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컵컵한 방 안에.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비춰진 침대에 홍빈은 다리를 감싸 앉아 몸을 구부려 어느새 차가워진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것인지 감정이 격해져 벅차오르는 숨을 어찌하지 못 하고 가슴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온 세상이 떠나갈 듯 하염없이 구슬프게울고만 있었다. 홍빈은. 어느샌가 홍빈의 방 안에 들어와 한참 홍빈을 착잡하게 보던 그녀는 홍빈은 달래주기 위해 그녀의 희고, 고운 손을 애처롭게 뻗다, 이내 거두었다.
"어찌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이냐."
"꿈을, 꾸었습니다.."
"슬픈 꿈을 꾸었나보구나."
"아니, 아니요. 무척이나 행복한 꿈이였습니다."
"그럼 뭐가 슬퍼 그리 우는 것이냐."
"제가 그 꿈에서 깨게 된 것이, 그것이.. 아주 슬픕니다."
..그 꿈을 다시, 꾸고 싶니.
*
초여름인데도 날씨는 훅훅 열기가 올라왔다. 초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덥게. 아침이고, 저녁이고. 뉴스에 나오는 기상캐스터 쭉쭉빵빵 누나들은 벌써 역대 최고의 기온을 찍었다고 귀가 시끄럽게 떠들어대었고. 이에 평소 뉴스를 즐겨보던 홍빈이 표정을 찌푸리며 리모콘을 들어 티비를 끈 것은 어젯 밤의 일이었다. 이 학교는 뉴스도 안 보나, 날씨가 이 지경인데 춘추복이 뭐야 춘추복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름 친하게 지내는 반 아이들이 제게 인사를 건내며 하나 둘 교실을 빠져 나가 결국 혼자가 되고 나서야 홍빈은 투덜대며 손으로 와이셔츠 단추를 풀러나갔다. 아이고 덥다. 옷을 한꺼풀 벗어낸 홍빈이 그래도 더운지 반 선풍기 앞에 다가가 바람을 쐬었다. 강한 바람을 맞는 홍빈의 흰 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나풀거렸다. 나그네 옷을 벗긴건 뜨거운 태양이 맞았나봐요. 양 손의 차가워 보이는 캔 음료를 들고 반 안으로 들어온 상혁이 장난스럽게 휘휘, 휘파람을 불어대었다. 더요! 더 벗어주세요! 형아 섹시하다! 멋있! 으악.
"고만 까불어라. 쬐끄만게."
"내가 형보다 큰데요?"
"너 이씹,"
아아, 장난이에요 사랑해요 엉아. 한순간 차가워지는 홍빈의 눈을 본 상혁이 애교를 부리며 홍빈의 팔에 들러붙었다. 무리의 막내라 그런가 자연스레 나오는 애교를 웃으며 바라보던 홍빈이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에 몸서리를 치며 팔을 흔들었다. 더워. 떨어져. 덥다는 말에 비해 시원한 봄처럼 뽀송한 홍빈의 피부를 빤히 쳐다보던 상혁이 웃으며 자신이 가져온 캔 음료를 홍빈의 뽀송뽀송한 볼에 갖다대었다.
"더위는 많이 타면서 땀은 별로 안 흘리네요. 신기하다."
얼굴로 퍼지는 차가움에 가만히 미소지은 홍빈이 장난스럽게 상혁에게 헤드락을 걸며 반을 나섰다.
"그래서 형은 여름에 안 찝찝하다, 부럽지?"
"아 이거 놔줘요!!"
팔을 푸드덕 푸드덕 거리며 빠져나가려 힘을 쓰는 상혁을 본 홍빈은 어쭈, 하며 헤드락을 더 세게 걸 뿐이었다. 둘이 나간 교실에는 탈탈 거리며 힘들게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한 대와. 이슬이 맺힌 차가워 보이는 캔 음료 한 개가 남아 있었다.
*
상혁과 홍빈이 서로 장난을 치며 걸어간 곳은 학교 운동장 끝 쪽의 마련된 농구코트였다. 둘이 없는 새에 택운과 잠시 공을 튕기던 원식이 느릿하게 걸어오는 상혁과 홍빈을 보고 짜증을 내며 공을 던졌다. 형, 애들 왔어요. 이제 시작해요! 손 쉽게 공을 받은 홍빈이 공을 튕기며 농구코트로 걸어가자 햇빛을 가려주는 벤치에 앉아있던 재환과 학연도 어슬렁 어슬렁 손으로 티를 펄럭거리며 걸어나왔다.
"너넨 젊은 것들이 왜 이렇게 느려어 쪄죽을뻔했잖아."
"형은 늙은게 어디서 말꼬리를 늘리고 있어요"
헐 쟤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겨 지금?! 어?! 재환아 쟤 지금!, 아 됐고! 뒤집어라 엎어라 돌려도 한판 데덴찌! 재환을 보며 울분을 토하던 학연이 원식의 말에 얼떨결에 손을 내었다. 아 이게 아닌데! 꿍시렁 꿍시렁. 계속 중얼대는 학연과 싱글생글 웃고 있는 상혁의 팔을 잡은 택운이 한걸음 물러섰다. 우리 위. 기쁜 표정으로 자신의 뒤집어진 손을 본 원식과. 홍빈은 밟을거라고 선전포고하는 학연. 이에 맞서 학연에게 벌침을 콕콕 쏘아대는 홍빈, 여전히 싱글생글인 상혁과 관심이 없는 듯 따분한 표정을 짓는 재환. 그리고 무표정이지만 묘하게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택운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기괴한 모임이였다.
"아오, 더는 못 해. 못 해! 안 해!"
농구 게임이 시작되고 한참이나 홍빈과 택운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원식이 결국은 벤치 옆 코트에 벌렁 들어다누웠다. 벤치에는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나가 있던 3인방이 원식을 한심하게 보며 쭈쭈바를 입에 물고 빨고 있었다. 형도 이거 먹어여. 선심쓰듯 발라당 누워있는 원식에 배 위에 쭈쭈바를 던져준 상혁이 이내 다시 고개를 들려 농구 코트 위 날아다니는 홍빈과 택운을 쳐다보았다. 농구 하나는 진짜 끝내주게 잘하네 이홍빈. 꼬물꼬물 제 배 위에 있는 쭈쭈바를 깐 원식이 쭈쭈바를 입에 물고 공을 튀기는 홍빈을 쳐다보았다.
무슨 운동이든 몸으로 하는 건 다 열심히 잘 하는 만능 스포츠맨 택운에 비해 홍빈은 그닥 운동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운동신경은 좋을지는 모르나 홍빈은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 했다. 남들은 온 힘을 다해 뛰는100m 달리기를 느긋하게 달릴 정도로. 그런 홍빈이 유일하게 몸을 사리지 않는 스포츠가 농구였다. 아니, 정정. 실력이 강한 상대와 함께하는 농구였다. 그 예로 중학교 때 부터 친구인 원식은 홍빈이 농구를 잘 하는지, 농구의 흥미가 있는지 고등학교 와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 아싸, 이겼다! 가볍게 점프해 농구 골대에 공을 넣은 홍빈이 생글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홍빈과 농구를 택운도. 벤치에 앉아 농구경기를 구경하던 상혁, 재환, 학연도. 마지막으로 누워있던 원식까지도. 멍하니 홍빈의 웃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 끝내준다 진짜. 홍빈의 턱엔 땀 몇 방울이 맺혀있었다.
*
"홍빈이 형. 잘 먹을게요!"
자리를 옮겨 햄버거 집으로 들어선 무리는 에어컨 바로 옆인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각자 햄버거 메뉴를 정해 주문을 하고, 햄버거를 받아 온 학연이 홍빈에게 감사를 표하는 상혁을 눈을 세모꼴을 하고 쳐다보았다. 웃기는애야, 진짜. 사는건 나랑 택운인데 왜 이홍빈한테 고맙다 그러냐?! 웃으며 투덜대는 학연을 바라본 홍빈이 이내 제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거야, 홍빈이 형이 이겼으니까 그렇죠! 맞죠 형아~, 애교를 부리며 홍빈에게 달라붙는 상혁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트린 원식이 징그럽다는 듯 눈을 돌리며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그제서야 다들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어려서 돈 내는거에 빼줬더니! 안되겠어 너도 돈 내! 너도 우리 팀이었잖아!"
"헐 나이 어린 막내한테 그러고 싶어요? 코 묻은 돈 가져다가 어디다 쓰게!"
"이게 웃기고 있네! 키는 드럽게 큰게 어디서 막내 행세야!"
아 진짜 이럴거에요?! 뭐, 뭐! 학연의 옆에서 조용히 햄버거를 먹던 택운이 학연의 입을 막고, 벌써 햄버거를 다 먹고 감자튀김을 집어먹던 재환이 상혁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먹는데서 침 튀기지 좀 마요. 더럽게! 마지막은 원식이 장식했다. 홍빈은 여전히 우물우물 햄버거를 먹고있었다. 아씨, 치워! 나도 햄버거 먹을거야 다부진 택운의 손을 치워낸 학연이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고, 재환에게 맞아 얼얼한 뒷통수를 몇 번 쓰다듬은 상혁도 이내 묵묵하게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아, 근데 있잖아요. ..어?
말을 꺼낸 홍빈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왜 그래? 원식이 물었지만, 홍빈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아, 또다. 머릿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친다. 머리를 부여잡은 홍빈이 답답한 듯 등을 뒤로 기대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친구들에게 애써 괜찮다고 웃어보였다.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이 문득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곧잘 웃고 장난치며 떠드는 형들과 친구, 후배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같이 웃고, 장난을 치고, 받으면서 꾸역꾸역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입에 밀어넣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거북한 이 느낌을 피할 길이 없었다. 방금 먹은 햄버거가 속에서 얹힌 것 같았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어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무리와 헤어졌다. 어느새 가게 밖은 해가 져물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전보다 유독 더 이 길이 낯설다. 항상 다녔던 길인데 왜 그러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홍빈이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홍빈의 집은 골목 끝에 있었다. 집 대문 앞에는 아까 가게에서 봤던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군데 저기 서있는걸까, 심장이 쿵쾅쿵쾅 힘차게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깨어날 때가 된 것 같다.
여자의 말을 들은 홍빈이 허탈하게 웃음지었다.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 홍빈의 머릿속 잊혀져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제 고개를 들어내었다. 이번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홍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5명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보고 싶을거야. 많이, 보고 싶을거야. 생각보다 덤덤했다. 이 정도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홍빈의 속눈썹이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곧 홍빈이 눈을 떴다. 어두컨컨한 방 안이었다. 그제서야 울음이 나왔다. 자신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홍빈의 얼굴이 또 다시 젖어들어갔다.
오랜만이에요! 혹시나 저 기다리던 천사 분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하트뿅뿅 사랑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