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드릴까요?"
무얼 말하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문제 푸는거 말하는 거구나. 뭐라 대답해야할지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아 괜히 그 사람의 손에 들린 종이와 내 손에 들린 샤프만 번갈아 보았다. 짧은 정적이 길게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 이거요……?"
"예, 제가 할 수 있는 문제 같아서요."
내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샤프와 모의평가 문제지를 가져다가 자신의 앞에 내려놓는다. 문제를 푸는 것 같지는 않고 어떻게 설명해야하는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괜히 자기가 가져온 종이에 풀이를 하는 손만 보고 있는데 낮게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전공이라."
"아……."
"혹시 이해 안 되면 말해줘요. 어느 정도 개념을 알고 있는지 내가 몰라서, 일단은 제 선에서 설명해볼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에 집중해서 나오는 나른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취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예쁘게 뻗은 손으로 써내려가는 글씨는 그 때, 포스트잇에서 봤던 반듯한 글씨가 맞았다. 한 손으로 제 입꼬리 끝을 살짝 누르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글씨를 써내려가며 풀이를 정리하는 모습이 매일 커튼 뒤 그림자로 봤던 것과 겹쳤다. 이렇게 있었겠구나.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마음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일방적인 강의와 내게 시선을 두고 하는 설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와닿았다. 이 사람이 설명을 잘했던 걸까. 7번을 돌려들어도 이해되지 않았던 풀이를 단번에, 차근차근 이해시키고 자기는 마저 복사할 것이 더 있다며 나를 먼저 방으로 보냈다. 10분 남짓하는 시간동안 엄청난 울림을 안겨주었다. 그 사람, 수학이 전공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제 전공인 수학 문제를 풀 때는 한 손으로는 입꼬리의 끝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정갈히 풀이를 정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중하면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나긋하고 매력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내게 주는 떨림은 처음 마주쳤을 때 보다 두번 째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 때보다 오늘 이렇게 마주쳤을 때 곱절이 되어 커져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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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서 있었던 내내 눈이 잔뜩 왔었는지 두껍게 쌓여 길이 온통 하얬다. 걸을 때 마다 푹푹 파이는 발이 시려운 것은 둘째치고, 걷는 게 어려워 평소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은 그런 내게 보폭을 맞춰주며 천천히 옆에서 걸었다. 나는 오늘 평소보다 말이 확연히 없었다. 독서실에서 있었던 일을 무의식적으로 되새기길 반복하다보니 자꾸만 멍한 얼굴이 되었다. 말 없이 걷던 중 목 뒤로 따뜻한 무언가가 푹 달라붙어 깜짝 놀라 다니엘을 바라보니 제 주머니에 있던 핫팩을 내 뒷목에 얹은 것이었다. 아 뭐야. 놀랬잖아! 민망한 마음에 괜히 소리치며 웃자 다니엘도 따라서 웃었다.
"왜 그러는거냐 진짜."
"뭐가?"
"독서실에 비상금이라도 숨겨둔 얼굴인데. 자꾸 심각해보이고 말이야."
"그랬어? 내가?"
어. 완전! 들떠서 묻는 나를 우스꽝스레 따라하듯 대답하는 다니엘의 팔을 툭 쳤다. 놀리지마! -라고 하면서도 다니엘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야하나 하고 갈등이 일었다. 독서실에 가서 공부도 안하고 이렇게 가슴떨려하는 모습을 다니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옛날부터 내게 아버지, 혹은 친오빠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다니엘에게는 번듯하고 똑부러지는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만약 다니엘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파고들어 묻는다면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 해야 하나, 예정에 없던 생각이 자꾸만 일었다.
또 심각해져가는 내 얼굴이 신경쓰였는지, 다니엘은 손가락으로 살짝 내 이마를 툭, 쳤다.
"왜 그러는지는 안물어볼게. 나중에 꼭 알려줘야 돼, 알겠지?"
"응."
"아, 그것만 알려줘. 지금 그러는 게 생각하기 싫은 것들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거야? 아님 좋았던 걸 곱씹는거야?"
"후자야. 자꾸 생각나네 이게!"
"그렇다면 다행이고."
살짝 미소지으며 평소보다 긴 시간동안, 내 보폭을 맞추며 나의 들뜸을 방해하지 않았던 다니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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