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들어주세요.
“우리…,”
사귀자.
민현은 자신의 신발코가 닳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이었다. 나, 너 친구로 말고 곁에 두고 싶어. 하고.
손을 내미는 민현의 손이 보였다. 살짝 떨리는 손이 ‘날 잡아줘.’하는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여주는 제 심장이 명백히 뛰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동 없는 여주의 손. 민현의 손은 그대로 여주에게로 향한다.
부드럽게 손을 잡아오는 민현의 손길에
여주의 손은 그대로 민현에게로 닿는다.
내가 널 좋아했음에도
내가 널 사랑했음에도
너의 마음을 받아주기 힘들었던 건
너의 마음을 돌려주기 힘들었던 건
난 우리의 끝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난 우리의 끝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너와 나를 정의하면
“너네 사귈 줄 알았어.”
주위 사람들이 민현이와 나를 정의하는 한 문장.
사귈 줄 알았다, 예상하고 있었다, 너네는 사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그런.
시끄럽게 술잔을 부딪치며 말을 잇는 친구들에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뒤통수를 매만지는 황민현. 그리고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나.
황민현은 우리 사이가 ‘연인’으로 결정되고 나서도 전과 다름없이 집 앞까지 날 데려다준다.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우리가 처음 친구로 만난 삼 년 전에도 우리가 정말 친한 친구로 지내온 불과 일주일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들어가.”
“너 가면 들어갈게.”
“추워. 감기 걸린다.”
“그래.. 들어가서 연락할게.”
황민현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친한 친구임에도 선을 넘지 않는 친구여서 좋았다. 사소한 행동에도 매너가 배어있는 친구여서 좋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했다.
많이 좋아하고 있다.
“따뜻하다‥”
방으로 들어왔다.
따쓰한 방 온기. 황민현 같아.
그새 잘 들어갔냐며 문자를 보내온 민현이. 픽 웃음이 났다. 추운 거 제일 싫어하면서 또 손 얼게 집 가면서 연락은.
매 순간마다 황민현이 이제 내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면 떨렸다. 내가 지금까지 혼자 마음을 싹틔운 건 아니었구나. 민현이도 나를 좋아했구나. 괜히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 생각이 있고나서는 항상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짐을 느꼈다.
자다 일어난 적도 있었다.
민현이가 사라질까 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황민현이 내 옆에서 없어질까봐.
헤어지자.라는 말 한마디면 끝인 우리 둘의 사이가
겁이 났다.
민현이와 흔한 연인 사이로, 헤어짐을 끝으로 다시 못 보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그런 친구 사이가 좋아. 나랑 너는.
*
민현이는 오늘도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 이불 꼭 덮고 자. 달달한 말은 빼놓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쳐다보다, 굳은 내 표정을 마주하면 사막 여우처럼 예쁘게도 웃는다. 들어가서 연락할게. 끄덕끄덕.
하지만 나는, 세워져 있던 차의 창에 비친,
뒤를 돌아선 나에 얼굴을 굳히는 민현이를 보았다.
언제 황민현이 내 이상 징후를 알았는지는 모른다.
난 황민현이 얼른 우리 사이를 돌려놓기 바랐을지도
그래서 황민현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헤어지자고,”
“먼저 너에게 말하는 게‥"
네가 바라는 거지?..
내가 지금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인 거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황민현은 서글프게도 내게 물었다. 음성에도 물기가 있었다.
내게 고백할 때와 같이 황민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날 쳐다보지 않았다. 내게 고백을 말할 때도 이별을 고할 때도 한결같았다. 황민현은. 하지만 민현이는 이번에는 달랐다.
항상 내 등이 보이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걸음을 하지 않았던 너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선다.
그렇게 황민현과 이별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다.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우리에게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3년 동안 행복했던 친한 친구였던, 황민현과 나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이.
그렇게 며칠을, 몇 달을 울며 보냈다.
보고 싶은 황민현에게 닿지 못한 마음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커지기만 한다.
*
매일 주고받던 민현이와의 연락은 하지 않은지 오래다.
계절도 지났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 긴 시간 동안
나 바보인가, 생각도 했다.
이렇게 아프면서, 이렇게 좋아하면서 왜 내가 먼저 헤어지자 신호를 보냈을까.
내가 그렇게 내게 물으면
나는 언제나 내게 경험하지 않은 아픈 기억들을 주입하듯이 대답했다.
민현이와 평생 못 보고 지낼 수는 없다고.
헤어짐을 한 연인의 사이로 우리를 정의하기 싫다고.
베개를 한껏 적시고 나면 아침이 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일을 하며 내 하루를 보내며 시간을 보냈다. 사귈 줄 알았다, 예상하고 있었다, 너네는 사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라고 말하던 친구들은 어느새 민현이의 근황을 내게 묻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민현이를 잊기로 했다.
하지만 3년 동안 행복했던 친한 친구였던, 황민현과 나로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나를 향한 민현이의 마음이 정리됐을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아니었다.
바보 같고, 머저리 같지만, 민현이만 생각하면 아직도 떨리고 동시에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너. 소개팅 나가볼래?”
우리 황민현이를 찬 나쁜 년이 긴 해도.
반 폐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따가운 시선보다 뒤에 붙인 친구의 말이 따갑게 울렸다. 자기가 찼으면서 괜히 나 나쁜 년 만드네 황민현은. 날 배려해줬기에 자기가 차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서 별말 하지 않기로 했다.
“바보. 이렇게 힘들 거면 왜 먼저 차길 차?”
내가 찬 거 아닌데. 정확히 말하면 황민현이 날 찼다. 내가 원인 제공은 한 건 확실하지만.
친구는 내 모습에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음식들을 주워 먹는다. 그니까, 너도 그만 정신 차려라. 엉?! 면전에 젓가락을 들이댄다. 얼른 먹어. 빨리.
“황민현도 소개팅 나간다더라.”
그렇구나.
깨작거리던 젓가락질은 감정 없는 대답을 한다. 그러다 젓가락질이 굳어진다. 시선이 흔들림이 느껴졌다. 소개팅.. 황민현이..
가슴이 철렁 거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개팅을 직접 한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항상 주위에서 부탁이 오갔지만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넘어가곤 했던 민현이었다.
친구의 말에 고개를 두 어번 끄덕였다. 다행이네. 하고.
민현이도 다른 사람을 만나보려고 하는구나.
민현이도 나와 친구였던 그 때로 돌아가기 위해서.
*
그렇게 나도, 소개팅 자리에 앉아있다.
솔직히 상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민현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딱히 이성에 대해 관심이라고 털 끝만큼도 없었다.
황민현이 내 옆에 항상 있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던 상대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친구가 애써 잡아준 소개팅인데.
상대는 오지 않는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 딱 질색이다. 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 내가 무슨 소개팅이냐.”
그렇게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카페 문을 여는 밝은 종소리가 울렸다.
/ 단아별입니다.
황과장도 아직 다 안 올려놓고 일만 벌려놓는..... 왜 민현이 글만 쓰면 단편이 상중하로 길어지는 걸까요..
이번 글은 중편 없이 바로 상편으로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