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전히 썩어빠졌다. 한없이 약한 젖먹이의 심장에 파고들어 그 속을 갈기갈기 찢어 삼키는 벌레처럼. 여주는 민형과 마주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여주의 부르튼 입술 한가운데에서 포슬대며 비어져 나온 핏방울을 핥으며 뜨겁게 입을 맞추던 재현은 생각했다.
나는 완전히 썩어빠졌다. 차라리 김여주가 내게서 썩은 영혼의 향기를 들이쉰다면 좋을 텐데.
민형은 에일 듯이 차가워진 바람이 휘도는 저수지를 등지고 돌아섰다.
아침 7시 반이 30초가량 지난 후, 아직 환해지지 못해 어두컴컴한 공기를 비추던 가로등이 홀연히 꺼지는 시간이었다. 하루에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김여주가 눈먼 쥐새끼처럼 성실하게 들락날락대는 다 부서진 폐건물은 이곳에서 정확히 북쪽으로 두 블럭하고 서쪽으로 세 건물, 그 자리에 있는 작은 골목 안으로 스무 걸음을 들어가면 나왔다. 상당히 깊이 숨겨져 있는 장소였지만 민형에겐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징그러운 괴물 취급을 받아도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는 재주였다. 기계처럼 길을 외운다. 그 덕에 민형은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열댓 번은 넘게 넘겼다. 그런데 하필 길을 찾아 들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게 되었다. 좆같네. 민형의 입에서 씹듯이 내뱉은 욕설과 함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 여주가 만든 담배였다. 민형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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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추취! 저리 꺼져! 여기저기서 희뿌연 연기와 함께 중국어와 조선족 억양이 섞인 욕설이 난무했다. 시장 한복판이었다. 억세게 밀쳐 대는 사람들을 날 선 눈으로 지켜보던 민형은 일하다 말고 저려 오는 다리를 질질 끌고 잠시 쉴 자리를 찾던 길에 그녀를 보았다. 지하실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단순히 장을 보러 나왔다면 좀처럼 다닐 일이 없는 곳이었다. 여주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평소보다 배는 차갑고 어두운 낯으로 뒤편을 돌아보았다. 거의 달음박질치듯 빠른 속도로 걸으면서도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도 그녀는 발소리가 작았다. 이상한 버릇이었다.
민형은 막 발견한 나무 의자에 올라서서 여주가 걸어간 방향을 좆았다. 그의 머릿속에 개미굴처럼 잔뜩 뻗어 있는 시장의 복잡한 통로들이 그려졌다. 김여주가 방금 사라진 모퉁이에는 짝퉁 가방을 파는 가게와 약방, 복권 집, 빵집이 늘어서 있다. 그 골목을 따라 앞으로 계속 걸어간다면 후리와가 있는 길목을 제외하고는 저수지와 이어지는 하수도 뿐이다. 후리와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길이 없다는 말이었다. 여주는 계속해서 지하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 목적지를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고. 민형의 혀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둥글게 굴렸다. 빵집의 바로 옆에 나 있는 작은 골목 새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하나 있긴 하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통로였다. 민형은 사고 이후로 자주 저리는 발목을 탁탁 털어내고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여주를 앞지를 수 있을 법한 길을 두어 개 알고 있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열심히 쫓아왔건만, 기어코 보게 된 꼴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름한 건물에서 걸어나온 여주는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느물대는 재현을 보고 구세주를 본 얼굴을 했다. 외진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다. 마땅히 의심해야 할 만한 가까운 거리. 그런데도 여주는 재현에게 헐벗은 목덜미를 내어주었다. 재현이 틈새 하나 없이 잠기어 있던 창문의 경첩을 일치감치 뜯어내고 그 창틀 끝에 편안히 앉아 내부를 전부 들여다보았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김여주는 정재현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김여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좋았다. 마약을 몇 자루나 만들든, 우리를 다 죽이고 도망치려고 하든, 상관 없었다. 그 애가 원한다면 그까짓 거 그냥 죽어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어려울 건 없었다.
단 하나, 재현을 좋아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재현을 좋아해서 여주가 산산조각나고, 그걸 본 정재현이 자해하는 걸 눈 뜨고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여주의 감은 눈은 무슨 의미일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나에게 내리는 벌? 민형은 온몸이 그늘에 전부 가려져 발끝만이 주황색 불빛으로 환해지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눈을 감았다. 바늘 같은 찬바람이 볼을 서른 번쯤 스친 후 다시 뜬 눈앞에는 여전히 민형을 등진 재현과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밤 늦은 오후의 기억이었다. 저녁 7시 반이 되기 30초 전, 반투명하고 어둑어둑한 공기에 붉고 노란 조명이 고명처럼 얹어지는 시간이었다. 하루에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큰 세상에 오롯이 혼자 살아서 숨을 들이쉬는 기분. 민형은 그 시간들을 사랑했다. 두 불청객이 그의 순간으로 곧장 파고 들어오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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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 가지 오류라면 눈치 빠른 아이들이 슬슬 정신을 차려 간다는 점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눈속임’의 범위에는 그들도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태일은 깊게 빨아들였던 담배를 들여다보았다. 비소. 타들어간 끄트머리를 들어 종이가 주변까지 다 타버리도록 멀쩡한 새 담배의 옆면을 지졌다.
그렇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결정이 바스라진 담뱃잎 사이에 모래알 마냥 박혀 있다.
한두 개비 갈라서 육안으로 보는 것 가지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비소는 태워 보아야 의심이라도 해볼 수 있지. 머리 잘 썼네. 여주가 담배를 선택한 이유는 담뱃대와 함께 증거를 태워 인멸해 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새하얀 가루 상태의 비소는 가열하면 빛나는 결정이 되어 버린다. 마약을 손으로 만지고 들이켜고 삼키던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멀쩡한 담배처럼 속이고 있다가 복용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지도록 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긴 했다. 모든 일에는 확실한 게 좋았다. 의심으로 시작한 일은 잔바람만 불어도 초 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직접 입에 대고 담배를 태웠다. 김여주는 내가 아무런 의심 없이 제가 만든 담배를 피운다고 생각했겠지만 피운 것은 단 세 모금이었다. 나머지는 타오르는 동안 전부 관찰하는 데 쓰였을 뿐이었다. 아주 잠깐, 나를 향한 김여주의 표정이 한 순간도 잊지 못한 그 얼굴과 닮아서 나도 모르게 지난날의 감정이 비어져 나왔지만 모두 일시적인 착각이었다. 시간은 해결해주지 못할 쓰라림에도 언젠가는 익숙해지리라, 태일은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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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일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거의 확실했다. 지하실 외벽의 담 아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담에 매달려 숨어 있던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날 밤이었다.
약효가 듣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풀린 듯한 눈매. 그 날에만 두 번째 보는 눈이었다. 한 모금밖에 하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서 비비듯이 어루만지며 태일은 여주를 바라보았다. 옥상 난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였다. 분명 처음 보는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 평소의 너그러운 태일답지도, 낮의 시릴 듯한 태일답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얼굴이었다. 시리고 애틋하게 보이는 눈매가 노려보듯 여주를 향했다. 눈 아래로 들고 있던 담배 끝에서 작게 불꽃이 튀었다.
“정재현을 좋아해?”
“대답을 해야 하나요?”
“굳이 못 해줄 이유가 있나?”
“굳이 들어야 할 이유는?”
“비참하게 만드네. 말 못할 거라면 그만 둬. 충분히 대답이 됐어.”
“…….”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나는 아직 필 담배가 이 만큼이나 남았는데. 이 분위기에 나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난 상관 없고.”
난간에 위태롭게 마구 놓여진 새 담배갑을 흘끗 가리킨 태일의 날선 눈매가 주황색과 회색의 장막 뒤에서 사그라들었다.
여주는 그 눈빛을 묻고 싶었다. 이제 나한테 본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날 죽일 건가요? 뿌연 담배 연기 뒤편에서 칙-, 하는 소리가 났다. 제 몫을 다한 담배를 뱉어내고 길다란 새 것을 입술 끝에 문 태일의 얼굴이 방금 켠 라이터 불빛에 주황빛으로 빛났다. 선이 고운 얼굴과 달리 마디가 굵고 상처가 많은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 담배. 오늘만 몇 대를 피운 거예요? 그러다 죽어요.”
여주에게서 관심을 아주 끈 듯한 모양새로 난간 아래쪽의 얼기설기 얽힌 골목들을 바라보고 있던 태일이 놀랍다는 눈으로 여주를 보았다. 바람에 헝클어진 뒷머리를 헤집어 제 모양을 만들던 손이 재빠르게 입술에 물려 있던 담뱃대를 가져갔다.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태일이 손에 들린 담배를 들어 보였다. 이거?
“죽는다고 겁 주는 거야? 여기 사는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그런 말에 겁을 먹을 것 같아? 아직 순진하긴 하구나.”
“담배를 그렇게 피우면 당연히 죽죠. 오빠가 아무리 튼튼해도 단명하는 건 못 피해 가요. 알고 피우는 거죠?”
“아, 당연하지. 더 단명할 수도 있고, 다 알고 피우는 거지요. 너도 알잖아.”
“네?”
“응? 뭐가. 너도 아는 걸 내가 모르겠냐는 말이지.”
웃음기가 만연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너스레를 떤다. 완전히 누그러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공격적인 눈빛이었다. 여주의 눈이 재빠르게 태일의 손과 옷깃 근처를 스쳤다. 그는 확실히 무언가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겠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직접 만든 담배를 모른 척하는 게 가소롭다는, 어쩌면 가증스러워 하는 듯한 얼굴로 보였다.
이 자리에서 등을 보여선 안 된다. 여주는 천천히 태일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지 모르는 거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늘 옷 안의 몸과 가장 가까운 곳에 내밀히, 혹은 등 뒤에 은근히 무기를 숨기곤 했다.
“아무 사이 아니에요.”
“뭐가?”
시선을 다시 여주에게 돌린 이후 한 순간도 떨어진 적 없이 붙박여 있었던 눈매가 다시 부드럽게 접혔다.
호의적인가?
새파란 불꽃처럼 차갑고 또 뜨겁다. 오히려 처음 보았을 때의 미지근한 온기보다 분명히 호의적이다.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표정이었다.
“정재현이랑. 다른 애들이랑도.”
“그래?”
완전히 가까워져 난간에 걸터앉은 태일과 마주선 작은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렸다. 즐기는 듯한 얼굴. 태일의 입술 새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담배가 여주의 입술에 물렸다.
“할 줄 아네. 예상은 했지만.”
창백한 낯이 태일의 얼굴을 피해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안 피우는 거지 못 피겠어요. 최대한 태연하게 호흡하려 애썼다. 태일이 그랬던 만큼, 여주에게도 수명을 조금 잃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너도 카운트다운 시작이네. 단명. 같이 하자.”
같이, 하자.
음절마다 힘주어 말한 입술이 또 길게 벌어지며 웃었다. 이제는 여주의 입술에 걸려 있던 담배가 태일의 손끝에서 처참히 뭉그러졌다. 어깨 너머의 허공에 우그러든 담뱃대를 던진 태일이 여주의 허리를 끌어안아 휙 당겼다. 어느새 태일의 무릎 사이에 들어와 선 여주에게 빠르게 입을 맞추는 태일의 얼굴이 묘한 각도를 띠었다.
간절한 신앙처럼, 그녀의 입술에 닿기 위해 들린 턱끝이 간신히 애정을 갈구하는 소년의 모양을 했다. 무기는 없었다.
“보여지는 게 전부는 아닌데.”
“뭐?”
“아니야? 너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잖아. 보이는 대로 생각하면 착각하기 쉽다고.”
“갑자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너 또 약 했어? 이상한 거 보여?”
“이제 그만 해도 돼. 아무도 너 안 죽일 거니까.”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봐. 그렇게 비꼬지 말고.”
“너 한국인이지.”
“…….”
“열 두 살이었나, 열 세 살이었나. 기억해? 키가 한 이쯤 왔었나.”
자리에서 일어선 민형이 갈빗대 옆에 손을 붙이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시장에서 지하실로 향하는 긴 계단의 중간쯤이었다.
“난 자주 여기에 앉아서 아래를 내다 봐. 골목 생긴 게 다 보이거든. 어릴 때부터 그랬어.”
“너……”
“중앙 시장은 저 반대편인데.”
“…….”
“이 쪽이야.”
“…….”
“다 왔다.”
“이민형. 그만해…….”
“말을 못 하는 척을 하면 그냥 보내줄지도 몰라.”
“미친 새끼…… 괴물 같은 놈…….”
“지금까지 운이 꽤 좋았네. 앞으로도 넌 운이 좋을 거야. 우리도 그 아줌마처럼 너한테 속아넘어갈 거니까.”
“고맙네. 내가 죽어도 너는 같이 죽이고 갈 거야.”
“미리 말 못했는데, 그때 내가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너희 부모님까지 위험해졌을지도 몰라. 어쩌면 다행인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 돼?”
“웃기지 마. 진짜…… 쓰레기같은 놈이었구나. 네가 무슨 낯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까 말했잖아.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고. 네가 먼저 나를 미워할 줄 알았는데 못 알아봐서 서운했어. 아, 서운했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가.”
“…….”
“문태일은 알아본 것 같았는데.”
“……뭐?”
민형이 기울였던 고개를 원위치했다.
“문태일을 기억한 거 아니었어?”
멍하니 계단에 멈춰선 여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먼 골목들을 바라보던 민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도망쳐. 이곳에 네 자리는 없어. 알았어?”
“……무슨 말이야.”
“병신처럼 놀아나지 말고 가라고. 지금, 가. 저수지를 따라서 서쪽으로 걸으면 배를 탈 수 있어. 후리와 근처만 지나가면 돼. 빨리 가.”
“아…….”
“내 말 못 알아들어? 가라고, 김여주.”
민형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선 여주의 어깨를 잡아챈 민형이 소리쳤다.
“FUCK! Why don’t you leave fucking here? 멍청하게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네가 지금 안 가면 난 죽어. 너도 죽고. 그냥 다 죽는다고.”
“내가 가면?”
“네가 이번에도 운이 좋아서 이 좆같은 동네를 벗어나면 살겠지.”
“너희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죽든 살든 네가 왜 끼어들어.”
“죽을 거란 말이네. 네가 살려 달라고 해 놓고 죽겠다고? 그런 식으로 내 앞에서 다 말하면 내가 갈 것 같아?”
“…….”
“이민형. 수작 부리지 마. 배를 탈 수 있긴 무슨, 배가 있기는 해? 보낼 생각도 없으면서 소리는 왜 질러. 괜히 사람 겁 주려고 하지 마. 난 어차피 못 가. 나도 죽어. 어차피 여기서, 나도 죽게 돼 있어. 피할 생각도 없고.”
일순간 얼굴을 굳히고 벽에 기대어 섰던 민형의 고개가 경련하듯 천천히 다시 여주를 향해 돌아갔다. 가만히 노려보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계단 가장자리에서 살짝 휘청이던 다리가 간신히 벽에 기대어 몸을 지탱했다. 하, 체념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쉰 민형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다 병신 같아서, 다 병신이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목에서부터 붉어진 얼굴을 폭 덮은 양손이 떨렸다.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긴팔티가 흘러내려 다 드러난 하얀 손목에 새로 생긴 듯한 바늘 구멍들이 뱀처럼 수놓여진 게 보였다. 얼굴 위를 덮은 손바닥 아래로 열띤 눈물이 흘러내렸다.
“……넌 뭐가 슬퍼서 우는 거야? 결국엔 다 죽을 거라는 것 때문에? 괜찮아, 그거 별 거 아니잖아……. 어차피 사람은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야.”
“그래서 살려 달라고 했잖아, 내가. 원래 죽으려고 했는데 죽기 싫어졌어. 너 때문에.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것도 다 계획된 거였어? 그래서 말려 죽이려고? 더 고통스럽게 죽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나도…… 죽기 싫어. 너도 살게 해주고 싶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그러고 싶었어.”
먹구름을 뚫고 비가 내렸다. 순식간에 굵어진 빗물에 계단에 쌓였던 흙먼지들이 한 칸 한 칸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계단 밑에 있는 하수구에는 대체 어떤 수많은 것들이 쌓여 있을까. 우리도 그 중의 일부일까. 위태롭게 서 있던 민형의 몸이 빗물에 삭듯 스러져 내렸다. 비에 고스란히 온몸을 내놓고 계단에 비스듬히 누운 민형의 주변에 찬 빗물이 고였다가 한 칸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김여주도 사라질 것이다. 손 안에 움킨 가는 모래알처럼 잡힐 듯 빠져나가 없어질 것이다. 종래에는 누가 그녀였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멀리. 검은 속눈썹에 떨어진 빗방울이 민형의 붉게 충혈된 눈을 지나 귓가로, 머리칼로, 계단으로 떨어져내렸다. 급격히 변화된 온도차에 아둔하게 내맡겨진 몸에서 아지랑이같이 투명한 김이 났다.
“일어나. 아직 죽을 때 아니야. 네가 여기서 객사하고 싶어도 난 나중에 죄책감에 고생할 생각 없어.”
“네가 왜 죄책감을 느껴. 잘못한 건 나잖아. 넌 나를 죽여도 죄가 없어…….”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서 총성이 났다. 빗소리에 묻혀 약간 무뎌진 굉음이 계단에 길게 누워 눈을 감은 민형에게, 그리고 그 옆에 주저앉아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고 그의 두 귀를 막은 여주에게 가 박혔다.
“미안, 미안, 미안……, 이민형…….”
소년의 힘없는 울부짖음이 여주의 품에 묻혔다. 열 네 살의 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소리가 비를 타고 하수구에 쓸려 내려갔다. 올해의 마지막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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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 하이! 이번 편 좀 오글거려도 이해부탁드림다... 모두 전개를 위해서,,,라고 치고... 넘어가요ㅎㅅㅎ..
이제 도짜림들께서 고인물 2부의 제목이 로튼베이비란걸 아시리라 믿고 고인물 사족은 달지 않도록 하겠슴니다! 잘 알아봐주세요ㅠㅠ
저쪽에선 올해의 마지막 비가 내리고 이건 올해의 마지막 업로드예요..★ 벌써 2017년이 가네요ㅠㅠ
이뤄놓은 것도 없는 한 해가 또 갑니다:)... 물론 저만 그런 거겠죠 우리 독자님들은 잘 사셨을 테니까요...ㅎ
우리 엔씨리도 넘 고생해줘서 고마웠지요ㅠㅠ 올해 유난히 비보가 많고 이런저런 사건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애들 보느라 즐거운 한 해였네요!
다들 한 해동안 너무나도 고생 많으셨고, 내년에도 모두 행복합시다 사랑해요 독자림덜 흑흑,, 이제 전개 훅훅 가니까 즐거이 읽어 주십셔!!
소통왕이 되고싶은 보풀 올림. GOOD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