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라 하기엔 작고, 그렇다고 모니터라 하기에도 조금 뭐한 27인치 TV에선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도를 중심으로 다루는 방송국이라 이름은 따로 있었어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조선방송이라 불렀다. 반찬을 다 꺼내오자 엄마가 김재환을 불렀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와서는 꾸벅 인사했다.
[부산에서 경상북도 전체로 퍼져나간 이 데모에 대해 일본 내각은 현재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다만 자위군 확대가 검토 중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데모에 참여한 학생들은 87%가 반도 출신으로…]
오늘 뉴스 거리는 조선어 사용으로 한 고등학교가 폐교 처리된 사건에서 불이 붙은 데모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데모란 조선 내에서 흔히 있던 일이었기에 매스컴에서는 이번 데모도 며칠 이내로 진압돼리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여름이 시작되자 데모의 열기는 보란듯이 더욱 달궈졌다. 엄마가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경성은 아직이니?"
지방에 있는 대학의 경우 학생은 물론 교수진들까지 조선인이었기에 시국선언이 빈번했다. 그러나 경성대는 달랐다. 물값이 싼 조선으로 건너와 졸부 행세하는 일본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사교육을 등에 업은 채 입학했기에 일본인 천지였다. 조선인은 셋 이상만 뭉쳐도 몰래 감시가 붙었고 허가없이 응집한 모임은 아무리 사적인 것이라 할 지라도 징계를 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환이 나를 쳐다보았다.
"알잖아, 엄마. 우리학교 조선인 감시 엄청 심한 거."
"경성대에서도 해요. 소모임도 있고."
김재환이 내 말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곧 경성에서도 있을 거예요. 제 친구도 경성대 학생이라."
이상하게도 그 말에 나는 눈을 피해버렸다. 분명 안에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이를 테면 너는 교우들 나가서 피 흘리는 동안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느냐 묻는 것과 같은.
"아, 그래. 몰랐어."
"아냐. 본인 신념에 달린 거니까."
덤덤한 척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어딘가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김재환은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엄마가 말 없이 나를 보았다.
평소보다 밥을 많이 남겼다. 나는 집 밖으로 통화하러 간 김재환을 따라 나갔다. 처음엔 왠지 모르게 치미는 화에 막무가내로 따질 맘이었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화낼 일조차 되지 못했다. 건물 현관문을 열자 그 소리에 김재환이 전화하다 말고 나를 흘끗 보았다. 그냥 그에게 옹성우 얘기나 해 볼 생각이었다.
그가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잠시만요. 조금 이따 전화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그가 일본어를 쓰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물었다.
"너 일본어도 해?"
"말했잖아. 그 집에서 잠깐 일했었다고."
그가 미소 지으며 반바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이때다 싶은 생각에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 스가타 쇼지랑 아는 사이라고 했지."
라이터로 불을 붙이니 곧 담배에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김재환이 한번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너 얘기를 했어."
그가 나를 돌아보진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내 말에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다는 것. 그에게서 나오는 담배 연기가 바람을 따라 허공을 맴돌더니 흩어졌다.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널 만나고 싶어하더라."
그의 손에 들려있던 담배가 콘크리트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는 신발코로 그 위를 밟았다. 질근질근. 그리고는 내 말을 따라 반복했다.
"날 만나고 싶다 했다고."
"응."
그가 발을 떼니 담배는 신발 바닥에 묻어있던 흙들로 더러워져 있었다. 무게에 짓눌려 납작해진, 엉망진창인 채였다.
"그럴 리 없을 텐데."
내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에게 느껴지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안색도 좋질 못했고 혀로 계속해서 입술을 축이는 게 불안한 눈치였다. 무엇보다, 그는 대화 내내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들과 안어울리게,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집에 불을 질렀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디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이냐는 둣이 가벼이 말하고 있었다.
"나도 참 만나고 싶은데, 독립군 일 때문에 바쁘다고 전해줘."
불현듯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만나게 해달라는 옹성우의 목소리. 붉어졌던 내 손목. 휴대폰 빛에 잠시 비춰졌던 그의 얼굴.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그 슬픈 눈까지도.
08. bug in a web
오랜만에 앉아보는 책상 의자였다. 시야 너머로 책장을 빠르게 넘기는 여주의 손이 보였다. 티는 안 냈어도 꽤 신난 눈치였다. 성우는 의자에 드러눕듯 기대어 삐딱하게 앉았다.
"전에 과외 하셨던 분들이 어디까지 봐주셨는지 잘 모르니까, 그냥 기초부터 나갈게요."
"그 전에 해 줄 말 없나."
"지금은 과외 시간이니까요."
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약속이랑 다른데."
"아뇨. 아까 분명 과외 끝나면 말해준다 했는데."
"반말 해도 된다는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저도 저한테 말 놔도 좋다 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침에 김재환한테 얘기해봤는데, 대답은 오늘 과외 들으시면 해드릴게요.
일단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여주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성우가 왜 김재환을 만나고 싶어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김재환의 그 대답을 어떻게 순화시켜 말할 지도 고민이었다. 성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라이터를. 그래서 담배를. 그래서, 조선인을.
"이 쪽 단원 하셨어요? 여기 다 기본문젠데 푸실 수 있으면 풀어보시겠어요?"
"했고, 너무 쉬워."
공부를 아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여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럼 이건 심화문젠데, 풀 수 있는 것만 풀어보세요. 같이 봐드릴게요."
여주가 제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어 성우에게 건넸다. 세미수트를 빼입고 그걸 쥐고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혹시라도 신경쓰일까 싶어 책상 위에 달린 창문만 보고 있었다. 대충 풀다 말았는지 생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성우가 샤프를 내려놓고선 팔짱을 꼬았다.
여주조차 풀이 설명이 복잡해 몇번이고 반복해서 풀었던 문제들이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문제 밑에 요약된 풀이와 정답이 하나하나 적혀있었다. 과외 제의 받았을 땐 분명 기초만이라도 가르쳐줬음 좋겠다 했던 것 같은데. 성우가 여주의 표정을 봤는지 말했다.
"과외 받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근데… 왜…"
"오늘은 여기서 끝난 걸로 하고."
여주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음 좋겠다는 투에 물음은 그쳤지만 호기심이 마구 솟았다. 성우가 그녀에게 짧게 말했다.
"약속."
표정이 한결 풀어진 게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에게 대고 묻고 싶었다. 김재환 이름만 나와도 그렇게 떨면서, 그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게…"
여주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만나고 싶다는 성우의 말에 독립군까지 들먹이며 대답한 건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아침에 저에게 그랬듯 그게 김재환의 고유한 화법이니까.
그래서 여주는 그 말을 과감히 생략했다.
"바쁘다고…"
왜 굳이 그렇게 전해줬느냐 하면, 차마 저를 쳐다보는 성우의 눈에 대고 그 말을 다 전해줄 수가 없어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주가 성우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책상 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주는 생각했다. 이 책상 서랍 안에 담배와 라이터가 몇 개나 있을까 하고.
"그래."
성우가 작게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씁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