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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오직 저, 쿠키가죠아에게만 있음을 다시한번 알려드립니다.
구다정과 기데레 16~17화
W.쿠키가죠아
자철과 헤어지는 바로 직전까지도 나는 녀석과 말싸움을 해야했다. 입만 열면 구글거리는 말을 꺼내는 녀석에게 시시콜콜 따져대느라 내 입은 저릴 지경이다. 헤어지기 바로 직전에도…
"성용아, 나 진짜 안가도 될까? 명색이 훗날 장인장모님 되실 분들인데 가서 점수라도 따놔야 하는거 아냐?"
"… 오바하지마, 지금 가면 오히려 마이너스거든? 오붓한 가족 모임을 망칠셈이냐."
"왜, 나도 곧 가족될거니까 더욱 가야지"
헤어지는 순간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가 가야하는 거 아니냐며 안절부절 물어오는 녀석에게 귀찮다는 듯 대답했지만, 녀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끈질기게 물었다. 결국 내 입에서는 험한 말투까지 나왔지만 녀석은 또 그걸로 물고 늘어진다.
"미친, 헛소리그만하고 얼른 이제 갈길이나 가지?"
"미친? 마누라, 서방님한테 미친이뭐냐, 미친이"
"서방님 좋아하네, 기둥서방 노릇하려면 딴데 찾아봐"
"아씨, 내가 왜 기둥서방이냐?! 이렇게 능력있는 기둥서방 봤어? 봤냐?"
"지금 보고있네, 빨리 안 나갈래?"
"왜 못쫓아내서 안달인데, 뭐 나 몰래 숨겨놓은 거라도 있냐?"
"그래, 너 몰래 숨겨놓은거 아주 많다. 그러니까 얼른 나가줄래?"
아무리 쫓아내려해도 도무지 나갈 생각않는 녀석에 나는 끝내 녀석의 짐을 챙겨준 뒤 등을 떠밀었다. 그런 나에게 밀려 겨우 현관문 앞까지 간 녀석은 알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내 손을 잡고 저지했다. 몸을 돌려 나를 보던 녀석은 조심히 다녀와 하며 쪽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는 드디어 나갔다. 하아… 정말이지 나갈 준비를 해놓고 두시간을 이런식으로 뻐기는 녀석은 저녀석 뿐일거다. 집안이 겨우 조용해졌다. 소파에 털썩 앉아 숨을 돌리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재촉하는 누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니?'
"아, 아직 집인데"
'뭐어? 아직도 출발 안했니? 뭐하느라 그렇게 느긋해?'
"좀 피곤해서, 곧 출발할거야"
'곧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 엄마 아빠 기다리셔'
"휴, 알았어. 끊어"
'어어? 얘얘! 얘는 뭐가 그리 급하니? 오늘 길에 아이스크림 좀 사다줄래?'
"뭐?"
'엄마가 드시고 싶으시다네? 호호'
"하… 단 거 안좋아하는 엄마가 아이스크림은 무슨, 그냥 솔직히 누나가 먹고싶다고 해."
'어머, 들켰네. 그래, 내가 먹고싶으니까 좀 사다줘~ 부탁할게'
"알았으니까 그만 끊어."
통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은 뒤 차키를 들고 덜렁덜렁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보는 집이라 약간 설레기도 하다. 누나가 부탁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도착한 집앞은 약간 소란스러웠다. 뭐지? 하며 차안에서 잠시 살펴보니 주민들이 집 앞에 모여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내리면 더 피곤해질 것 같은데… 내릴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애써 웃으며 그 사이를 뚫고 집안에 들어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활짝 웃으며 조금은 이야기라도 들어줬을테지만 오늘따라 무거운 몸에 바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현관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성용아, 어서오렴. 수고했다 우리 아가"
"엄마, 다녀왔습니다."
나를 활짝 웃으며 껴안아주시는 엄마의 인사에 나 또한 엄마에게 안기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몸이 무겁더니 이젠 어지럽기까지하다. 아버지와 누나와도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바로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그런 내 태도에 이상함을 느끼셨는지 딸깍 문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가 들어오셨다. 침대에 뻗어있는 내 이마에 손을 짚어보시더니, 어머 많이 뜨겁네, 감기 걸린거 아니니? 하고 물으신다. 감기? 아, 감기에 걸린건가… 운동선수라는 놈이 개도 안걸린다는 여름감기에나 걸리다니… 약을 찾아보겠다며 어머니가 나가시자 이번엔 전화가 울린다. 쉴틈을 안주네… 인상을 찡그린 채 발신번호를 확인해보니 구자봉이다… 전화를 받아보니 녀석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어, 기레기. 집엔 잘 도착했어? 창수형이랑 얘기하다가 니얘기가 나와서 전화해봤어.'
"응…"
'어? 기성용?'
"응…"
'성용아, 너 목소리가 왜그래. 어디 아파?'
"응…"
'진짜냐? 어디가 얼마나 아픈건데, 많이 아파?'
"응… 자봉아, 나 어지럽다. 그만 끊자"
'어? 야야!! 기서ㅇ…ㅇ…'
걱정스러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수화기를 들고 있는것도 힘들어져 녀석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뚝 끊고 폰을 옆에 던져버렸다. 잠시 후 엄마가 약과 함께 물수건을 가지고 다시 들어오셨다. 건네준 약을 받아 먹은 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잠이 들었다. 그런 내 이마에 물수건이 올려져 차가운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눈을 뜬 건 쉴새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벨소리에 더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짜증이 나서였다. 전화를 받으려는 찰나 끊어진 벨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부재중 목록을 확인해보니 모두 다 자봉이다. 부재중 통화만 46통, 문자는 23통… 어지간히 애가타는 문재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 좀 받아봐
-많이 아파?
-쓰러진건 아니지?
-어디야?
-집이야?
-자?
-어떻게 된거야…
-나 답답해서 미치겠다.
-제발 전화 좀 받아줘
… 문자를 확인하고 녀석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녀석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성용아!!'
"응…"
'하… 어떻게 된거야.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미안, 약기운에 잤어."
'약 먹었어? 다행이네, 지금은 좀 어때?'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 다행이다 정말,'
정말 걱정어린 녀석의 목소리에 아까 그렇게 끊어버린 나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왠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너… 밖이야?"
'어? 아, 응'
"어딘데?"
'아, 음… 그냥 좀 밖에'
선뜻 대답 못하며 우물쭈물하는 녀석의 목소리 뒤로 다시 익숙하다 생각하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
이 클래식 음악소리… 분명 이 근처의 이웃집에서 항상 흘러나오던 음악소리다. 그리고 분명 지금도 집에서 그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집 밖을 휙휙 둘러본 내 눈이 커졌다.대문 앞에 한 남자가 쭈그려 앉아있는게 눈에 보였다.
"야, 구자철. 너 지금 어디야"
'아… 아, 창수형 병원갔다가 이제 집에 가는 길이지'
"… 구자철, 그만 일어나"
어줍짢은 거짓말을 해대는 녀석에 잠시 할말을 잃었다가 녀석에게 일어나라 하자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집의 창문을 확인한다. 그리고 천천히 창문을 살피던 녀석은 내 방 창문을 보았다. 녀석과 내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저 어색하게 웃는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저러고 있었던거야…
"너, 거기 가만히 있어"
'응?'
자철의 반문에도 뚝 전화를 끊곤 곧바로 방에서 뛰어나갔다. 나를 본 부모님과 누나가 나를 뒤에서 불렀지만 아무 대답 못한 채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문을 활짝 열어 그 앞에 벙쪄 서있는 자철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았는지 잠시 어지러움에 휘청거렸고 녀석이 다급하게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묻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제대로 섰다.
"… 괜찮아?"
"언제부터 여기있던거야?"
"방금,"
"구라치지마, 제대로 말해. 언제부터 있었어"
"… 5시간 전부터…"
하, 내가 이녀석때문에 미치겠다. 5시간 전부터라면 내가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고 잔 이후에 바로 여기로 달려와 계속 이러고 있었다는 거잖아. 미련하기 짝이 없는 녀석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내가 더 대단하기도 싶다. 녀석을 자세히 보니 손을 뒤로 한 채 뭔가를 감추고 있다. 뭐냐, 하고 물었지만 녀석이 당황한 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더 뒤로 뺀다. 뭔데 저래? 아무리 빼앗으려 해봐도 쉽게 내주질 않는다. 계속 커져만 가는 궁금증에 답답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하다 안심하는 녀석을 갑자기 기습해 녀석의 손에 있던 걸 빼앗았다.
"앗!"
"응? 이게 뭐냐, 약이잖아?"
"… 아, 음… 그게"
녀석에게서 뺏은 것은 약봉투였다. 그것도 뭐가 그리 많은지. 본적도 없는 약까지 들어있다. 약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같이 몸살감기약, 목감기약, 코감기에 신종플루 약인 타미플루까지… 감기에 관한 모든 약이 있는것같다. 그 약들을 보니 안절부절하며 약국에 가서 이 약들을 모조리 쓸어온 녀석이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에 녀석이 얼굴이 붉어지더니 볼을 긁적이며 애써 변명을 시작한다. 녀석이 이렇게 얼굴이 붉어진 모습이 오랜만인 것 같다. 요새들어 항상 내가 녀석에게 이리저리 끌려 얼굴이 달아오르기만 했지 녀석이 이렇게 달아오른 건… 킥킥
"아아… 저어, 이건… 집에 약이 다 떨어져서…"
"흥, 약국이라도 차릴 셈이냐. 바보, 솔직하게 말해봐"
"무슨 감기인 줄 몰라서 그냥 종류별로 다 사오긴 했는데… 이미 약먹었다니까 필요없을 것 같아서,"
소심하게 작은소리로 중얼거리는 녀석이 귀엽다. 킥킥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자 자철이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내손을 턱하고 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갖다댔다. 곧 이마를 뗀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열은 다내렸네, …아, 응. 순간 또 이상한 짓 하려는 줄 알고 뒷걸음 친 나는 살짝 민망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녀석의 말에 대답했다.
"좋아, 다행이다."
"응, 이왕 온 거 들어갈래?"
"응? 진짜? 그래도 되?"
"뭐, 밥이라도 먹고가던가"
"음…"
이렇게 날 위해 찾아와 5시간을 기다린 녀석을 그대로 보내기엔 신경쓰인다. 그래서 녀석에게 밥이라도 먹고가라고 말했지만 금새 반색하던 녀석은 곧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하다. 왜그래? 라는 물음에도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녀석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아니야, 이번에는 그냥 돌아갈게"
"어?"
"너는 몸도 안좋았으니까 얼른 다시 들어가. 기껏 열 내렸는데 또 오르면 안되잖아"
녀석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헐… 설마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봤지만, 녀석은 그저 빨리 들어가 보라는 말만 해댄다. 다시 한번 들어가자고 말해봤지만 결국 녀석은 그대로 돌아갔다. 한번 거절한 녀석은 단호하게 계속 거절해왔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누나의 부름에 집으로 들어갔다.
"아까 그렇게 뛰어나가더니 대문앞에서 혼자 뭐하고 있었니?"
"아… 아니, 아무것도…"
"얘가얘가, 감기 걸렸다면서 더 심해지려고, 빨리 들어와."
"응…응"
찝찝한 기분을 가지고 들어가보니 이미 저녁상이 준비되어있었다. 오랜만에 엄마의 요리를 먹어볼 수 있는건가, 기분 좋은 생각에 웃으며 부엌에 들어가니 엄마가 활짝 웃으시며 맞아주신다. 어느새 가족들이 다 자리에 앉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의 야심찬 별미 전골요리의 따뜻한 국물에 몸의 피로가 싹 내려가는 것 같다. 한창 맛있게 음식을 먹는데 누나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 뭘그렇게 봐?"
"… 성용이, 너…"
"…?"
"여자친구 생겼니?"
콜록콜록, 갑작스러운 누나의 질문에 밥이 목에 걸렸다. 아씨, 또냐?! 왜 누나까지 이 패턴인데?!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소리하는거야, 갑자기 여자친구라니…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까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 엄마는 아예 손뼉을 치시며 꺅꺅 소란을 피우신다. 어머어머, 얘 진짜니? 하시며 눈까지 빛내신다. 난 그런 분위기에 당황해 처음 말을 꺼낸 누나를 황망히 바라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음, 아니… 너 목에 그…그거 키…키, 키스마크 아니니?"
누나가 볼을 붉히며 내 목을 가리키고 말을 더듬는다. 키스마크라니? 목에… 아앗!! 재빨리 나는 목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모두 다 이미 본 듯 눈이 커다래졌다. 이…이런, 망했다. 어제 구레기 자식이 깨물었을 때 남은게 틀림없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목을 손으로 가리자 누나와 엄마의 반응이 더 커졌다. 진짜구나, 누구니? 누군데, 누군지는 몰라도 여자애가 엄청 적극적이네, 하며 난리가 났다. 나는 서둘러 다른 한 손을 흔들며 부정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래… 먹힐리가 없지.
더욱 거세지는 질문 세례에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후에도 밖에선 여전히 꺅꺅거리며 시끄럽다. 거울로 목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키스…마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급하게 자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왠일로 한번에 받질 않는다. 몇번을 걸어도 받지 않자, 화를 넘어서 무슨일인가 걱정도 되긴 했지만 … 다른 일 하고 있겠지 하며, 잠시 기다린 후 다시 전화할 요량으로 손을 멈췄다. 그리고 몇분 후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어, 성용아. 왠일로 먼저 전화했냐'
"야!!! 구자철, 이 개새끼야!!!!!"
자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꽥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걱정보다 지금도 밖에서 난리인 이 사건으로 인한 화가 훨씬 더 큰것 같다. 그런데 소리를 꽥 질렀는데도 수화기 너머의 자철은 잠잠했다. 왠지 뭔가 더 찜찜하다. 씩씩거리며 울분을 삭히고 있을 때까지도 녀석은 한마디 대꾸가 없다.
'…'
"…
'… 미안'
"뭐?"
'거울 본거 아니었냐?'
"거울이라ㄴ… 너! 알고 있던거냐?!"
'아하하, 내가 만들었는데. 알고 있는게 당여ㄴ…'
"야! 이 새끼야! 알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거기서 바로 말하면 내 앞날이 좀 힘들것같아서…, 하하'
"니 앞날… 그래, 잘 알고 있네. 근데 니 앞날은 더 힘들어질것 같다"
'응?'
"너때문에… 너때문에!!!"
'… 나때문에?'
"너… 한동안 우리집에 올생각 꿈도 꾸지마"
'어어? 왜?'
왜? 왜? 오는 순간 넌 '적극적인 여자친구'가 될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넌 내손에 어떻게 될것같으니까… 하아, 녀석의 뻔뻔한 아무것도 몰라요 물음에 됐다됐어, 끊어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침대에 휙 던져버리곤 나 역시 침대에 털썩 앉아 얼굴을 감쌌다. 질리지도 않는지, 엄마와 누나는 연신 꺅꺅거리며 신나게 나를 불러댄다. 이 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한단 말인가…
어떡하지? 그냥 여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 해야하나…? 아님, 그냥 부딪혀서? 아니면… 구자철이 그랬다고… 아아악, 내가 지금 뭔생각을 하고 있는거냐,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러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더니 엄마와 누나의 머리가 빼꼼 들어왔다. 윽… 기꺼이 방에까지 들어온 두사람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얘,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는게 어딨니?"
"그래, 성용아. 엄마한테 그런 중요한 문제를 숨기려는거니?"
"…"
"자세히 좀 말해봐~ 누구야? 우리도 아는 사람이니?"
아는 사람이냐고? 아아…, 그래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엄마와 누나의 끈질긴 질문공세에 답은 떠오르지 않고 머리는 점점 하얘지기만 한다. 결국 나는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해버렸다.
"… 개한테 물린거야"
"…"
"…"
"…"
내 말도 안되는 변명에 두사람, 아니 날 포함 세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엄마와 누나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야, 기성용… 아무리 숨기고 싶다해도 여자친구보고 개가 뭐니?…"
"그래, 성용아… 그건 좀 심하구나…"
순식간에 인간 말종으로 추락한 듯한 심정에 울쌍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에 엄마와 누나는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웃으며 나를 바라본 엄마는 내 손을 꼬옥 잡고 입을 여신다.
"성용아, 우리가 너무 보채서 당황했니?"
"아… 저기, 엄마 그게요…"
"푸핫, 기성용이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그죠 엄마?"
"그러게말이다. 성용아, 아직 말하기 힘드니? 그럼 더이상 묻지 않을게. 그래도 나중에 마음 다 잡으면 꼭 말해주기야?"
활짝 웃는 엄마의 말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차마 엄마의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부끄럽게, 죄송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잡고 있던 손을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누나를 데리고 나가신다. 언젠가 사실을 알게되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아버지는… 누나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살짝 가슴이 답답해진다. 엄마가 나가신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용히 속삭였다.
"… 죄송해요, 곧… 곧 말씀 드릴게요"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구자봉과 서로 좋아하고 알콩달콩한 것은 마냥 좋지만, 이렇게 가족들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온다. 우리가족들 뿐만 아니라 자철의 아버지와 형까지 생각하자면 우리는 진짜 나쁜 자식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새삼 다행이기도 싶다. 다시 일어나 앉아 내던진 전화기를 다시 들고 자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바로 받는다. 그러고보니 아까는 왜그렇게 안받은거야?
'여보세요'
"자봉아"
'응, 화는 좀 풀렸어?'
"하…, 그건 됐어. 나중에 직접 보고 몇대 좀 때려야만 풀릴 것 같다.'
'아아, 그럼 안되는데…'
"왜, 맞기는 싫냐?"
평소라면 이런 내말에 실실 웃으며 재주좋게 넘어갔을 텐데 이번엔 사뭇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리고는 약간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에 나는 그냥 맞기는 싫냐,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녀석이 머뭇거리다 말을 다시 이었다.
'아니, 그게아니라… 성용아, 나 독일가'
"독일? 당연히 가야지. 날짜 잡혔냐? 언제 가는데,"
'내일…'
자철의 대답에 그대로 사고정지. 독일에 갈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일이라니… 이렇게 빨리 갈줄은 몰랐다. 그것도 녀석이 이렇게 바로 전날 알릴 줄은 더욱 몰랐다. 내일 토크쇼 촬영도 있는데 그럼 얼굴보며 인사도 못하고 그대로 보낼 처지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녀석이 계속 말을 잇는다.
'… 아까 집에 도착했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내일 들어올수 있겠냐고.
이렇게 급하게 말하는게 어딨냐고 따지긴 해봤는데, 결국 내일 바로 떠나게 되버렸네.'
아… 그래서 아까 그렇게 전화를 안받은거였구나… 마음 같아서는 그런게 어딨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 입은 이미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잘됐네, 빨리 가버려. 한동안 조용해서 속 편히 지낼 수 있겠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거울에 비춰지는 내 표정은 한없이 일그러져 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추하게 느껴져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다. 젠장… 시즌 준비하러 가는 사람한테 따뜻한 말은 못해줄망정 맘에도 없는 소리나 틱틱거리고, 못났다, 기성용
'미안,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얼굴 좀 더 보고 올걸.'
"됐어, 가서 공이나 제대로 봐. 헛발질하지말고"
'응, 그래. 넌 내일 촬영있지? 잘해,'
"신경 꺼, 가서 니 욕 많이 해줄테니까"
'이왕이면 칭찬으로 하지?'
"니가 칭찬할게 어딨냐?"
'킥킥, 아무튼 쉽게 오케이하는 법이 없어요.'
…또또, 맘에도 없는 소리만 툭툭 나간다. 하지만 녀석도 그새 평소와 다름없이 나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래, 독일가는게 평생 못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며 보내는 게 좋으려나. 녀석도 그렇게 대해주니 한결 편해진다. 그래도 전화를 끊기 전에는 뭔가 애틋한, 녀석 특유의 구글거리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티격태격하다 녀석이 급한 전화가 왔다며 뚝 끊어버렸다. …아까 내가 그런거 복수하는 거 아니겠지? 와씨, 그래도 그렇지 내일 떠난다는 놈이 애인한테 좋아해, 사랑해는 아니어도 하다못해 잘지내 한마디 안하고 떠나려고 하냐?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 성격 뻔히 아는 녀석이 먼저 해줘야하는거 아니냐고!
뚝 끊긴 전화기를 휙 던져버리곤 잠이나 자자, 침대에 누웠지만… 그래…, 이 기분에 잠이 올리가 없지. 계속 녀석 욕만 하다 또다시 하루가 흘러갔다. 녀석때문에 날밤 지세운게 도대체 몇번째야… 휴… 침대에서 꽤 어기적거리다 방에서 나가니 아버지가 이미 일어나셔서 신문을 보고, 엄마는 아침 준비를 하고 계신다. 평소 말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왠일로 나를 보며 얘기 좀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셨다. 소파에 앉아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길 기다리니 곧 입을 여셨다.
"흠흠, 그래. 올림픽 치룬다고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축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애인은 언제부터 사귄거냐."
"…"
"여자만나는건 좋다만 축구생활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히 만나거라"
"… 네, 알겠어요"
평소 엄격하던 아버지가 저런 소리 하시는 건 처음 본다. 항상 축구 축구, 간혹 영어, 또 축구, 축구… 오직 축구만 강조하며 앞만 보고 달려라, 하시던 아버지가… 새삼 누군가와의 교제를 허락하시는 듯한 말에 꽤 놀랐다. 하지만 딱히 티를 내진 않았다. 말하고 있는 아버지 또한 꽤 민망하리란 걸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여자라고 굳게 믿으시는 아버지의 말에 또다시 한번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는 그 말만 하시고는 다시 입을 굳게 닫으셨다. 엄마도 누나도, 어제의 내 반응에 더이상 묻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가슴을 옥죄어온다.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꽤 어두위 분위기 속에 아침을 먹고, 토크쇼 촬영 준비도 있지만 집에 있자니 마음이 더 무거워질것 같아서 좀 더 일찍 집을 나서려고 했다.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 순간, 뒤에서 누나가 불러세운다.
"성용아! 나가는 길에 나 좀 데려다주라~"
"어디가는데?"
"친구만나러, 역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되."
"그러든가, 근데 누굴 만나길래 그렇게 화장이 진해?"
"어머, 진하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보네. 호호"
유난히 기분이 좋아보이고 왠일인지 짙은 화장에 무슨 일인가 했지만 집요하게 묻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찔리는게 있으니까… 누나를 차에 태우고 역으로 향하는 동안 왠지 어색함이 느껴진다. 서로 말을 아끼려고 하는게 눈에 확 보인다. 이런 어색함이 더 어색했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생긴 비밀로 거리가 생겨버린 것 같기도 하고… 다 털어놓으면 더 멀어지려나?
역에 도착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누나가 내리고, 매니저와의 간단한 통화를 한 뒤, 촬영현장으로 출발했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여기저기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그중 나를 발견한 피디가 다가와 악수를 건넨다. 웃으며 악수에 응하고 대기실이라는 곳에서 잠시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 공항이려나… 끝까지 전화 한통 없는 녀석에 화가 난다. 결국 전화기를 찾았다. 구자봉의 번호를 눌렀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녀석은… 멀리 떠나는 주제에 떠나기 전에 내 목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은건가. 전화기를 꽉 쥐며 야속한 녀석에 성질 꾹꾹 참고 있을 때, 피디가 작가와 함께 대기실에 들어왔다.
"기성용선수, 반가워요. 오늘 촬영 잘부탁해요."
"아, 저야말로 잘부탁드립니다."
피디와 작가는 한참을 촬영 내용을 설명하는데, 어째 질문이고 내가 할 말이고 구자철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녀석은 토크쇼가 되면 내얘기 안하려고 필사적이던데, 나는 이렇게 많이 얘기해야 하는거냐. 안그래도 미워죽겠는 녀석 뭐가 좋다고… 쳇 그래도 방송이라고 내츄럴하게 온 나를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는지 전문가에게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해준다. 사실… 예능은 처음이라 당연히 여기서 해주는건 줄 알았는데, 머리를 만지던 사람이 말하길 보통은 미용실에서 원하는 스타일로 맞춰서 온다는 얘기에 그냥 아무생각없이 온 것이 민망했다. 그래도 쿨하네요, 털털하네요 하는 아부성멘트에 그래도 기분이 나아졌다. 메이크업까지 마치고 시간이 잠깐 남아 다시 한번 자철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나 받지 않는다. 이 구레기새끼… 내가 이제 먼저 전화하나봐라. 신경질이 나 아예 전화기까지 꺼버리고 촬영에 임했다.
"기성용 선수를 소개합니다~!"
소개 맨트와 함께 자랑스런 동메달을 들고 당당하게 나갔다. 긴장되냐는 질문에 축구할때보다 편하다고 말하니 혹독한 예능을 겪게 해준다고 했지만, 실제로 녹화가 진행되는 동안의 분위기는 편안했다. 시작부터 자철의 이름이 툭툭 나온다. 그래도 녀석을 짧게짧게나마 적절히 까주면서 대답을 했다.
질문에 답을 주고 받으며 녹화를 하는데 욱하는 내성격 얘기를 하다 일본전때의 이야기가 나왔다. 예상대로 욱한 구자철과 반대로 녀석을 말린 나에 대해 질문을 받았지만, 순간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경기전에 내가 잘못하는 바람에 구자철이 빡돌아서 그랬어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길게 고민하는 것도 이상하고, 짧은 순간 적절한 답을 찾다가 내놓은 답은 일본전이기 때문에, 정말 이기고 싶어해서,라는 변명을 늘어놨다. 일본전이기 때문에 모두 다 쉽게 받아들였다. 하… 일본전이 아니었다면 낭패일뻔 했다. 대답 이후 구자철을 디스하는 경규어르신의 말씀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울 때 앞에서 그리 말해주니 너무도 통쾌했다.
처음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힘든 점을 말할 때도 구자철이 등장해야했다. 그래도 역시 내가 늦게나마 합류했을 때 가장 의지가 된 것은 역시 구자철이었으니까… 하여튼, 이녀석은 화를 내고, 미워하고 싶어도 옆에 있는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나를 방해한다. 그게 더 불만스러워 녀석의 구글구글거림을 폭로하고, 진지한 얘기도 하다가, 구글거림의 제안으로 환영만찬 때 옷때문에 갈굼당했던 이야기까지 자철에 대해 속시원하게 폭로하며 순조롭게 진행되어 끝까지 그대로 녹화를 마칠 줄 알았다. 한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갑자기 혜진누나가 지인 한분을 초대했다는 말에 진짜로 와요? 물으며 누군지 고민했다. 제동형의 질문에도 설마설마하며 구글거림을 지목했지만, 여태껏 전화 안받던 녀석이었고, 지금 독일로 가기위해 공항에 있었을테니까 이번엔 다른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정말 생각도 안했는데, 그리도 듣고 싶었음에도 그 마음에 응해주지 않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