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의 비밀 上
by. 달콤한 망개
박지민은 항상 그랬다. 모진 말에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박지민을 다그쳐도 보고 타일러도 보고 매달려도 봤지만 그냥 웃기만 할 뿐 이 바보는 자기가 얼마나 험한 세상에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맨날 당하고만 살리가 없지. 진정 본인이 남에게 베푸는 호의만큼 과연 자기 자신에게도 그 호의가 돌아올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지. 누구에게나 웃고 다니는 얼굴도. 남이 상처 입는 건 못 보면서 본인이 상처 입는건 마냥 괜찮다는 말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다 퍼주고 있는 흔히들 말하는 그 호구같은 성격도. 하나같이 다 눈엣가시 였으나 무엇보다 가장 짜증나는 건 박지민이 아닌,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7년 째 짝사랑하고 있는 나, 김여주라 할 수 있겠다.
"...야, 박지민. 쟤 너 여자친구 아니야?"
밥을 산다는 녀석의 말에 과제를 하다 말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을까, 간만에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나 싶더니 갑자기 나타난 의외의 인물에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아... 오늘 친구 만난다고 그러던데."
"친구?"
누가봐도 다정하게 손을 꼭 붙잡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는 남녀는 친구가 아닌 연인사이라 보는게 맞았다. 남자친구 연락은 다 무시하면서 맨날 친구 만난다는 카톡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박지민의 여자친구에게 화가 치밀수록 애꿎은 박지민한테만 모진 말을 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박지민과 함께 있을 때는 그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기피하기도 했고. 결국 날선 내 말에 상처 받는 건 박지민 혼자일게 분명했기에.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리는 박지민이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박지민 멱살을 쥐어틀고서라도 당장 헤어지라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싶건만 박지민 성격상 헤어지기는 커녕 지 바람난 여친을 열심히 싸고 돌게 뻔했다. 어떻게 만나는 여자마다 그 모양인건지 이쯤 되면 박지민 인생에 마가 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하나같이 저를 두고 바람 나는 여자들만 만나면서 꼴에 지 여친이라고 감싸고 부둥부둥 거리는 박지민이겠지만.
"여주야, 뭐 먹을래? 오늘 내가 사기로 했잖아. 먹고 싶은 거 골라."
누구는 지금 속에서 열불이 나는 구만. 정작 당사자는 머릿속에 온통 밥 생각 밖에 없나 보다. 그래 밥이나 먹자. 한숨을 내쉬며 메뉴판 가장 위에 위치한 스테이크를 손으로 가리켰다. 연한 육즙이 배어나오던게 입맛에 꼭 들어 맞았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난 이거 먹을래. 넌 뭐 먹을래?"
"당연히 너랑 같은 거."
"하긴, 너한테도 맛있겠다. 이거 저번에 맛있게 먹었었거든."
"...저번에?"
"응,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왜 한 번 동아리 늦게 끝났을 때 석진 선배가 수고 했다고 밥 한 끼 사겠다고 하셨는데 그 때 여기서 먹었었거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보고 있던 메뉴판을 돌려 박지민에게 넘겼다. 음료는 박지민 먹고 싶은 대로 따라가려고 그런건데 어째 메뉴판을 건네 받는 박지민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였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미묘한 표정 변화였지만 박지민을 올해로 12년째 보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박지민은 이유는 몰라도 분명 나한테 서운한거다. 입을 꾹 다물고 애꿎은 메뉴판만 뒤적거리는 녀석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기가 서운한 티를 낸 건 죽어도 모르고 왜 웃냐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게 더 귀여운 건 비밀이다. 통통한 볼살을 한 번 꼬집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박지민 뒤로 보이는 녀석의 여자친구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박지민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앞에 나란히 앉은 남자와 손을 꼭 붙잡고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정신이 없다. 저쯤 되면 진짜 박지민이랑 헤어지고 싶다고 공개 시위라도 하는 것 같다. 멍청한 박지민은 지 뒤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좋다고 실실 웃고만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안 터지겠냐고요. 짜게 식은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박지민이 메뉴판을 덮고 뒤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아 젠장 하필 타이밍도 거지같다.
"지민아!!"
반사적으로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랐는지 박지민이 그대로 들고 있던 메뉴판을 떨어뜨렸다. 그 틈을 타 박지민이 떨어뜨린 메뉴판을 잽싸게 낚아채서는 디저트 쪽을 펼쳤다. 달달한 건 죽어도 안 먹는데... 박지민이 고개를 돌려 자기 여친이 외간 남자랑 찐한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을 정면으로 보게 냅두느니 차라리 달달한 걸 먹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무리 얘가 만나는 여자마다 바람이 났다지만 그래도 직접 바람 현장을 목격하는 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올게 분명했다. 게다가 아직 자기 여친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데 어떻게 내 손으로 직접 저 장면을 보여주겠냐고요... 스테이크고 나발이고 소주나 들이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진짜 김여주 남자 복도 지지리도 없지. 어쩌다 이런 녀석한테 코가 꿰여가지고는. 아직 주문도 안 했는데 그냥 박지민을 데리고 아는 곱창집이나 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찰나 귀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박혀왔다.
"자기야, 나 그냥 지금 만나는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자기한테 올인할까?"
"아 같은 과 동기라는 그 새끼?"
"응응 걔. 아니이... 내가 막 이것저것 말해줘도 반응도 시큰둥하고 자기처럼 나한테 사랑 표현도 많이 안 해주구..."
...저게 미쳤나. 박지민이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미친년아, 내가 박지민이 너한테 애정공세 한 걸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본게 몇 번인데. 바람은 필대로 다 펴놓고 마치 이 모든 건 박지민의 잘못이라는 듯 떠넘기는 태도가 아주 볼 만했다. 진짜 박지민 여자 보는 눈 없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하나같이 질린다 질려.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박지민의 험담을 늘어놓는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든 박지민 눈에서 눈물 나는 걸 뒤로 미뤄보려고 했건만 이건 도대체가 박지민 친구로서도 용납이 불가한 일이다. 진짜 박지민 연애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끼어들고 싶었는데. 속으로 무수히 많은 욕들을 쏟아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야!!! 한국대학교 수학교육과 15학번 박지민!!!"
"...여주,"
"너 나랑 사귀자!!!!!"
그리고 그대로 박지민의 옷깃을 부여잡고 입술을 부딪쳤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뭘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뒷편도 있습니다. 윤기 글인 N극과 S극의 연애방식처럼 두 편 혹은 세 편 정도로 마무리가 될 것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제가 다 부끄럽죠? 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여주... 오구오구 우리 여주 입술박치기 한 기념으로 그대로 지민이 겟또하시길 바래요. 눈치 채신 분 계시겠지만 여주가 굳이 지민이라고 안 부르고 한국대학교 수학교육과 박지민이라고 부른거는 같은 과인 지민이 여자친구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죠. 지민이 여자친구 (라 읽고 나쁜X이라 읽는다... ㅂㄷㅂㄷ) 가 자신과 지민이가 입을 맞추는 걸 보게 하는게 여주의 계획! 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우리 다음화에서 다시 만나는 걸루!! 날씨 오늘 진짜 장난 아니었죠 ㅠㅠ 항상 그랬듯이 마무리는 건강 조심으로!! 모두들 감기 조심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