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수야, 누나가 지금 과제때문에 바빠서 그런데 요 앞에 에뛰드하우스에서 핸드크림 하나랑 돌돌 마스카라 하나만 사오면 안될까? "
아 나 고남순이랑 이따 롤하기로 했는데. 흥수는 투덜거리면서도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외투를 집어들었다. 축구의 꿈을 강제로 포기하게 되서 방황한 자신때문에 학창시절을 자신 뒷바라지로 보낸 누나임을 알기에 별 말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주말이라고 늘상 신던 운동화를 빨아 널어서 남은 신발이라고는 고남순이 몇년 전에 샀다던 촌스러운 유행지난 운동화 뿐이었다. 흥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작아서 잘 안들어가는 운동화 안에 발을 구겨넣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춥다 추워.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서자마자 보이는 화장품가게. 매장 여기저기 보이는 핑크색에 흥수는 잠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여자들은 진짜 이런게 뭐가 좋다고 이렇게 사람이 많나 몰라. 흥수는 고민 끝에 손잡이를 잡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 어서오세요, 왕자님! "
뭐요? 왕자님? 여태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들어본적 없고 또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없던 말에 흥수는 그 자세로 굳어있었다. 손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어라 아무도 없네. 흥수는 고개를 조금 더 밑으로 내리니 자신을 올려보다는 알바생을 발견했다. 하얀 셔츠에 핑크색 앞치마. 동글동글한 인상이 선해보였다. 물론 자신에 비해선 작았지만 그래도 키가 큰 편인 남학생은 갓 중학교를 졸업한 티가 났다.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려나. 흥수가 재규의 왕자님 발언에 잔뜩 굳어 이런저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을때 재규 역시 제 눈 앞에 보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에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천하의 미친미르가 이 핑크빛 가득한 화장품 가게엔 무슨일로. 빨간 머리는 어디가고 저 단정한 머리색은 뭐지? 아니 그것보다도 일단 8일간의 방학동안 편히 놀려고 제 딴에는 굳게 마음먹었었는데 어쩌다보니 친척 형 대신 아르바이트를 잠깐 해주게 되었지만. 일단 수신고등학교의 학생은 과외를 비롯한 모든 아르바이트는 금지였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안봐도 바로 스트레이트 징계방 행일게 분명했다. 징계방에는 한번도 가본적 없었는데 이렇게 가게되나. 안그래도 방학식날 미친미르가 박무열 똘마니라고 품에 가두고 괴롭히는걸 최치훈이 빼줘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온터라 안그래도 벼르고 있을텐데!
" 미미야? 아 그게 어떻게 된거냐면! "
미미? 흥수는 왕자님에 이어 미미라는 닭살스러운 애칭으로 자신을 부른 소년의 말에 뒷목잡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고남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났어! 멘탈 붕괴 직전에 이른 흥수 표정을 보고 재규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날 어떻게 넘길까 생각하는건가? 그러고보니 나 지금 핑크색 옷에 꼴이 가관일텐데. 설마 이걸 학교 전체에 소문내는거 아니야? 거기다 하필 이 화장품 가게 인삿말이 여자는 공주님. 남자는 왕자님이라 들어올때 무의식적으로 왕자님이라고 인사한 것 같은데! 이걸로 평생 놀려먹는거 아니야? 난 망했어. 재규는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애초에 수신고로 전학가는게 아니었어! 그냥 가화고에 있었어도 SKY대중에 하나는 골라 잡았을텐데. 재규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울기 일보 직전의 표정을 짓자 흥수는 집 나간 정신이 점점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 저기… 저 아세요? "
" 에엑? "
뭐지 저 착한 말투는. 재규는 드디어 미친미르가 정신줄마저 놓았다고 생각했다. 잘 보니 신발도 미르의 취향이 아닌 초등학생도 안신을만한 유치한 운동화인데.
" 미미야 어디 아파? 나 이재규. 기억안나?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박무열 똘마니 가만 안두겠다고 나한테 협박문자 보내고 막 그랬잖아. "
재규의 발언에 흥수보다 매장 안이 들썩였다. 어머 쟤 인상이 험악하니 일진인가보네, 저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 착해보이는데 역시 요즘 애들이란. 본의아니게 착한 애를 괴롭힌 나쁜 애가 되어버린 흥수는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아이고 두야. 내 예상이 맞았어. 이건 고남순 양 싸대기를 후려칠 거물이네. 일단 사태를 수습해야 할것 같아서 자신의 눈 앞에 손을 흔들어대며 정신차리라는 둥 드디어 미쳤냐는 둥 주절거리는 재규를 바로잡아 세웠다.
" 저기 미안한데, 나는 그 미미인가 뭔가하는 애는 아니야. 나는 승리고 2학년 2반 박흥수고 누나 심부름으로 화장품을 사러 온건데. "
아니 미르양반 이게 무슨소리요? 재규는 순간 흥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에 흥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으려 발신인을 보니 핸드폰 중앙에 떡 하니 보이는 [미미] 라는 글자에 핸드폰을 놓칠 뻔 했다.
' 야! 똘마니! 너 누가 내 문자 씹으래! 니가 아주 죽고싶어 환장을 했구나? 오오라- 어디 한번 갈때까지 가보자 이거지? 5일 뒤에 학교에서… '
" 미미…야? 너 지금 어디야? "
' 당연히 조염병네 집에서 한잔 하고 있지. 왜 너도 와서 한잔 콜? 그전에 일단 저승길 예약은 감수하고와라- '
" 아니 지금 내 앞에… 아니야 끊을게. "
재규는 일방적으로 미르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럼 이사람은 미친미르가 아니란 말이잖아? 허, 참 정말 닮았네. 도플갱어끼리 만나면 죽는다던데 미친미르를 여기로 오라고 해볼까. 그럼 내가 여기서 일하는게 들키려나.
" 실례했습니다. 친구랑 많이 닮아서… 어느 제품 찾으세요? "
" 아 음 돌돌 마스카라? 였나 그거랑요. "
흥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규는 마스카라 코너로 이동해서 핑크빛 소녀느낌이 물씬 나는 마스카라를 흥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마 이거 말씀하시는걸꺼에요. 생긋생긋 웃으며 아까와는 다르게 묘하게 기분 좋아보이는 재규를 잠시 보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 핸드크림 사오라고 하던데. "
" 아, 잠시만요. "
큰 키에 맞지 않게 약간 엉성한 면이 없잖아 보이는 알바생의 뒤를 따라 핸드크림 코너로 가니 종류가 장난 아니게 많았다. 부엉이 모양부터 해서 평범한 모양도 있었고. 대체 어느걸 골라야 할지 눈 앞이 캄캄했다.
" 저기… 어느게 제일 잘 팔려요? "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친척형 대신 하루만 잠깐 해주는 건데. 그렇게 말했다간 당연히 아르바이트는 해고겠고. 저야 물론 상관 없지만 친척 형에게 당할 후폭풍이 두려워 재규는 급하게 핸드크림을 훑었다.
" 아마 이거…일걸요? "
재규가 소심하게 가르킨 핸드크림은 얼핏 보면 병아리 같기도 한 노랑색의 올빼미 핸드크림이었다. 흥수는 알바생과 핸드크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묘하게 닮았네. 흥수는 재규가 고른 핸드크림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거 계산이요.
" 30% 할인이라 총 9800원입니다~ "
" 여기요. "
흥수는 주머니속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진 지폐를 내밀고선 누나가 부탁한 마스카라와 핸드크림이 담긴 작은 쇼핑백을 들고 문 밖을 나섰다.
" 안녕히 가세요. 왕자님! "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재규? 라고 했던가. 뭔가 어딘가 엉성한 알바생의 인사를 받고 매장에서 나왔다. 오예 하나님 드디어 저 지옥에서 저를 해방하였나이다. 아직도 등 뒤에서 번쩍이는 핑크색 불빛들이 소름끼칠 지경이었다. 다신 저기 안가야지.
어 음.. 안녕하세요ㅋㅋㅋ!
요즘 학교 보면 묘하게 화크 생각이 나길래 써본 학교 X 화크 크로스오버 커플링 흥수재규입니다~
갑자기 에뛰드 하우스의 독특한 인사말이 생각나서 써봤습니다ㅋㅋㅋ
야심한 새벽에 올려서 아무도 안읽으시면 어쩌나 싶네요 그럼 저혼자 즐겨야죠 뭐...ㅠㅠ
다음편은 금방 들고 오겠습니다. 미르도 출연시킬까요?!
덧 . 여기서 화크애들은 8일간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방학을 맞았고, 8명 모두 원래 친한 사이로 가정했을때입니다.
재규의 미미드립은 실제 홍종현이 김우빈한테 촬영장에서 불렀던 애칭을 슬쩍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