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이 끝났다.
일 년 동안 벌어진 열 세 개의 사건들에 지친 나는 모든 일을 버려두고 홀연히 비행기에 올랐다.
물론 사건들에만 지친 건 아니었다.
사람...
아니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이 문제였다.
한 달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아찔하게 나를 덮쳐오는 그의 생각은 내가 한국 땅에서 도망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첫 만남은 아찔함 그 자체였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너를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래 비행기 안이었다.
사건을 해결하는 내내 꽂혀있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몰래 숨기던 단서까지도 쓰다듬던 네 손길에 포기하고 돌아섰었다.
세 번째 만남은...
‘..걱정했어.
‘저 방안에 갇힌 동안 네가 잘못될까봐 그게 무서웠어.’
‘내가 죽는 건 안 무서운데 네가 다치는 건 무서워.’
‘...좋아해..’
...그래.
좋아한다는 저 마지막 말이 문제였다.
그떄 나는 좋아한다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깊게 잠겼었다.
국가소속의 나와 뒷세계의 네가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상황마저 감시를 당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사람과 행복할 수 있을까?
저 질문들에 대한 내 생각의 끝은 아니다였다.
물론 나도 그가 유독 걱정됐고 생각났지만 좋아하는 내 감정 또한 알고 있었지만..
서로를 갉아먹는 연애는 싫었다.
만약 내가 더 이상 국가에 소속 되지 않거나
우리가 더 이상 한국에 오지 않거나
그가 그 일을 그만 둔다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도.. 나도 좋아해요...“
내 말에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었더라.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멋쩍은 웃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었고
감격한 표정인지 서글픈 표정인지 모를 그 표정으로 너는 나를 내려다 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로 그의 눈가는 발갛게 올랐었다.
”그치만 우린 안돼요. 알잖아요.“
”미안해요.“
크리스마스의 기적
- 운명은 어떻게든 만난다
그날로 나는 모든 일을 버려두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땅에 있으면 어떻게든 그를 찾아 보려 안간힘을 쓸 것같아서
서로를 좀먹으려는 행위를 할 것 같아서,
도망치듯 비행기에 올랐다.
도망치듯 떠나온 나라 이탈리아는 꽤나 살 만 했다.
건물들은 예뻤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가끔 길을 걷다가 선물이라며 꽃을 받기도 했었고
당신의 시간을 빌리고 싶다는 잘생긴 남자들 또한 많았다.
근데 왜 난 오늘도 당신을 생각하며 걷고 있을까.
그와의 만남들을 생각하며 정처 없이 걷다보니
큰 광장 중앙에 있는 트리 앞에 서게 됐다.
알록달록한 장식들과 밑에 꾸며진 선물상자들
밝게 웃는 연인들과 아이들, 가족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 크리스마스구나...“
오색빛깔의 찬란한 장식들을 보다 핸드폰을 들어보니
12월 24일 11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말로만 들어도 설레야할 날이 그닥 설레지 않았다.
”Hi, Valentine. Did you come alone?“
(안녕, 발렌타인. 혼자 왔니?”)
트리 앞에 멍하니 서서 한 오 분쯤 지났을까 한 남자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놀랍게도 나를 발렌타인이라고 부르는 남자에 그가 또 다시 생각났다.
그를 생각하며 또 한 번 생각우물에 잠기려는 나에게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I think you're alone. You should go out with me.
I'll make you happy.”
(혼자인 것 같은데 나랑 데이트하자. 행복하게 해줄게.)
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려는 남자의 무례함이 싫었다.
한마디를 하기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제 뒤로 감추고 무겁게 말을 꺼냈다.
“She is my girl.“
(내 여자야.)
내 손을 조심스레 잡고 제 뒤로 감추는 찰나에 나는 그가 누군지 이미 알아챘다.
”She is only my woman. “
(오직 내 여자라고.)
낮은 목소리부터 익숙한 뒤통수까지 모든 게 그였다.
”If you understand, get out. “
(알아들었으면 꺼져.)
나는 이 사람을 피하기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왔는데.
”안녕..? 발렌타인.“
이 사람을 피하러 온 그 곳에서 나는 이 사람을 다시 만났다.
”...안녕 못 해요. 나는.“
”보고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가 발갛게 올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우냐며 한발자국 다가가려는 나에게 그는 오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 사이의 거린 고작 네걸음이 채 안돼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팔은 닿지 않지만 서로가 보이고 서로의 말이 들릴 수 있는 딱 그 정도 거리였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한시 한시가 사무치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보고 싶었어. “
너는 울고 있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이 광장에 캐럴이 울려 퍼지는 이 공간속에 너와 나만 울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는 너의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그런 너에게 한걸음 다가가자 너는 한걸음 물러났다.
눈으로는 애타게 나를 쫓고 있었으면서 발으로는 나를 피했다.
”네가 우린 안 된다고 하는 그 말이. 죽으라는 말보다 아팠어. “
네 발 끝에 모여 떨어진 눈물자국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하는 말들은 모두 내 가슴에 꽂혔고 네가 받았을 모든 상처가 내게 느껴졌다.
"네 이름 한자 한자가 사무쳐서 그래서 도망치듯 여기로 왔는데.."
"여기서 널 만났다는건 내가 널 더 기대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돼?"
사탕앞의 어린아이처럼, 떠난 연인을 붙잡는 가련한 남자주인공처럼
너는 내 답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재촉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애만 태우며 나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을 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알게 모르게 나도 한달의 시간동안 그를 기대하고 고대했었다.
그와의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는 한국땅에서 더이상 버틸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땅이었는데
운명은 너와 나를 떨어트려놓아주지를 않았다.
”너 잊으려고. 한국에 있으면 네 생각이 계속 날까봐 멀리까지 왔는데.. 근데 당신은 피하지도 못하게 내 눈앞에 계속 나타나..“
내 말 또한 그에게 날아가 비수처럼 꽂혔다,
고개를 들어 본 네 얼굴은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절대로 하지 못했던 그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당신은 좀비에요 전원우에요..? “
”..전원우. 전원우야. 너는 지금 발렌타인이야 김칠봉이야..? “
”..사랑해요. “
너의 말이 끝나자 마자 묵혀왔던 감정은 터져버렸다.
목끝까지 차올랐던 말 역시 꽃잎이 터지듯 뱉어졌고,
눈물 섞이고 갈라질 대로 갈라진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터지자
광장의 모든 불이 꺼지고 종이 열두 번 울렸다.
사랑한다는 내 말에 너는 나를 붙잡았다.
우리 사이의 간격이 한걸음씩 줄고 단 1cm의 틈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너는 나를 붙들었다.
광장의 평범한 연인들은 입맞춤으로 저마다의 크리스마스를 시작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민망한 소리들이 싫지 않았다.
막혀오는 숨조차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좀비가, 발렌타인이 아니어서
그냥 전원우 김칠봉이라는 그 이유 하나가 우리를 평범하게 만들었다.
광장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고 맞물린 고개가 떨어지며 마주친 눈에는 온전히 내가 담겨져있었다.
”사랑해. “
너역시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였고 나는 그 목소리에 가만히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좀비“
”메리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영화는 이미 시작 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걸어야했다.
그 끝이 어떨지 타국에서도 서로를 좀먹을지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엔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함께 행복할 땅이 있고 서로가 있다면 우리는 행복했다.
12월 25일에 뱉어진 날것 그대로의 내 사랑고백과 그의 정신이 아찔해지는 키스가 있다면,
우리의 엔딩크레딧엔 그렇게 쓰이지 않을까.
[ 시작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끝은 아주 야하고 달콤한 연애 ]
정도의 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