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소녀에게
제법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초록빛의 싱그러운 풀잎들이 자라나고 더위가 섞인 바람이 불어 이마부터 흘러내리는 땀을 조금씩 식혀주었던 여름. 넌 나와 달리 그런 여름을 싫어했다. 그런 여름에, 넌 투정을 부렸지만, 이런 여름을 즐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숲속에서 싱그러운 풀잎들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방법은 우리가 여름을 함께 보내는 방법이었다. 비록, 벌레가 많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그 모습은 어찌나 귀엽던지. 그 모습을 생각할 떄면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넌 항상 가늘고 고운 목소리로 날 불러주었다. 숲속 우리만의 펜션에서 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것 또한 어찌나 행복하던지. 너의 그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정도였다. 까치발을 들어내 목을 감싸 안을 때면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입을 맞추곤 했다. 입을 맞출 때면 달콤하게 느껴지는 너의 입술, 그리고 하얗고 부드러웠던 너의 고운 피부. 다시금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 너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여름 속에서 아직 있을 널 불러봤다. 참으로 예뻤던 그 이름은 너와의 추억이 가득 했던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우연의 일치인 것인지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장마로 인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펜션 안으로 들어와 창문을 통해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유리에 부딪히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비는 어느새 이 허전한 공간을 채워주었다. 난 그런 빗소리를 들으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았다. 습기로 축축하게 젖었지만 너의 온기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이 펜션에서 함께 웃고 있는 너와 나, 어렴풋이 나는 기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경험하지 못할 너와의 추억에 인사를 했다. 잘 지내고 있냐고, 기억하고 있냐고. 우리의 운명인 듯 운명 아닌 첫 만남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려졌다. 여름처럼 첫인상은 강렬했지만, 그 강렬함에 빠져 넌 내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었다. 어쩌면 그 강렬함에 널 더욱더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변명 같은 생각에, 나 자신이 한심해져 헛웃음을 했다. 널 그려내며 손을 뻗었지만 내게 잡히는 건 여름의 더운 공기가 아닌 차가운 공기가 손에 잡혔다.
넌 어디에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할 때쯤,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앞에는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낸 네가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하얀 원피스를 입은 네가 왔다는 놀라움에 난 벌떡 일어나 너에게 다가갔고 넌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더니 날 무시한 채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앉았다. 난 재빠르게 네가 앉아있는 침대 옆으로 가 똑같이 앉았고 넌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주변만 둘러보고 있었다. 넌 너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금 흐르는 눈물이 어째서 내 마음을 아파지게 하는 걸까. 마치 너와 내 심장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듯 심장이 찌릿찌릿 아파졌다. 그리고 뚝,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허공에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너의 부름에 대답을 했고 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의 지난 추억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빗소리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너의 청아한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하나의 가사를 써 내려가는 듯했다. 빗소리라는 반주에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가사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를 곁들이니 허전했던 마음속이 점차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넌 내 허전함을 채워준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너의 눈에서 흐르는 투명한 눈물의 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걸 보는 나까지 가슴이 막혔다.
“다른 시간 속에 있는 널 만날 수 있을까?”
눈물에 젖은 너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울렸다. 너의 온기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다시 허전해졌다. 네가 허공으로 뻗은 손가락 끝을 보자 현실을 즉시하고 말았다. 무의 존재가 되어버린 날 알아볼 순 없겠지. 울적한 마음에 널 감싸 안았다. 촉촉하게 젖은 내 마음이 널 불렀지만 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꽉 감싸 안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실을 즉시 한 이상 이곳에 존재할 수도 없었다.
허무함에 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허전해진 마음을 다시 너로 채우기엔 이제 더 널 붙잡지 못할 것만 같았다. 널 마지막으로 잡으려고 꽉 안았다. 너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느껴질 정도로 안아보았다. 지금 느껴지는 열기가 비록 여름의 열기일지언정 널 이렇게라도 안는다는 게 행복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눈물을 흘리는 널 바라보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함께여서 고마웠다고, 사랑했다고, 그리고,
“같은 시간 속에서 널 기다릴게.”
비밀스러운 약속을 끝으로 난 그녀의 곁을 완전히 떠났다.
그 같은 시간 속에서는 너와 내가 영원히 함께하길.
소년이 소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