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염 06
: 업 (Karma)
내가 너에게 묶인 순간 이후로, 너는 평온을 되찾은 것 같았다.
잠시였지만, 그런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잠시가 아닐지도.
어쩌면 영원일지도 몰라.
"여보세요."
이렇게 고요하고 꿈같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린 제법 성공했다.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넌 모델로 승승장구했다.
런웨이에서, 신문 1면에서, 가판대에 꽂힌 잡지의 표지에서, TV의 광고에서 나는 널 볼 수 있었다.
넌 빛이 났다.
넌 가끔 멀리 촬영을 다녀왔다.
한두 달씩 길게 촬영을 갈 때는 나도 같이 갔다.우린 서로였으니까.
그날도, 지정석이 되어버린 카페 흡연석에서 커피를 시킨 후 담배를 피워 물고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 쓰다 네게 연락이라도 할까 하고 집어든 폰에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와 있었다.
무음이라 못 받았나.
날 반기는 건 음성 메세지였다.
평화로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나 한 달간 밀라노로 촬영가요.
갑자기 잡힌 거라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시간 나는 대로 전화할게요.]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한 달.한 달간 너 없이 생활할 걸 생각하니 아찔했다.
내 인생에서 너 없이 지낸 삶은 없다고 보는 게 맞으니까.
머리가 복잡해졌고, 결국엔 더 이상 글을 못 쓰고, 집까지 오는 내내 담배를 줄창 태웠다.
역시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급하게 나갔는지 바닥에 재킷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버려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향수병을 잡았다.
네 향이, 내 향이 그리워서.
그러나 손이 말을 듣지 않고 병을 미끄러트렸다.
향수병은 타일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나는 훅 끼치는 제비꽃 향기 안에서 잠시 정지해 있었다.
마침내 안온한 카펫을 나와 차가운 타일 위로 발을 내딛었다.
큼직한 젖빛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든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팠으면, 지독하게 아팠으면.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없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으면.
느릿하게 동맥이든 정맥이든 혈관이 있음직할 팔목을 그었다.
피 냄새가 제비꽃의 그것만큼이나 빠르게 퍼졌다.
피가 채 떨궈지기도 전에 고통이 욱신거리며 내 팔의 모든 신경을 타고 뇌를 두들겨 댔다.
다시, 다시, 다시.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내 세포를 깨웠다.
“문 열어요.”
사장이었다.
문을 안 열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다시금 초인종이 울렸다.
"당신 안전한 거 확인하고 돌아갈 겁니다.
문 안 열면 119 부를 거고요."
정신이 든 나는 범죄자가 된 듯 허둥대다가 유리 조각을 저만치 던지고 한쪽 팔을 뒤에 숨기고 문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멍청하게.
“당신.”
그가 미간을 구기고 내 손목을 낚아챘다.
당황스러웠다. 그 때의 나는 퓨즈가 제대로 나가 있었는지, 나답지 않게 어설펐다.
“놔.”
“손목 그었잖아요, 퍽도 못 알아챘겠네요.
손목 놓을 테니 병원부터 갑시다.”
사장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그의 손에 얹었다.
신호위반에 과속까지 해가며 그는 날 데려갔고, 나는 응급실의 혼잡한 상황 속에서 처치를 받았다.
간호사의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걱정과 불안과 또 다른 무엇이 그를 친친 동여맨 채 있었다.
궁금해졌다. 뭘까, 저 감정은.
경멸일까 동정일까. 혹은, 분노일까.
문득 그 속이 궁금했다. 사장의 속내가.
주의사항을 얘기한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간 후에도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말해 봐요.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누구 때문에 이 지랄을 해가면서 살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
도대체 왜 그었는지 들어나 봅시다.”
사장이 침대 곁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내 감정에 대한 조롱일까. 그건 아무래도 좋았어, 민형아.
“민형이 촬영, 사장님이 보내셨어요?”
“난 결정권이 없어. 심아.
갈지 안 갈지는 민형이 몫이야.
난 그런 걸 신경 쓰기엔 해야 할 일이 많거든.”
그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는데, 그것마저 아름다웠다.
너도 알잖아, 민형아. 사장은 그런 사람이잖아.
아름다워서 무례함이나 건방짐 따위는 용납되는 부류 말이야.
“민형이랑 떨어져서 그런 건가요?
단순히 그것뿐입니까?”
“네.”
“참 이상하네요.
친남매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네요.
이참에 말 좀 해보지 그래요.
당신과 수혁이, 어떤 관계입니까.”
“우린 정의 못해요.
그렇게 간단한 관계가 아니라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알 수 없다니 안타깝네요.”
“저한텐 말 편히 하세요.
같잖은 말은 하지도 마시고요.
사장님도 이거 해보셨어요?”
붕대가 친친 감긴 손목을 들어 까딱였다. 흉측했다.
네가 보지 않아서 망정이지.
“나? 내가 왜 해. 난 살기도 바빠.”
“하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피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거든.”
과거에 그는 뭐였을까. 뭘까.
살인청부업자? 아니, 그래도 지위가 있는데.
그가 내 손목을 흘끗 본다.
“그거 안 아파?”
“안 아프겠어요?”
“웃을 정도면 안 아픈 것 같기도 한데.
왜 그은 거야? 트라우마의 트리거라도 당겨졌나?"
입가 근육이 씰룩였다.
잘게 떨리는 얼굴을 사장이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상당히 억압적으로 자랐나 보네.
부모가 학대했나? 아니지, 너희 고아지. 기억상으론 그런데.
원장이 학대했구나.”
“그럴 리가요.
원장님이 착하게 대해 주셨어요.
좋은 분이셨죠.”
“폭력.”
그의 입에서 예민한 단어가 굴러떨어졌다.
그거 아니, 민형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눈빛이 변하게 되는 말들 말이야.
두려워서 제대로 쳐다볼 용기조차 없던 단어들이 뚜렷하게 살갗에 낙인을 찍었지.
“응, 마약, 성폭력, 매춘, 절도. 살인. 어라? 살인. 살-인.”
그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독심술이라도 배웠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에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아니, 민형아.
난 트레이에 담겼던 가위를 생각했어. 저만치 있었지.
나 혼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죽여야겠지 했어.
하지만 사장은 그러기엔 파급력이 너무 컸어.
“날 죽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내가 아는 친구들이 좀 많거든. 경찰도, 언론도.
게다가 이 병실 안에는 당신과 나밖에 없는데,
날 죽이고 나가면 누가 제일 먼저 용의자로 몰릴까요.”
그가 비웃었다.
똑똑한 새끼.
“아뇨.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그의 말대로 내가 불리했다.
백 퍼센트.
“상당히 똑똑한데?
하나, 둘, 셋, 넷, 넷? 아, 넷이나 돼?
대담하네.”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그의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라이트 훅을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하나 더 묻지. 민형이는 가담했나?”
“사람을 죽인 적 없어요.”
“짐승 같은 새끼들이었단 얘기네.
복잡해지겠어.”
“범죄 저지른 적 없어요.
민형이도, 저도요.”
“둘이서 완전범죄라.
네 번의 살인에 다른 범죄까지.
이야, 종신형인데?”
“그런 적 없다니까요."
등줄기로 땀이 쭉 흘렀다.
그도 알았을까. 내 절박한 거짓의 진실을, 진심을.
“나, 심리... 뭐, 그런 쪽으로 일했어. 무당은 아니고.
내가 말한 건 사실이야. 맞지?”
“아뇨, 틀렸어요.”
“민형이한테 물어볼까?
민형이라면 대답해주겠지.”
네가 할 대답은 뻔했다.
제가 다 했어요. 심이랑은 상관없어요.
넌 너무 착해서 나의 죄마저, 그 벌마저 받으려 할 게 분명했기에.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말해버렸다.
그는 독안에 든 쥐를 보는 것처럼 여유가 넘쳤다.
딸깍. 녹음기의 정지 버튼이 눌린 순간, 내가 몸을 굽혀 가위를 집어들었고, 동시에 사장이 내 몸 위로 겹쳐 눌렀다.
덕분에 몸을 돌려 사장을 찌르기 전, 리놀륨 바닥에 날이 꽂혔다.
그에게 깔린 채로 낮은 숨을 쉬었다.
으르렁대는 개새끼가 이럴까.
“언제까지 협박할 건데.”
“민형이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그는 나란 사람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마녀처럼 너를 빌미로 내게서 원하는 걸 얻어 가겠지.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내 몸이든 영혼이든 달라는 대로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대가로 상처가 나을 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그는 매일 찾아왔다.
내가 일어나기 전에 찾아와 내가 잠들면 떠나는 모양이었다.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지는 여우처럼 난 길들여지고 있었다.
내 생각과 다르게 나는 그에게 퍽 정이 들어 버렸다.
어쩌겠니, 민형아.
이제껏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누군가 그러면, 정을 주기 싫어도 줄 수밖에 없어.
너도 알잖아.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한 달 후, 돌아온 너에게는 운 나쁘게 유리컵을 깨서 그렇게 됐다고 둘러댔다.
“이거 봐, 흉졌잖아요. 조심하지. 속상하게.
누가 자살 시도했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네?
심이는 항상 걱정할 짓만 해요, 왜.”
“그러게.”
머릿속에는 말이 떠돌았다.
사장이 알고 있어. 우리가 살인자라는 걸.
오랜만에 보는 네 눈동자를 나는 차마 떳떳이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기운 없어 보인다는 네 말에 나는 대충 둘러댔다. 아프잖아.
네가 사라지면 난 또 손목을 그을지도 모르는데 다음 쇼 촬영이나 어서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긴 하지만, 네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입이 썼다. 널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럼, 또 한 달만 기다려요.
빨리 갔다 올게. 최대한 빨리.”
네 천진한 미소에 난 불안을 숨긴 채 웃어 보였다.
불안의 모가지를 손에 쥐면 대롱대롱 매달린 팔다리가 내 몸에 닿아왔다.
그때의 너는 그걸 몰라야 했다.
“갔다 와.”
출근하는 것처럼, 난 아무렇지 않게 되뇌었다.
교통사고로 한 달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고 싶었다.
이게 옳지 않다는 건 안다. 내가 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민형아.
네 어깨에 기대지 못하는 또 다른 한 달은 얼마나 길까.
사각거리며 과도가 껍질을 깎아 냈다.
끝없이 내려가는 나선을 따라 감정들이 접시에 내려앉았다.
“응. 심아, 다녀올게요.”
너도 출근하듯, 사과 한 조각을 들고 떠나갔다.
과도를 비틀어 쥔 순간, 또 사장이 들이닥쳤다.
민형아, 신기하지 않아? 어디서 감시라도 하고 있는 걸까.
“정신 차려.”
사장은 내 양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풋사과 냄새가 입안에 그득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참아냈다.
“알잖아요. 나 민형이 없인 못 살아.”
“죽으러 갔어? 다신 못 만나?
네가 살려고 죽였잖아. 죽으려고 죽인 게 아니고.
너 어른이야, 이제. 그만 악몽에서 깨어나야지.
민형이는 깨어났는데 넌 왜-”사장은 내 손에 들린 칼을 뺏었다.
그의 눈은 형형했다. 칼에 비친 햇빛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 너머로 나는 볼 수 있었다.
외로움, 증오,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는 나처럼 진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니 알 수밖에.
“줘요.”
“너 같으면 주겠어?
이건 해결책이 아냐.”
“해결책 따윈 없어.
내가 죽기 전까지는 안 끝나.”
“민형이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아.
그 애는 걔 삶을 살게 내버려 둬.
모르겠다면 내가 해 줄게.”
“어떻게요.”
그와 숨이 엉켰다.
희디흰 살결이 쓸리고 얽히는 광경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아름다웠겠지, 추했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네가 봤었더라면 알았을 거야.
내가 그의 감정을 알아챈 것처럼 그가 내 흉터를 깨물었다.
하얀 실금 위로 반달무늬가 새겨졌다.
수없이 많은 입맞춤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던 그를 아직도 기억한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왔다. 밤이 재가 되어 스러진다면 저런 색이 날까.
창밖으로 날이 밝는 걸 보며 그에게 안겨 네 것과는 다른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어젯밤의 기억을 탈색시키려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말대로 기억이 빛이 바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한 때 누군가를 죽였으면서, 나는 죽기 싫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웃기지.
내게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게.
웃기지, 민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