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문을 열고 밟히는 눈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남들은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을 지나가면서 그렇게 좋아하던데 윤호는 영 그렇지만은 않았다. 까만 구두에 하얀 눈이 점점이 올라앉는 것도 못마땅해 조금 신경질적으로 발을 털어내고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분명 어린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새벽부터 남의 집 앞 골목에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은 꽤 자란 남자였다. 적어도 뒷모습은 그래 보였다. 윤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꼬마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도 시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 보여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 지 모르겠다. 그 사이에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
"..."
"안녕하세요."
"...어, 아.. 네."
윤호는 그 순간, 재작년 여름 결혼한 제 친구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떻게 만났냐는 장난 섞인 물음에 웃으며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첫눈에 반해서 결혼까지 왔다고. 그리고 쉽게 깨달았다. 저도, 이 남자에게 반해 버렸다는 것을.
참 흔하고 뻔한 말이지만 운명이라고 느꼈다. 유치할 정도로 두근대는 가슴을 인식한 순간 윤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같이 눈사람 만들래요?"
"네?"
"눈사람이요. 제가 사실 당근으로 코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근이 다 떨어졌어요. 실례지만... 당근 좀 갖다 주실래요?"
하얗게 웃는 남자를 멍청하게 쳐다보며 윤호는 생각했다. 당근? 그깟 거 천만 개도 사다 줄 수 있다. 그런데 갖다 달라니, 난 당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죄송한데... 집에 당근이 없어요. 사, 사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요 앞 슈퍼 있죠? 거기 가서 김재중이 당근 맡긴 것 좀 달라고 하시면 돼요."
당근 맡긴 거라고? 당근을 맡겼다고? 슈퍼에 당근을 맡겨 놔? 뭔지 몰라도... 귀엽다. 대체 눈사람을 얼마나 만드려고 당근을 맡겨 놓기까지 했을까. 아무튼 첫 만남부터 반하고, 졸지에 당근 심부름까지 하게 된 윤호는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 이미 콩깍지가 몇 겹은 씌인 듯한 눈은 즐겁게 골목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김재중인가? 이름도 귀엽잖아?
팔불출 연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