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의연애 1
회사를 그만 둔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6시면 저절로 눈이 번쩍 떠진다. 나름 백수 생활을 즐기려 아침 운동도 나가봤지만 7년을 의자에 앉아있던 몸이라 움직이는 게 버거워, 공설운동장 한 바퀴만 돌고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요가를 끊어야 하나. 여전히 뭉쳐있는 어깨를 돌리며 베란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1년 전, 옆집과 꽤 가까이 붙어있는 베란다 때문에 입주를 해야하나 고민하다, 지긋한 본가에서 얼른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덜컥 계약을 해버렸는데, 우려하던 일이 생겼다. 아직 공기에는 담배냄새가 섞여있었고 옆집 남자의 바지 주머니는 불룩했다.
“오늘 일 안 가시나 봐요.”
“연차 냈어요.”
“아,”
“여행 가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쉬려고.”
방학 느낌 좀 내봐야죠. 남자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정장입고 나가던 모습을 떠올려 말 하니 직장을 다니고 있던 것이 맞았나보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 쪽은?”
“그만 뒀죠.”
“아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미안하다고 하길래 대충 손을 저어줬다. 힘들어서 그만 뒀어요, 말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내 힘의 정도를 담아내기에 가벼운 말이라 생각해서 그냥 말았다.
옛날 생각에 또 나 혼자 갑자기 진지해졌나, 생각이 들어 멍하니 정면만 보던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별안간 말을 걸어왔다. 힘들죠?
“그냥….”
“세상에 안 힘든 게 어딨어요ㅡ 다들 이러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 울어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 크기가 어떻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니까, 아 미안해요 제가 말을 잘 못 해요. 많이 지쳐보이길래.”
“아녜요. 고마워요. 그럼 좋은 휴가 보내세요.”
후다닥 베란다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크면서 정 주는 것에 벽이 생겨서 직장 동료가 생겨도 여자든, 남자든 사적으로 연락,만남 일체 갖지 않았다. 여주씨는 외롭겠네. 놀리는 듯한 얘기에 단단해진지도 오래다. 근데 왜 유독 이런 위로에만 단단해지지 못 하고 녹아내리는 지 알 겨를이 없다. 왜 나이 스물일곱이 되어서도 무뎌지지 않았는지.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눈물이 나올 때면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작은 소파에 앉아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꼭 감은 눈 사이에 터져서 비집고 나온 눈물이 손바닥에 묻었다. 쌓을 줄만 알고 뱉어낼 줄은 몰랐어서 눈물이 났다. 초면에 뱉은 그 말이 어디가 감동이어서, 어디가 위로라고 턱까지 벌벌 떨며 눈물이 나오는 지. 어쩌면 오랫동안 짊어진 쓰레기들을 손가락 하나로 무심코 툭 건드려 무너트려 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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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말 몇 마디 때문에 이틀을 멍하게 보냈다. 이름도 모르는 옆집 남자가 뭐라고. 믹스커피를 휘휘 저으며 베란다를 봤다. 왼쪽에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또 나와있나보다. 연기가 멎을 쯤에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니 역시나 있을 그 남자가 어, 한다. 한 동안 제대로 얼굴 못 보겠거니. 했던 내 걱정이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웃음이 피식 나왔다. 마주 웃는 그 얼굴에 몇 년씩이나 뭉쳐있던 눈이 녹았다.
“이쪽에 보조개 있네요.”
“네?”
자기 입 옆을 검지로 쿡 찌르며 말 한다. 살짝 웃었는데도 그 보조개가 보였나. 부끄러워서 볼을 몇 번 쓰다듬으니 예쁜데요 왜. 한다. 붙임성이 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전 요리 하던 게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잰걸음으로 총총 집안에 들어가는 남자를 보다가 그가 머물렀던 베란다를 바라봤다. 재만 남은 재떨이와 스폰지밥 모양의 휴지통의 조화는 이상했지만 그 남자와는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긴 했지. 입맛이 살아났는지 예전에는 고민조차 안 했던 점심 메뉴를 이젠 준비를 하려 한다. 내가. 냉장고는 안 봐도 텅 비어있을 것이고, 라면은 보기만 해도 토악질 나올 지경이었다. 그냥 계란 한 판 사서 오므라이스나 해먹자. 이게 내 결론이었다.
작은 계란 한 판을 팔에 끼고 터덜터덜 집으로 올라오니 누가 문 앞에 서있다. 층 수를 헷갈렸나, 하고 확인하니 분명 내 집이 맞았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니 뒤를 휙, 돈다.
“어! 밥 안 드셨죠?”
“아, 네.”
“그럼 이것 좀 드세요. 맛은 장담합니다. 제가 요리는 또 잘 해요.”
“안 주셔도 돼요, 이렇게 많이 주시면 모자를텐데.”
“일부로 많이 만들었어요. 아까 보니까 너무 마르셨더라구요.”
접시에 담긴 닭갈비를 내 품으로 쑥 밀어 넣고는 다시 되돌려 줄 틈 없이 후다닥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도 품에 있는 닭갈비와 뒤로 숨겼던 계란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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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바로 먹는 게 예의겠지. 1인분을 살짝 넘겨보이는 어마어마한 양에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안 챙겨주는데. 닭갈비 하나를 젓가락으로 찍어먹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밥솥에 주먹만큼 남은 밥을 쪼개고 쪼개서 닭갈비랑 같이 먹었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밥7에 반찬3 비율은 꼭 지켜서 먹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바뀌었나, 밥을 콩알만큼 먹는데도 맛있었다.
배가 터질 거 같은데도 꾸역꾸역 먹었다. 맛있기도 했고, 고마운 마음에 남길 순 없었다. 붉은 양념이 묻은 까만 플라스틱 접시를 헹구어냈다. 빈 접시를 갖다 주기엔 미안해서 저녁으로 계란말이 좀 해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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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과 계란요리 뿐이었다. 그 흔한 김치볶음밥도 제대로 못 했다. 중학생 때 늦둥이 동생을 대신 키우느라 연습했던 계란 요리가 고맙게도 지금까지 꾸준히 내 생계를 유지해주고있다.
그리고 늦둥이 동생 아닌 누구에게 처음으로 요리를 해 주었다.
“별 거 아니어서 미안해요.”
“아, 제가 계란말이 또 엄청 좋아하는데, 유독 계란말이만 못해요.”
“아….”
“맛있게 먹을게요. 고마워요.”
옆집 문을 노크하니 누구냐는 말 없이 문이 열렸다. 옆집 남자는 까만 접시에 계란말이를 든 내 모습을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보았다. 또 두 손은 입에 갖다대고. 이거 하나가 뭐라고 놀란 눈으로 봐 주는게 고마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계란말이 좋아해요. 그 말이 이렇게 기쁜 말이었나. 어깨를 바짝 세우고 집으로 들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도 자리에 계속 서있었다.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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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눈이 떠졌다. 7년의 기상 습관을 버리지 못 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상하게 눈은 떠졌다. 습관적으로 베란다를 바라보다 씻으러 화장실을 들어갔다. 근 일주일 동안 밥을 제대로 챙겨먹었더니 얼굴에 색이 돌았다. 7년 동안 모아 놓은 생활비는 지출이 거의 없었지만 그 일주일 새에 갑작스레 늘었다. 장도 봐서 반찬도 만들어보고, 맥주 몇 캔도 사다놓았다. 살도 좀 찐 것 같다. 고개를 숙여 흰 배를 내려다 보니 푹 꺼졌던 게 살짝 올라와있었다. <아까 보니까 너무 마르셨더라구요.> 일주일 전의 그 목소리가 기억 난다.
우유를 사러 갈까. 해서 대충 걸친 가디건 주머니로 오천원을 넣고 나왔다.
“어어,”
“아. 안녕하세요.”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던 정장 입은 모습을 한 옆집 남자가 먼저 나와있었다. 가디건만 걸친 모습이 부끄러워 괜히 옷을 여밀며 말을 붙였다.
“지금 출근하세요?”
“네. 벌써 지쳐요. 가기 싫어요.”
“힘들죠, 이틀만 더 버티면 주말이에요.”
“그래서 억지로 웃고 있어요.”
2층짜리 계단을 나란히 계단을 내려오며 말 했다. 가까이서 보니 잘생긴 얼굴이 푸석해져있었다. 이 사람도 꽤나 힘들게 살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걸어가는 방향을 보니 나와 정 반대인 것 같아 먼저 떨어져서 인사를 했다.
“저는 이 쪽으로 가요.”
“그럼 저는, 후, 가겠습니다.”
“…오늘도 잘 버텨요.”
나는 언젠가 받아본 적 있는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짧게 뱉은 한숨에는 모든 게 섞여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또 보기 좋은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얼굴에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몇 걸음 걷는데, 쩌렁한 목소리가 나를 멈추게했다.
“그….”
“네?”
“어.. 이따 저녁에 베란다에서 맥주 한 잔 할까요?”
딱 그 다운 제안에 웃음이 터졌다. 저녁에 베란다에서 맥주. 네. 좋아요. 살짝 크게 대답해주니 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었다가 다시 쫙 펴서 흔들었다. 이따 봐요! 깨끗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요 근래 웃는 일이 잦아졌다. 우유를 사러 가는 내내 올라가있는 볼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