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자면 안 돼!”
커다란 손이 종대의 얼굴을 두어 번 세게 쳤다. 종대가 평소에 ‘저 손에 제대로 맞으면 죽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종종 했을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우이판의 손이지만, 이미 볼에서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인 종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스키장이 자리한 높고 험한 산 중턱 어딘가의 바위틈에서, 두 사람은 세찬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우이판의 긴 다리 사이의 종대가 우이판의 품에 옆으로 기대어 졸고 있었다. 우이판의 새파란 스키복과 종대의 샛노란 스키복이 몸집의 차이만큼 대조를 이뤘다.
“진짜 말도 안 돼. 한국에도 이런 일 있어?”
“....여기 있네.”
“Jesus."
우이판은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온 중국인인 그는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같은 과 동생 종대와 함께 계절학기 교양강의로 초급스키교실을 신청했다. 선배들의 정보에 의하면 학점은 거저먹기요, 운이 좋으면 여자 친구도 얻을 수 있는 보물 같은 강의라 하였다. 2박 3일간 스키장에서 수업을 듣고 간단한 실기시험을 친 뒤, 캠퍼스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필기시험만 치면 끝나는 꿈의 과목이란 말을 듣곤 망설임 없이 종대를 끌어들였다. 운동에는 자신 없다며 내빼려는 종대에게 ‘비용의 절반을 대 주겠다’ 고 까지 해서 데려왔다. 중국 대부호의 아들인 그에게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우이판과 종대는 강의를 들으러 간다기보다는 놀러가는 들뜬 기분으로 스키장에 도착했고, 곧바로 개인행동에 들어갔다. ‘초급스키교실’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강의는 스키도 처음 신어보는 초급자를 위한 것이었고, 우이판은 이미 못 타는 코스가 없는 실력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내가 더 잘 가르쳐줄게’ 라고 종대를 꾀어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씨이.. 괜히 왔어.”
“....미안.”
왕초보인 주제에 호기롭게 우이판을 따라 꼭대기로 올라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급격한 기상악화로 인해 그들이 올라선 직후, 그 코스로 올라가는 모든 리프트의 가동이 중단되었고 하나 둘 주변 사람들이 코스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우이판은 아직 눈을 다지지 않아 개방도 하지 않은 상급자 코스로 종대를 끌고 가 훈련을 강행했다. 겁에 질린 종대를 놀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도 잠시, 넘어지는 것조차 서툰 종대는 다리를 삐어버렸고 날아간 스키 한 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보라는 한 치 앞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고 당황한 우이판은 일단 종대를 들쳐 매고 눈에 보이는 바위틈으로 들어가 앉았다. 출입금지구역이라 지나가는 패트롤도 없었다. 스키장에서 조난당한, 그야말로 낭패인 상황이었다.
“형... 폰 안 가져왔어?”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바보.”
종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우이판역시 멋쩍은 웃음을 띠며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battery 없어.”
“헐.”
“니 폰은?”
“...방에 놔두고 왔어.”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어떡하지?”
“아, 몰라! 형 때문에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왜 아직 개장도 안 한 코스로 날 끌고 와? 아니 그전에! 왜 꼭대기까지 데려왔어? 아니, 아니, 애초에 왜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계절을 듣게 해!!!”
“미안...”
우이판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종대는 여전히 분이 가라앉지 않아 씩씩대면서도 약간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다 눈을 내리 깔고 있던 우이판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종대를 똑바로 쳐다보자 움찔했다. 우이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너 억지로 수강신청 한 거는 아니잖아...내가 돈 내준다고 해서 잠깐 고민하다가 여자들 많다는 얘기 듣고 바로...”
“지금 그게 문제냐?!?!”
종대가 소리를 빽 지르자 이번에는 우이판이 움찔했다. 곧바로 다시 풀이 죽는 우이판은 한 마리 대형견 같았다. 우이판의 머리위로 축 처진 귀가 보이는 듯해서 종대는 자신이 너무 추워서 드디어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종대는 다시 졸리기 시작했다.
“형, 나 자꾸 졸려. 이제 추운지도 모르겠어.”
“야, 자면 안 된다니까!”
“도저히 걷지도 못 하겠고... 형이 나 업고 내려가면 안 돼? 형아 힘 세잖아.”
“너 업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근데 날씨가...”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돌풍이 몰아쳤고 우이판과 종대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바위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이 내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서로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바람이 약간 잦아들자, 몸을 떼고 종대의 얼굴을 본 우이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종대가 잠들어있었다.
“종대야!! 김종대!! 일어나! 야, 김종대!”
종대를 마구 흔들며 소리치던 우이판이 점차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죽으면 안 돼....흐윽....너한테 고백도 못 했는데....종대...흑...내가 미안...흑....형이 너 좋아해서 여기도 데려왔어....”
“........”
“너 처음 봤을 때부터....흐윽...흑...계속 좋아했어...흐읍...니가 나 싫어할까봐 고백도 못 하고...흑흑...계속...혼자...윽.....눈 떠...종대야....으흑...”
종대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우이판이 괘씸해서 조금 골려주자는 생각에 자는 척을 했는데 엄청난 고백을 들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서럽게 엉엉 울고 있는 우이판의 눈물이 얼굴위로 뚝뚝 떨어졌다. 눈을 뜰 타이밍을 놓쳐버린 종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미 잠 따윈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혼란스러운 종대의 머릿속에 우이판과의 지난 일들이 조각조각 떠올라 거대한 모자이크 그림이 되어갔다.
[저기, 조 아직 안 정했어? 나랑 같이 할래? 이름이 뭐야?]
[나는 우이판. 중국에서 왔어. 아, 나 과제 열심히 해.]
[나도 공강인데. 밥 사줄까?]
[이런, 공강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괜찮아.]
[그거 내가 해줄게.]
[내가 가르쳐줄게. 나 Canada에서 살았어.]
[종대, 기숙사 살아? 무슨 관이야? 놀러가도 돼?]
[저 사람들이랑 친해? 얼마나?]
[그냥, 사면서 같이 샀어.]
[다른 친구? 있어. 종대가 제일 편해서.]
[내가 원래 사주는 거 좋아해서.]
[감기 걸렸어? 내 목도리 해. 나는 안 추워.]
[종대, 나랑 제일 친해?]
[미팅? 나도 같이 가.]
[헤어졌어? 내가 쏠게. 오늘 술 마셔.]
[여자친구? 필요 없어.]
.......
빠르게 지난 우이판의 언행을 되짚던 종대가 마지막으로 ‘그 중국인 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는 선배 민석의 장난스런 말을 떠올렸을 때, 종대의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더니 꾹 누른 채 떨어지지 않았다. 종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평소 필요이상으로 반듯하다고 여겼던 우이판의 옆얼굴이 보였다. 종대는 비명을 지르며 우이판의 얼굴을 밀쳐냈고 입술을 뗀 우이판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종대를 바라보았다. 이내 당황한 우이판이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변명거리를 찾는 듯 눈을 굴리는데, 눈물로 그렁그렁하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종대는 그 모습이 바보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러자 우이판은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종대를 와락 안고는 말했다.
“죽은 줄 알았어! 엉엉”
“나 안 죽었거든?”
우이판이 워낙 서럽게 울어서 종대는 좀 전의 고백도 잠시 잊고 등을 토닥이며 울음을 달랬다. 바로 그 때였다. 바위 뒤편에서 새빨간 스키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더니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써 머해.”
“타오?”
우이판과 같은 중국인 유학생인 타오였다. 우이판은 아직 울음을 그치지 못 한 채 타오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눈보라는 잠잠해져 있었다.
“둘이 없어써 전부 걱정 해써요. 왜 여기 이써!”
타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둘을 쏘아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서툰 발음 탓에 분위기는 잡히지 않았다.
“나 다리도 다치고 스키도 잃어버렸어.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못 내려가고 있었어.”
“.....왜 쑥소 바로 옆에써 이러고 이써.”
“뭐?”
우이판이 멍하니 타오를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 타오가 나타난 바위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믿을 수 없게도 불과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숙소 건물이 있었다. 털썩 주저앉은 우이판을 타오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고 모두가 그들을 찾았지만 개방된 어느 코스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눈보라 또한 심해져서 잠시 수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눈보라가 조금 그치고 타오가 본격적인 수색을 위해 숙소를 나섰을 때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를 의아하게 여겨 이곳으로 와 두 사람을 발견했다고 했다.
종대가 우이판의 등에 업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이판은 전혀 말이 없었다. 평소 멋진 척이란 척은 다 하던 우이판의 모습을 떠올리며 종대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입가에 웃음을 띤 종대가 우이판의 귀에 속삭였다.
“형, 나 아까 들었어.”
우뚝. 우이판이 걸음을 멈췄다.
“나 이제야 형이 좀 사람 같아 보여.”
“...뭐?”
“형은 다 잘 하잖아. 근데 아까는 좀 귀여웠어.”
“...놀리지 마.”
“...나 형이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신경써줬는지 알아.”
“......”
“전혀 형이 징그럽다거나 거부감 느껴지거나 하지가 않아. 이상하지.”
“...내가 싫어지지 않았어?”
“왜 싫어져?”
“나는...진심이야.”
“나도 농담 아니야.”
“......”
“생각해볼게.”
스키들을 들고 저만치 앞서서 걸어가던 타오가 빨리 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우이판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점점 더 발걸음이 힘차게 변했다. 숙소 입구에 화가 난 표정의 교수들이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모습이 보였음에도 종대와 우이판은 둘 다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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