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속아 B w. 미이 8. 왜 그랬을까.
떠나가고 뒤늦게 후회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먼저 헤어지자고 말을 꺼낸 것은 너였지만 모든 원인은 내가 만들었으니.
난 항상 그랬다. 뭐든 한 번씩 겪어봐야 정신을 차리고는 했었다. 휴대폰을 떨어트려 액정이 한 번 박살 나야 케이스를 샀었고, 길을 가면서 딴생각을 하다 사고가 날 뻔해야 다시 집중해서 걷고는 했다.
넌 그런 내 모습을, 고쳐야 하는 단점들을 항상 걱정해주면서도 예뻐해 줬다.
내 어디가 좋냐고 물어보면 넌 항상 너의 모든 것이 다 예뻐.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꼬옥 안아주곤 했었는데
종현아, 그때의 내 모습은 예뻤니.
많이 미웠겠지, 미안해.
새벽의 하늘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9. 이상하게도 참 포근했다. 역시 어제 일찍 잠들기 잘했다며 눈을 감은 채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가 불안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떠 시계를 확인했다.
30분 전의 나의 뺨을 칠 수 있으면 치고 오는 건데. 일찍 일어나긴 무슨, 해는 이미 높게 떠 있었다.
빨리 챙기면 지각은 면할 수 있는 시간이라 빠른 걸음으로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신발에 발을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이때까지 지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 … "
아,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기분이었다.
헤어졌구나 그래서 아침에 네 연락이 없었구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토록 너에게 무신경했었나.
7년 사귄 남자친구랑 어제 헤어졌는데 방금 생각났어.
얼마나 몰매 맞을만한 말인가, 그렇게 무신경할 거면 그냥 빨리 정리할걸.
괜히 상처만 더 안겨줬나 찝찝한 기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리 잡아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알람을 맞췄다. 한 번에 못 일어날 것 같아 3분 간격으로 여러 개의 알람을 맞추는 내내 마음속 한구석이 텅 빈 기분이었다.
일부러 손을 다급하게 놀려봐도 여전히 허전했다.
10. " 여준아 "
" 응? "
넌 내 어디가 좋아? "
뜬금없이 왜.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종강기념으로 영화를 봐야겠다며 밤늦게 영화를 보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영화 속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나.
" 음… "
안 알려줄래. 내 말에 넌 입을 비죽 내밀었다. 솔직히 말해 못 말하는 것이었지만.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한테 쳤던 대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해.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이제 막 23살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니라 23개월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닐까, 누가 봐도 ' 나 삐졌어요. ' 라는 표정으로 넌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와중에 잡고 있던 손은 놓지 않은 채로.
영화관을 나올때부터 내 손등을 쓸던 네 엄지손가락의 움직임 역시 여전히 손등 위를 꾸물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삐진티는 내야겠고, 그렇다고 잡고있던 손을 놓기는 싫고.
더 장난기가 생겨 손을 놓으려고 힘을 뺐다. 귀여운 걸 어떡해
손을 놓자 오히려 손에 더 힘을 주고 내 손을 잡아 오는 너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단단히 삐졌나
" 종현아 "
" 나는 너라서 다 좋아 "
" 응? "
" 몰라. 그냥 다 좋아. "
오늘은 꼭 먼저 듣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중얼거리던 네 말에 문뜩 떠올랐다.
보고 싶어. 나도. 사랑해. 나도. 항상 먼저 네가 표현하면 ' 나도 ' 라며 짧게 대꾸했던 내 대답이 서운했겠구나.
" 종현아 "
" 어? "
잠시만. 네 어깨를 잡아서 내 쪽으로 끌어당겨 귓속에 속삭였다.
" 나도 네 모든 게 다 좋아. "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서 움찔거리던 볼살이 너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11. 정말 최악이었다.
가까스로 지각을 면한 회사에서는 잇따른 실수 덕에종일 윗사람한테 불려다니며 혼나기 일쑤였고, 그 날따라 커피를 옷에 흘려 옷을 버리거나 두툼한 서류뭉치를 떨어뜨려 괜한 일을 만들었다.
" 여준씨 무슨일 있어? 너무 무리하지마 "
" 아,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
나쁜 일은 한 번에 다 터진다더니, 퇴근할 때쯤 되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걸었다.
내일이 주말이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컷 비를 맞으며 집에 도착한 내 꼴은 나 자신에게 동정심이 들 만큼 추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괜히 한 번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종일 적어도 백번은 확인한 것 같다. 이쯤 되니 전원키가 닳아서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 예정인 연락은 없다. 기다리는 연락이 없다고 확실하게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가슴 한쪽 구석이 답답했다. 내가? 이제 와서 왜.
벨 소리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씻는 동안 연락이 올까 봐.
어떤 연락을 따로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욕실 속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비에 푹 젖어 볼품없었다.
12.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1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또 깜박했는데.
작년에도 1교시에 호되게 당해놓고 또 1교시를 고른 내 손을 탓하며 다음 시간표를 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아침에 내가 까먹을 것 같아서
- 미리 얘기해둘게
- 내일 비 온대 우산 꼭 챙겨가
- 저녁 8시쯤 도착할 것 같아. 집 앞으로 갈게.
- 아침 절대 거르지 말고.
- 자..?
- 잘자
- 사랑해
- 나 방금 일어났어.
- 갔다올게 조금 이따가 봐.
- 일어나면 연락해.
부재중 전화 2통 카톡 11개, 모두 김종현이었다.
오늘 본가에 가족들이 다 모이기로 해서 가봐야 한다고 하더니 아침 일찍 고향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 무음이라서 이제 봤어. 미안해
- 잘 도착했어?
아 뭐야, 공강이네.
급하게 답장을 보내놓고 시간표를 확인했다. 크게 비어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다 집에 갔다 오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포기하고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빗소리가 들리는 도서관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포근했다. 전공책을 펼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조금씩 감기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아, 이렇게 또 자체휴강이라니.
커피 좀 줄이라며 집에 있던 커피믹스를 김종현이 다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커피 없이 밤샘 공부를 한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조금 숨겨둘걸.
언제부터 방전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대충 짐을 챙기며 도서관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9시 30분? 내가 미쳤지 미쳤어.
퇴실 카드를 찍고 도서관 로비로 나오니 빗소리가 들렸다. 장마철도 지났는데 오전부터 쏟아지던 비는 그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다 비가그칠 때까지 기다리기엔 턱도 없을 것 같아서 가방 안을 뒤적였다.
아까 없었던 우산이 지금 생길 리가 없지.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메고 있던 가방을 감싸 안고 달렸다.
13.
" … "
" ..어디있었어 "
심장이 철렁했다. 빗물에 눈이 따가워서 공동현관 앞에 누가 있는지 확인도 못한 채 그대로 들어가려던 내 발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네 목소리였으니.
넌 계단에 기대어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 지금 몇 시야 "
네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 찍힌 시각은 10시를 이제 막 넘기고 있었다.
" 미안해 "
" 어디 있었어 "
" 공강 시간 동안 잠시 도서관에 있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어.. "
하. 넌 한숨을 쉬면서 입고 있던 겉옷의 모자를 벗었다.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공동현관 센서 등이 탁- 소리를 내며 켜졌다.
" 휴대폰 배터리 충전하는 거 또 깜박했지 "
" 미안해.. "
" 오전수업밖에 없다는 애가 오후 내내 연락도 없고 "
" 기다리다 다시 연락해도 휴대폰은 꺼져있고 "
" 네 친구들 한테 물어봐도 1교시 이후로 모르겠다는데 "
" 날씨는 왜 이 모양이라서. 또 우산 안챙겼지 "
" 이러니 내가 걱정이 돼, 안돼? "
연신 다행이라며 나를 끌어안는 넌 나보다 더 폭삭 젖어있었다.
14. 씻고 나와서도 내 정신은 휴대폰에 머물러있었다. 괜히 통화기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뒤져봐도 여전히 허한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사랑이 식었다 한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맺어온 관계는 앙숙일지라도 쉽게 지워내지 못할 만큼 긴 시간임은 확실했으니
힘이 빠졌다. 아니, 힘들었다. 헤어진 지 고작 하루가 지난 이 시점에서 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를 완벽하게 내 생활에서 비워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넌 생각보다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있었다.
축축한 머리를 뒤로하고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느낌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너를 아직 사랑하고 있냐고?
아니, 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7년이라는 시간을 우습게 본 죗값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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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11. 15 / 20 : 12 기준 ) 댓글이 7개라니! 너무 좋아서 한 20번은 정독했어요ㅎㅎㅎ 고마워요♡ + 답글은 부끄러워서.. 노력해볼게요. + 전개는 이별을 중심으로 이별전/이별직후/이별후 더 시간이 흘러서 현재. 이렇게 섞여있어요. 혹시 이해가 어려우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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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금붕어] 암호닉이라니!!!!! (두근) 자주봐요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