성우는 다시 자기와 내가 같이 다닌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캠퍼스에서 편의점 가는 길이 같아 자주 황민현을 만나면, 옹성우는 그 옆에서 항상 황민현과 나의 대화를 방해했다. 둘이 너무 친해진 것 같아 자기가 소외되는 기분이라는 이유였다. 어차피 만나면 나와 이야기하기 바쁘면서도 그 억지스러운 이유에 그저 웃음뿐이었다. 게다가 복학하면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을 줄 알았다는 둥, 자기 옆에는 내가 있어야 완벽하다는 둥, 옹성우에게 어울리지 않는 투정을 부리면서 내 손을 붙잡고 다녔다. 덕분에 미대 캠퍼스에는 나와 옹성우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조잘대기 좋아하는 후배들이 작업실에 항상 있고, 틈만 나면 작업실이나 과방 앞으로 와서 나를 자꾸 어디론가 데려가는데다가,
ㅡ 언니! '그' 분 또 오셨어요!
ㅡ 어떡해! 어떡해!
.... 옹성우가 워낙 잘생겨야지.
나는 스케치를 하던 연필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작업량을 맞춰 놔야 다음 과제 때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눈치 없는 옹성우는 자꾸 나를 찾아온다. 물론 그 잘난 얼굴이 나를 볼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지긴 하는데.. 여자 후배들은 옹성우와 내가 썸을 탄다는드니, 곧 사귈 것 같다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너희 말대로라면 얼마 좋을까.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혼자 앓고만 있는데.
미안. 오늘 먼저 가볼게. 나는 입고 있던 작업복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누나, 오늘도 일찍 가는 거에요? 옆 자리에 앉아서 내 스케치를 자주 보곤 하던 지훈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미안. 친구가 와서.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제야 씨익 웃는 지훈이었다. 후배들은 자기네들이 더 얼굴이 붉어져서는 빨리 가라고 손짓까지 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게 기분이 또 좋아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작업실 네모난 작은 유리로 옹성우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후배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후다닥 빠져나왔다.
ㅡ 아직 점심 안 먹었지?
ㅡ 으, 응.. 아직 안 먹었어..
옹성우는 여전히 환하게 웃었다. 자꾸만 내 옆에 바짝 붙어서 나를 끌어당기고, 고개를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아아.. 너 자꾸 그렇게 웃지 말란 말이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후. 작게 숨도 내쉬었다. 2년 전의 너보다 지금의 너는 더 남자의 향이 짙었다. 그러면, 내가 미칠 것 같다고. 시원한 스킨향이 자꾸만 목덜미에 끼쳐오면,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혈관이 요동치듯, 그 향이 자꾸만 옹성우를 강렬하게 낙인 시키려는 것 같았다. 옹성우는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자꾸만 얼굴을 들이밀며 자기를 보게했다. 왜, 왜, 왜 그래!? 놀란 내가 뒷걸음질치자 옹성우가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ㅡ 또 도망가려고 그러지.
이젠 안 돼.
씨익, 하고 웃는 옹성우 때문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 빠르게 그를 밀쳤다.
순간 순간,
자꾸만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다.
BY. 메타메타몽몽
매번 댓글과 추천 감사합니다!! 신알신이 40을 넘었다는 쪽지에 감격해서 입을 틀어막았네요.. 흡..
암호닉을 제가 한 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신청해주시면 따로 적어놨다가 텍파 풀때 드릴게요
나날이 늘어가는 조회수와 댓글, 추천 다 감사합니다
자주 뵐게요! 즐겁게 읽어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