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written by. 참이슬
-마음을 이끄는 약국, 그 여섯 번째 이야기-
" 무슨 일 있죠. "
" 깜짝아, "
" 놀라게했음 미안해요. "
식사를 마치고 잠시 병원 내의 구비된 공원으로 나가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쑥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밀며 나타난 재현씨에 깜짝 놀랐다.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표정은 내가 놀라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하다. 그를 흘깃 바라보다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아들었다. 아- 따뜻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그러쥐어 뜨거운 온도를 손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달했다. 오늘따라 힘이 없어보이길래. 하늘을 바라보며 넌지시 내뱉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뜸들였다. 그런 내 모습에 그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며 덧붙였다.
그냥 여러모로 복잡해요.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정말. 정말로 복잡하다. 가끔은 나도 나를 모를 때가 있단 말이지. 내 자신도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의내릴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지금이고, 그럴 때면 막막하다. 어떠한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 답답한 마음에 찾게 되는 건 언제나 맑은 공기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감싸고 도는 넓디 넓은 하늘이다. 사람으로 인해 생겨난 상처나 슬픔은 사람으로의 치유보다는 자연의 힘을 빌리는 편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
" 혹시 영화 좋아해요? "
" 영화, 좋아하죠. "
" 마침 운이 좋게 영화 티켓이 두 장 있는데, 같이 볼래요? "
" 그런건 여자친구한테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여자친구 없어요. "
" 아... "
" 혹시나 해서 말 하는데, 필요 없어서 안 만드는거니까 괜히 동정하지 말아요. "
큼큼- 헛기침을 하는 그를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 지금 나 비웃었죠.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피해 나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병동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영화관을 가게되어 그런지 고맙게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주는 것만 같다. 아닌가. 그만큼 일이 많았다는 뜻이겠지. 뭐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게 좋으니.. 뭐. 나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이왕 예쁜거라도 입고 올 걸. 항상 덜 꾸미고 나온 날에 약속이 잡힌단 말이야. 급하게 화장을 고치며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어둔 아이라이너로 눈도 키워보았다. 후, 도긴개긴이네.
" 화장이 좀 진해진 것 같다.. "
" ...네? "
"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 "
" 혼잣말을 상대방 다 들리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
후끈해지는 기분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재현씨는 말없이 웃는다. 그 모습이 평소에는 얄미워 보일텐데 오늘따라 괜찮게 느껴진다. 영화관은 병원 바로 앞 건물에 위치해 있었기에 우리는 걸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를 예매하기에 앞서 그는 핸드폰을 뒤적이다 직원에게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거로 예매할게요. 직원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웃으며 답했다.
" 네 고객님, 커플 예매권 사용하는거 맞으시죠? "
" .....아.. 네. "
" 커플 예매권 이용하시면 옆에 사은품 드리는데 어떤걸로 고르시겠어요? "
" 어.. 뭐, 뭐로 할래요? "
" ㄴ, 네? 하하.. 글쎄요... "
커,커플 예매권? 나는 순간 잘못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옆에 유리창 안에 놓인 커플 빨대, 커플 피규어를 통해 확인사살 할 수가 있었다. 동공지진이 일어나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애꿎은 영화 광고만 바라보았다. 아무거나 주세요. 들려오는 재현씨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도 적잖이 당황했나보다. 그렇게 조금은 민망한 예매가 어렵사리 끝나고 차마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하고 있던 질문을 재현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이게 친구가 준 건데 커플용인줄 몰랐네요. "
" 아.. 네... "
" 그.. 그래도 뭐 꽁짜니까 된거죠. 그치 않아요? "
" .....푸흡- "
" 아 뭐야, 왜 웃어요. "
평상시엔 까칠하면서도 완벽주의자인줄로 알았는데, 당황한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번도 말을 더듬거나 하질 않았는데 혼잣말로 계속 커플용인줄 몰랐다, 궁시렁거리며 나에게 변명아닌 변명을 하는 모습이 이제껏 봐온 그의 모습과 너무 상반됐다. 그런데 순간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이제껏 그를 경계해왔던 마음 한 구석에 놓여있던 벽이 사라진 것 같다. 계속해서 왜 웃냐는 그를 웃음으로 받아치며 상영관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 오늘 영화 너무 잘 봤어요 선생님. 다음에 제가 밥이라도 살게요. "
" 병원도 아닌데 낯간지럽게 무슨 선생님이에요. 편하게 불러요. "
" 저는 선생님이 더 편한데... "
" 너무 멀어보이잖아요. "
차에서 내려 동네로 올라가기 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가려 했건만, 왜인지 그는 나의 말투가 썩 듣기 좋지 않은 기색이다. 하루 중 반 이상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 당연히 그게 편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그래도 막상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고민이 되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며 어떤 호칭을 써야할지 생각하는데 문득 그가 키가 몇이냐고 물어온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나는 잠깐 멈칫하다 160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짓말-
" 그.. 그짓말이라니요!!.. "
" 딱 봐도 160 안되는 것 같은데? "
" 허, 그러는 선생, 아니 재현씨는.. "
" 그렇지. 앞으로 밖에선 그렇게 불러요. "
그는 내 머리를 한 번 헤집어 놓고 차로 걸어갔다. 여느때와 같이 손을 흔들고 차에 올라타기 전, ' 난 180이지롱. ' 혀를 내밀며 쏙 차로 사라진 그를 보며 어이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저, 저..! 키만 크지 하는 행동은 완전 초딩이네! 속으로 외쳐대며 그를 떠나보내고 괜히 그 자리에서 스트레칭 몇 번을 하고 언덕을 올라갔다. 조금 가파른 언덕 부근이 나오자 나는 자연스레 홀로 밝은 빛을 내고 있는 오른방면을 바라보았다. 잠시 자리에 멈춰 그냥 집으로 올라갈지 약국에 들를지 고민했다. 맞다, 동혁이에 관해서 얘기해보기로 했지. 이건 절대 억지로 약국에 가려는 이유를 만들어낸게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모노드라마를 찍으며 약국의 문을 여는데, 어라, 문이 열리질 않는다. 약국은 밝은데. 그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 어? 누나다. "
" ..동혁이? "
" 저 잠깐 편의점 좀 갔다오느라. 혹시 많이 기다렸어요? "
" 아니, 방금 왔어. 근데 너 여기서.. "
" 다 얘기해 줄테니까 일단 들어가요. "
동혁이는 검은 비닐봉지를 데스크에 올려두고 나에게 담요를 꺼내주었다. 끼니를 해결하려는 듯 봉지 안에 삼각김밥이 눈에 띈다. 저런거 말고 집밥 먹는게 좋은데.. 그래도 더 몸에 좋은 걸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걸 보니 나는 동혁이를 용서한 듯 싶다. 동혁이는 티나게 내 눈치를 보며 뜨거운 물에 녹차티백을 넣어 나에게 건네고 나와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굳이 말리지 않았다. 동혁이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이 필요할테니. 나는 동혁이가 약국에서 알바를 하게 된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도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민형씨에 대해 물었다. 민형이 형 금방 나갔는데, 못 봤어요?
" 여자친구 만나러 갔을걸요. "
" ...풉-! "
" 헐, 누나 괜찮아요? "
" 여.. 여자친구? "
" 네, 아마도? 어떤 이쁜 누나가 오더니 형이랑 나갔는데. "
동혁이가 건넨 휴지로 입을 닦고나서도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뭐야. 김여주. 너가 뭔데 충격을 받아. 민형씨랑 무슨 사이라고.. 나는 고개를 세게 가로저으며 뜨거운 녹차를 들이켰다. 누나..? 동혁이의 부름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어, 어. 괜찮아. 더이상 민형씨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기도, 듣기도 싶지않아 화제를 바꾸었다. 동혁이는 끼니를 잘 해결하고 있는지. 알바를 하지 않는 시간대엔 무얼하는지. 다행히도 동혁이는 민형씨의 도움으로 이번주 부터 학업을 다시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동혁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쪽으로 의지를 다잡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 그런데 동혁이 너 이렇게 계속 사먹기만 하면 건강에 안 좋아. "
" 제 나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요. "
" 그래, 젊어서 좋겠다. 그래도 밥먹고 싶음 연락해. 퇴근시간 맞으면 우리 집에서 밥먹자. "
" 어.. 정말요? 그럼 맨날 연락할래요. "
" 다시 생각해볼게. "
아 뭐에요, 귀여운 투정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동혁이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데려다 주겠다는 동혁이를 마다하며 밖을 나오다 민형씨를 만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나와 동혁이를 보고 안고 있던 여자를 떼어놓는 민형씨를 만났다. 에이 형- 성스런 약국 앞에서 지금 뭐하는.. 어, 누나. 누나!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동혁이에게 별다른 인사도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린다.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잠시 문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그와중에 너무 바보같은 표정을 지어버린 것 같아 후회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왔어야 했는데.. 으아아, 난 몰라. 자책과 동시에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헙- 민형씨. 당황하여 핸드폰을 끄려다가 실수로 전화를 받아버렸다. 으악 이 바보야! 머리를 부여잡다가 전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민형씨의 목소리에 빠르게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 ...여보세요?
" 네, 민형씨.. 어쩐 일로.... "
- 아.. 아까 제대로 인사를 못해서.. 여주씨 잘 들어가셨어요?
" 네네. 지금 집이에요. "
- 아아.. 잘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제가 바래다 드렸어야 했는데. "
" 아뇨 전혀.. 굳이 저한테 그럴 필요 없는걸요. "
- ....하 그게 아니라.., 저.. 여주씨 혹시 내일 바쁘세요?
" 내일.. 네, 일이 있어서.. "
- ...네, 알겠어요. 그럼.. 잘 자요. 여주씨.
민형씨와의 통화를 끝내고 냉장고를 열어 찬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를 향해 짖어대는 뽀뽀를 보며 푸념하듯 얘기했다.
" 그래 맞아, 나 내일 오프야. "
" 왈왈! 왈! "
" 싫어서 그런건 아니야.. 하, 몰라. 난 바보야. "
* * *
" 망했어. "
" 뭐가요? "
" ....전부 다. "
데스크에 납작 엎드린 주인님을 다독이는 동혁소년은 도저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에요. 요즘따라 처음보는 주인님의 모습이 많아져 저도 덩달아 혼란스럽네요. 다만 확실한건 주인님이 방금 밖에서 여주씨와 통화하고 들어오자마자 상태가 저렇게 되었단 것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여섯 번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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