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경의 눈이 반짝인다. 아닌 척 해도 기뻐하는 게 뻔히 보여 지호는 웃음이 나왔다. 오늘 핸드폰을 사준다는 걸 듣고 난부터 내내 저 상태였다. 지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경을 회상했다.
‘오늘 할 일이 많아. 앞으로 아빠는 19년 동안 네가 지하실에서 하지 못했던 거, 다 누리게 해줄 거거든.’
‘…….’
‘우선 핸드폰부터 사고.’
‘해, 핸드폰이요? 스마트폰 말하는 거예요? 그, 막 드라마에서 보면 직사각형의 전자기계, 사람들이랑 마, 말도 하고 그, 글도 쓰고!’
‘응 그거. 대한민국에선 폰 없으면 불편해서 못 살아.’
‘우, 우와!’
장밋빛으로 뺨을 붉히며 기뻐하는 경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호는 큭큭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곁눈질로 경을 보니 시트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곤란한데. 벌써부터 저렇게 행복해하다간 나중에는 심장이 뻥 터질지도. 별 시답잖은 걱정을 하며 지호는 가장 먼저 눈에 띠는 핸드폰 대리점 앞에 차를 세웠다.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주니 그제야 경이 내린다. 꼭 여자를 에스코트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다. 어찌되었건 지호는 경이 그토록 오매불망 바라는 핸드폰부터 사주기로 했다. 대리점 안으로 들어가니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가게 주인이 설렁설렁 인사를 하다말고 눈을 홉떴다.
“저, 혹시 실례지만 그, 박경…?”
구름 위에서 둥둥 유영하고 있던 달달한 기분이 밑바닥까지 쾅 추락했다. 앞으로 일정에 들떠 경이 유명인사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지호는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가게 주인이 황소처럼 부담스럽게 코에서 김을 뿜어대며 경을 보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했다. 본인의 산적 못지않은 덩치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고는 저러는 걸까. 예상대로 경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바르작댔다. 지호는 난처해하는 경의 어깨에 팔을 두른 후 한숨을 섞어 말했다.
“맞습니다만.”
거짓말 해봤자 계약서 작성할 때 들통 날 게 뻔해 아니라고 딱 잡아 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났다. 가게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고 들떠서 잔뜩 말을 쏟아냈다.
“우핫! 우하하핫! 내 이럴 줄 알았어. 내 안목 어디 안 갔다니까. 오마이갓, 지저스, 내가 박경 씨를 실물로 보는 날도 다 있다니. 크하핫 기분이다! 우리 집 상품은 전부 헐값에 넘겨드리지요! 잘 오셨어, 잘 오셨어. 손님 오늘 땡 잡았습니다? 아차차차, 이런 말 뭐하지만 싸인 가능합니까? 아님 같이 셀카라도 한 방? 콜?”
하얗게 질려서 파들파들 떠는 경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지호는 방패처럼 경 앞에 섰다.
“작작 좀 하세요. 지금 애 놀라서 떠는 거 안보입니까.”
짜증을 숨기지 않고 바늘 끝처럼 날카롭게 나왔더니 가게주인이 본인도 오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머쓱해하기는……
“우어어! 그쪽, 박경 의붓아버지 되시죠? 인터넷뉴스에서 당신 인터뷰하는 거 봤어요! 이야, 아들 위해서 폰 하나 장만하나 봐요? 캬.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아버지지 아버지야. 아주 보기 좋습니다!”
……커녕 더 신나서 떠들어 댄다. 어째 가게 선택을 잘못했나싶어 지호가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는데 경이 소맷자락을 당겼다.
“왜?”
경이 유리박스에 있는 한 휴대폰을 가리켰다. 세련되고 얇은 두께에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고급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긴다. 가게 주인은 경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목청이 높였다.
“역시 우리 박경 씨가 뭐 좀 보는 눈이 있다니깐. 이 모델은 어제 출시된 그야 말로 최.신.형 스마트폰에요. 속도는 우사인 볼트 뺨치고 방수기능도 있는데다 용량까지 화끈해서 우리 수디 누나가 나온 영화도 실컷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는 거죠. 어떠십니까? 완전 맘에 쏙 드시지요? 출시일도 그렇고 이거 보니까 아주 박경 씨랑 소울메이튼데. 형이 꺼내서 보여줄까?”
장사꾼 말에 홀라당 넘어갔는지 경이 지호의 등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고 끄덕였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한껏 기대에 부풀어있다. 뭐,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쩔 수 없지. 어쩐지 사기당한 듯한 기분에 입 한쪽이 씁쓸했지만 지호는 뒤로 빠져줬다.
“개통은 오늘 안으로 금방 될 테니 걱정은 노노. 박경 아버님은 어떠세요? 괜찮죠? 딱이죠?”
과장스럽게 손짓하는 가게주인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지호가 툭 내뱉었다.
“경이가 마음에 들어 하면요.”
“감동적이네요!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겁니까아아아!”
흥분했는지 가게 주인이 탁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는 바람에 종이컵에 있던 커피가 흘러 넘쳤다. 제발 그 오버액션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 지호가 팔짱을 낀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이리저리 폰을 살피던 경은 결정을 내렸는지 지호에게 다가왔다.
“나, 아니 저, 이게 좋아요.”
“다른 기종 안 둘러 봐도 괜찮겠어?”
“네. 다 비슷해 보이고 전 이게 좋아요.”
윤택이 나는 검은색 폰을 내려다보며 경이 말했다.
“그거 흰색도 있는데 까만색은 너무 어두침침하지 않아? 형이 바꿔줄까?”
“아니요.”
경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선택도 끝났으니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다. 지호는 냉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가게 주인에게 쏘았다.
“그럼 계약서 가져오시죠.”
대리점 주인인은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에서도 한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피곤한 상대였다. 입 안으로 혀를 찬 지호는 세상을 전부 가진 듯 행복해하는 경을 바라봤다. 마치 분신처럼 핸드폰을 꼭 손에 쥐고 걷는 경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경이 행복하면 그걸로 됐으니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호는 걸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휴대폰은 샀고 다음으로는 옷을 사러갈까. 아니, 그 전에 점심을 먹는 게…….
차로 가는데 경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런가 싶어 지호는 경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아, 씨발 오늘 모의고사 완전 망했다!”
“새끼야 쪽팔리게 길 한복판에서 소리 지르지 마.”
“지랄. 너 존나 나한테 감사해야 돼. 오늘 PC방 누가 쏘는 건데.”
“병신아 그건 내기였잖아. 나보다 시험 못 봐서 쏘는 주제에 무슨.”
한 문장 단위로 욕을 섞어 쓰는 모습이 영락없이 딱 철부지 없는 고등학생이다. 시험 덕분에 학교가 일찍 끝났는지 대낮에 교복을 입고 시내를 누비는 모습에서, 지호는 학생들이 경의 또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마 박경도 저 무리에 섞여 있지 않을까. 입 안이 썼다. 경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또래 남학생들을 보는 탓에 더 그랬다. 부러움일까. 지호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경의 마음을 읽어내려 노력했다. 학교에 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친구가 필요한 걸까…….
“덥지?”
빨려 들어갈듯 학생들을 주시하는 경에게 지호가 물었다. 멍하니 있던 경이 정신이 돌아왔는지 얼떨떨해 하며 지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그래? 난 더운데.”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인가. 며칠째 이어지는 무더위에 아스팔트는 지글지글 끓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림자마저 더운 여름에 경의 얼굴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라 지호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어릴 적부터 참는 것에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백화점에 가지. 거기는 시원하다.”
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호는 차문을 열어주고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백화점 가본 적 없어?”
“……네.”
경과 같이 지내면 지날수록 점점 더 실감이 났다. 경이 19년 동안 지하실에 갇혀 살았다는 것을, 자유를 구속당하고 인권을 침해당했다는 것을.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백화점 전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지호가 먼저 한 일은 경을 데리고 1층 구석에 있는 생과일주스 코너로 가는 것이었다. 더워서인지 화 때문인지 갈증이 일었다. 지호는 메뉴판을 들며 경에게 무슨 음료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려 했다가, 먹어 본 적이 없어 취향도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 멋대로 주문을 넣었다.
“바나나 생과일주스로 두잔 주세요.”
“네에.”
종업원이 주문서를 가져와 작성하면서 경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동그란 안경테 안에 들어있는 눈동자가 탐정처럼 빛났다. 경의 얼굴이야 뉴스와 신문으로 잔뜩 팔렸으니 사람들이 경을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이해하면서도 지호는 벌컥 짜증이 일었다. 경이도 이제 평범한 인생을 즐길 때가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외출할 때마다 동물원 우리에 있는 원숭이 취급을 받아야하는지, 기분이 몹시도 더러워졌다. 지호는 아직까지도 가지 않고 서있는 종업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래, 박경이 맞으니…….”
“진짜 예쁘게 생기셨네요!”
대충 박경이라는 걸 인증해주고 멀리 보내려 했던 지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 예뻐?
“남자 맞죠? 여자도 아닌데 얼굴이 어쩜 이렇게 뽀얗게 하얘요. 어디 제품 쓰는지 알려 줄 수 있어요? 아, 나도 어릴 적엔 동안 소리 들었는데 갈수록 피부가 거칠어져서.”
종업원은 잡티 하나 없이 하얀, 아니 하얗기보다는 거의 창백하다는 표현이 맞을 경의 얼굴을 보며 방싯방싯 웃었다. 햇빛을 받지 못했으니 당연히 뱀파이어 못지않은 피부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예쁘다는 건… 주관적인 기준이니 태클 걸 필요는 없지만. 지호는 새삼 경의 얼굴을 다시 봤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 동글동글한 콧잔등, 마른 탓에 볼 살 하나 없이 쏙 들어간 턱선. 예쁘기보단 초췌한데. 지호는 턱을 문질렀다. 으음, 자세히 보면 요즘 여자들이 환장한다는 미소년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고맙습니다.”
익숙지 않은 호의에 경이 바르작거린다 싶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어?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냥 말 놔. 나 스물다섯 살이거든. 넌 고등학생?”
본인 입으로 동안이라더니 진짜 동안이었다. 종업원의 호빵처럼 말랑말랑한 볼과 윤기가 흐르는 입술은 아직도 십대 같다. 지호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경을 보고 아직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려면 적어도 몇 주는 걸리겠지.
“열아홉이다.”
지호가 대신 대답했다. 한창 경에게 푹 빠져있던 종업원이 그제야 지호에게도 눈길을 준다.
“아아, 형이세요?”
“아빠다.”
형이라니 무슨 그 무례한 말을. 못마땅하듯 대답한 지호는 그제야 경과 자신의 나이차이가 불과 열 살밖에 나지 않는 다는 걸 깨달았다. 10살에 애를 낳는 건 어불성설이니 형으로 오해받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 아빠요? 종업원은 지호와 경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면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몇, 살에 애를 낳으셨으면, 아니아니, 열일곱에 낳았다 치더라도, 저 얼굴이 삼, 삼십대 후반이라고? 경악하는 종업원과 아무것도 모른 채 눈만 깜빡이는 경을 보며 지호는 오늘 참 일진 더럽게 꼬인다고 생각했다.
아, 그냥 집에 돌아갈까.
더보기 |
〈암호닉> 새우깡
요즘 글이 잘써져서 좋습니다 :9 언제 또 슬럼프에 푹 빠질진 모르겠습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