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정국 - Oh holy night
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W. 달감
35
[갑자기 회사에서 야근하라고 하네. 석진이 형이랑 먼저 밥 먹고 있어. 미안해.]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정국에게서 온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은 야근이 없어서 집에 일찍 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었는데, 회사 일이 많이 바쁜가 보다.
일찍 보고싶은 마음에 조금은 시무룩해졌지만, 전정국도 밤까지 일하는 게 많이 힘들 걸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나는 시무룩한 마음을 숨기고 사랑을 가득 담아 문자를 입력했다.
[나는 괜찮아! 여보도 몸 챙기면서 일해. 사랑해♥]
문자를 보낸지 일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 ♥ ]
짧고 간략한 단 하나의 전정국다운 하트가 너무 귀엽게 느껴져 문자만 봐도 웃음이 났다.
"뭘 히죽거리고 있어?"
그때 김석진이 거실로 나오며 내게 물었다.
외투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나가려는 것 같았다.
"어디 가?"
"나 급한 약속이 생겼어. 오늘 전정국 일찍 온다고 했으니깐 나가도 괜찮지?"
김석진은 전정국이 야근이 생겨서 늦게 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김석진과 전정국은 언제 어머님과 갈등이 생길지 모르니 날 최대한 이 집에 혼자 두려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게 항상 미안했고 나 때문에 김석진이 약속을 취소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전정국이 늦게 온다는 걸 말하지 않고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어주었다.
어차피 오늘 결혼 관련 일정은 모두 미뤄졌고, 어머님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김석진이 나가고 난 뒤 나는 옷을 갈아입은 후 식사를 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민윤기와 박지민을 만나 기분 좋았던 하루를 다시 생각하며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섰지만,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 어머님에 나는 콧노래를 멈추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기분 좋아 보이는 구나."
"..."
"뭘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있니? 식사하려고 내려온 거 아니니? 앉아라."
"네."
어머님의 나를 향한 날이 선 태도가 또 나를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왜 나는 항상 이렇게 어머님 앞에서 경직되어 버릴까,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 코앞에서 이렇게 굳어버리는 게 이상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수저를 들고 음식을 입에 넣고 있긴 했지만,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식사를 끝내야겠다는 몸의 움직임만이 느껴졌다.
"사돈어른 뵙고 왔다면서?"
"네"
"혹시나 쓸데없는 부탁드리고 온 건 아니지?"
"무슨... 부탁이요..?"
"너네 엄마. 결혼식에 참석시켜달라는 부탁."
어머님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우니 제발 엄마 얘기까지는 꺼내시지 않기를 바랐는데
어머님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내가 제일 상처받을지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걸 알기 때문에 일부로 이렇게 '엄마' 라는 가장 아픈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신 것이겠지.
"너가 설마 그렇게 생각 없는 부탁을 드리진 않았겠지.
부탁을 했다 해도 사돈어른이 생각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시진 않았겠지.
기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고위층 분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정신병 걸린 사람을 데려온다는 상식 밖에 일을 저지르진 않겠지?"
나에게 지우고 싶을 만큼 아픈 상처가 있냐고 묻는다면 난 두 개의 상처가 있다고 대답할 거다.
하나는 우리 엄마가 정신병자라고 나와 엄마가 무시당해 생긴 상처.
두 번째는 시어머님에게 괴롭힘을 당해 생긴 상처.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감당하기 힘든 건 저 두 개의 상처가 합쳐졌을 때 생긴 상처이다.
바로 지금처럼 시어머님이 엄마를 정신병자라고 무시할 때 생긴 상처.
난 그 순간은 내가 겪는 순간들 중 가장 고통스러웠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고,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울음소리를 참지 못할까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난 항상 그렇게 숨고 피하고 참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눈물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어머님은 개의치 않고 식사를 계속하셨다.
어머님의 수저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점차 오늘 아침 이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같은 수저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침엔 전정국과 김석진의 웃음소리, 그리고 나의 웃음소리가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정말 행복했는데
똑같은 공간이고 똑같은 자리인데 왜 나는 지금 울고 있지?
아니, 지금 이 순간 전까지 나는 오늘 정말 행복했는데
박지민, 민윤기. 오랜만에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서 선물 같은 하루였는데 왜 나는 지금 울고 있지?
"그래 임마, 그냥 그렇게 웃고 살아. 풀 죽어있는 것보다 그렇게 활짝 웃는 게 너한테 훨씬 어울려."
"탄소 너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앞으로 계속 하고싶은 말 다하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울고 싶으면 울고 그러라고 했잖아."
날 행복하게 해주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시에 내가 또 이렇게 울고 있다는 사실에 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날 위해 따듯한 말들을 건네주었는데 나는 왜 또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걸까.
내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고마운 사람들의 노력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해주었던 그 따듯한 목소리들을 쓸모없는 소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내게 준 따듯한 위로, 걱정,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뭐라고 한다고 절대 기죽지말고.
못 참겠다싶으면 그냥 나 믿고 대들어."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나의 감정에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정신병 걸린 사람이 아니라 내 엄마에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어머님의 귀로 들어간 나의 목소리에 어머님은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고 날 바라봤다.
19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어머님의 눈을 노려보는 것도
날 향한 폭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것도
태어난 이후로, 어머님을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머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에 적잖게 충격을 받고 있는 듯했다.
"너 지금 나한테 말대꾸...."
"정신병은 죄가 아니에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정신병을 부끄러워하는 어머님이란 사람이 훨씬 더 창피하고 잘못된 사람이에요."
"뭐?!"
"우리 엄마 정신병은 창피하고, 아동학대범인 본인은 안 창피하세요?"
19년 동안 참고, 참고, 또 참아왔던 말들이었다.
빨간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지만,
그동안 어머님을 흐뭇하게 했던 굴복의 눈물이 아니었다.
19년 동안 쌓여있던 분노, 억울함, 슬픔 등의 감정들이 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듯했다.
그 소용돌이를 표현하는 나의 눈물과 목소리가 두뇌보다 빨리 눈과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 아동학대범...?!"
"다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시죠? 몰라서 말 안 했다고 생각하시죠?
유치원 때 단둘이 남으니깐 이유 없이 갑자기 제 뺨 내리치신 거요?
초등학교 때 방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깜깜한 방에 6시간 넘게 가둬두신 거요?
중학교 때 실수인 척 끓는 물 쏟아서 제 팔에 화상 입히셨던 거요?
저는 똑똑히 하나하나 전부 다 기억해요.
상처로 남아서 머리에 가슴에 다 박혀있어요. 어머님 볼 때마다 문득문득 다 생각나서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워요."
"..."
"어머님의 존재 자체가 저한테는 트라우마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날 괴물, 쓰레기 보듯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19살인 지금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어렸던 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어머님이 경악을 하듯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여자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떨구던 그 나약한 아이가 맞는 건지 몇 번을 확인하는 듯했다.
이 세상 귀신, 악당 그 어떤 존재보다 나에게 무서웠던 시어머니.
그동안 시어머니를 향했던 나의 많은 감정들이 하나하나 살아났다.
공포, 두려움 그 사이 어딘가에 숨어있던 며느리로서의 애틋함도.
"19년을 버텼어요. 19년을 참았어요. 왜냐구요?
어머님이 너무 무서워서 감히 대들지 못했던 것도 맞아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제 어머님이시잖아요. 전정국 어머님이시잖아요... 전 어머님의 하나뿐인 며느리잖아요....
그래도 어머님한테 며느리로써 인정받고 싶은 마음 가지고 있었어요....
제발... 저를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람 보듯이 바라봐 주실 수 없을까요....?"
가장 부탁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머님의 따듯한 눈빛을 받는 사람들이 난 항상 부러웠다.
그래도 난 며느리니깐 내가 조금 더 크면, 내가 조금 더 잘하면 언젠가 어머님이 날 따듯하게 바라봐 주지 않을까.
어렸던 나는 그렇게 헛된 바램을 품고 있었다.
19살에는, 따듯한 눈빛은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 보듯이만 바라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거였다.
나의 간절한 부탁을 끝으로 부엌에는 정적이 흘렀다.
마음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끝마친 건지 더 이상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감정의 여운이 남아 눈물은 계속 흘렀다.
흐르는 눈물 뒤로 눈매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어머님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입가도,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충격이 큰 듯 어머님도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계셨다.
식탁을 사이에 둔 우리가 마주 본 채 무거운 정적을 유지하고 있을 때
묵직한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니 시어머니는 그렇게 하나하나 다 얘기해 줘도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야."
"..."
"고집 세고, 고약하고,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사람이지."
눈물이 내 눈동자를 가려 시야가 흐릿했다.
흐릿한 시야의 실루엣의 주인이, 먹먹한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전정국이라고 순간 확신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정국과 비슷한 외관은 분명했지만 묵직하고 깊은 분위기는 달랐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부엌으로 들어오는 그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그분이 또렷하게 보였다.
전정국의 아버지, 시어머님의 남편.
나의 시아버님이었다.
"내 아내가 이것만은 꼭 알았으면 해.
제삼자가 들었을 때 이 상황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사람은 본인이라는걸.
하지만 내 아내는 또 자기 잘못은 하나도 인정 안 하고 그저 며느리 탓하고, 미워하겠지.
왜냐면 아까 말했듯이 내 아내는 고집 세고, 고약하고,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니깐."
"..."
"미안하다, 며늘아가.
이런 아내를 둔 내 잘못이야."
검은 정장으로 둘러싼 연로한 몸에서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그 위엄은 이곳의 분위기를 점잖고 엄숙하게 만들었다.
주름진 따듯한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졌고,
그 손에 살짝 놀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시아버님은 날 안심시키듯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을 때 접히는 눈의 모양이 전정국의 것과 똑같았다.
어머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곧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부엌을 떠나버리셨다.
아버님의 묵직한 말 몇 마디가 정확히 어머님의 심장을 관통해 상처를 입힌 게 분명했다.
아무리 어머님이라도 아버님의 말 몇 마디면 항상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일부러 상처받으라고 한 말이다.
저 여자는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니 저렇게 상처라도 좀 받아봐야지.
걱정 말거라. 오늘 사 온 명품 몇 개 던져주면 빨리 풀리는 사람이니."
"..."
"너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푹 쉬거라."
아버님의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이 이제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덕분에 스스로도 많이 놀란 마음이 점차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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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정리한 뒤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 발코니로 향했다.
아버님은 언제나 그러셨듯 흔들의자에 앉아 서울 주택가의 야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들어온 걸 눈치채시고는 옆에 놓아두셨던 꽃바구니를 나에게 건네셨다.
"출장 선물이다.
네 시어머니는 명품 선물을 좋아하지만,
넌 이런 걸 더 좋아하잖니."
들고 있는 꽃에서 나는 향기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버님은 잦은 출장으로 해외에 계시는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선물을 사오시곤 하셨다.
아주 어렸을 땐 아버님이 해외에서 돌아오시는 날이면
나와 전정국은 기대에 가득 차 아버님을 기다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매번 아버님은 오늘처럼 내 기대에 딱 맞는 선물들을 들고 오셨다.
"너에게 결혼이라는 큰 중요한 삶의 부분을 내가 뺐어갔으니
난 항상 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주고 싶었단다."
"저에게 정국이를 주셨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나의 말에 아버님은 기분 좋게 허허, 하고 웃으셨다.
내가 어릴 때부터 참 좋아했던 담백한 웃음이었다.
아버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잘했다.
서프라이즈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알리지 않고 왔는데 이런 상황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사실 처음부터 듣고 있었지만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어.
예전과 다르게 너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게 정말 기특하게 느껴졌단다."
"..."
"옛날부터 내 아내는 자신이 널 미워하고 괴롭히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두 알고 있었단다.
사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널 쳐다보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네가 아주 어릴 때는 몰래 사람을 붙여서 네 시어머니를 감시한 적도 있었고,
걱정되는 마음에 정국이를 따로 불러서 네 아내니 네가 잘 지켜야 한다고 당부도 하곤 했었단다.
하지만 내가 제일 걱정이었던 건 그 앞에서 잔뜩 기죽어버리는 너였어.
언제까지 정국이나 내가 네 옆에 하루 종일 붙어서 지켜줄 수는 없잖니.
난 네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극복하길 바라왔단다."
아버님이 날 많이 예뻐하시고 아끼셔서
아버님이 계시는 날에는 어머님의 괴롭힘이 줄어든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아버님도 모두 알고계셨다는 게 조금은 놀라웠다.
하지만 날 더 놀라게 한 건 '나 스스로' 라는 말이었다.
"네 시어머니는 쉽게 바뀌지 않을 거다.
너가 옳은 말을 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또 널 미워할 거야.
하지만 그런 시어머니를 대하는 너 자신은 바뀔 수 있단다.
널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널 어떻게 생각하고 널 어떻게 대하던
당당하게 너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거란다.
난 항상 너가 이걸 스스로 깨닫길 바랐어."
"..."
"그리고 이걸 절대 잊지 말거라.
널 미워하는 사람보다 널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많단다.
널 미워하는 사람이 아닌 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해다오."
내 생각과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말들이었다.
나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정국이나, 아버님,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해 어머님을 피하려고만 했었다.
나 스스로 변화해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해주고 응원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모욕하는 시어머님의 말보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에 말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더 당당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냥 앞으로 나 믿고 대들어버려라."
큰 깨달음과 감동을 얻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자
아버님이 날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그 말에 웃음이 터진 내가 환하게 웃으며 아버님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 말 정국이가 저한테 똑같이 했던 말이에요."
"허허허, 그러냐?"
또 아버님의 웃는 모습에서 전정국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외관뿐만 아니라 멋진 마음, 생각까지 전정국은 정말 아버님 판박이였다.
그렇게 아버님을 바라보며 전정국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발코니의 문이 열리고 진짜 전정국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며느리가 더 좋으시죠?
연락 한 번 없으시더니, 며느리 먼저 보러 오셨네요."
"해외에 오랫동안 가있어도 전화 한 통 없는 매정한 아들보다
꾸준히 전화하면서 안부 묻는 며느리가 훨씬 좋은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내 눈에는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괜히 틱틱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런 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인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곧 전정국이 내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그 꽃은"
"아버님이 선물로 주신 거야."
"그 촌스러운 꽃 버리고 이걸로 바꿔."
전정국이 내가 들고 있는 꽃바구니를 내려놓게 하고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내게 쥐여주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전정국의 꽃다발에 나는 깜짝 놀랐다
퇴근하는 길에 나한테 선물하려고 사온 듯했다.
"촌스러운 꽃? 이놈아, 넌 이 앞 꽃가게에서 몇 만원 주고 샀겠지만
난 유럽에서 몇 십만 원 주고 사온 거다.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선물은 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죠."
"전 둘 다 좋으니 싸우지 마세요!
우연이라도 이렇게 같은 날 꽃 사온 거 보면 정말 둘이 생각하는 것까지 꼭 닮은 것 같아요."
"저런 놈이랑 닮았다니 싫다."
"저도 싫거든요."
나는 아버님과 전정국을 바라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둘이 이렇게 티격태격 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 재밌고 좋았다.
내가 항상 공포의 대상으로 느꼈던 이 집에서도 가끔씩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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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 봐. 선물이야.]
내 방에 돌아와 전정국과 아버님이 선물해준 꽃을 꽃병에 옮겨 담고 있었는데
씻고 오겠다던 전정국에게서 도착한 문자에 어리둥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을 보라니 창밖을 보라는 건가?
나는 큰 창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가리고 있는 벨벳 커튼을 양옆으로 걷어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하얀 눈들이 검은 밤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펄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눈을 참 좋아하는 나였다.
전정국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눈이 오는 걸 발견하자마자 '선물'이라고 문자를 보냈나보다.
조금은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전정국이 이 눈을 내리게 만들어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려와 같이 눈 맞자]
한참을 창가에 서서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눈에 담고 있었는데 또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대충 재킷만 걸치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보고 싶은 마음에 복도, 계단, 거실, 현관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정원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꽃들이 가득한 정원 가운데 선 전정국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눈 속에 서 있는 전정국은 오늘도 여전히 참 예뻤다.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들 사이를 걸어 전정국에게 다가갔다.
꽃들도 눈으로 덮여 하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이구, 또 이렇게 춥게 나올줄 알고 내가 준비했지."
전정국의 손에는 하얀 목도리가 들려있었다. 전정국의 목에 두르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허리를 숙여 내 재킷 지퍼를 끝까지 올린 후에 목도리를 내 목에 걸고 정성스럽게 매듭지어주었다.
너무 꽁꽁 싸매줘서 내 눈만 겨우 빼꼼 나왔지만, 그런 나를 내려다본 전정국은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우리는 정원 가운데 벤치에 나란히 앉아 펄펄 내리는 눈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매년 눈 내리면 너가 나한테 같이 눈 맞으러 가자고 달려왔었잖아."
"맞아, 너 귀찮다고 툴툴거리면서도 항상 나랑 같이 맞아줬었지."
"제일 좋아하는 계절 뭐냐고 물어보면 넌 눈을 볼 수 있는 겨울이라고 했었는데...
그래서 나도 어느샌가 눈이 내리면 너 생각부터 하고 있더라."
"그래서 눈 내리자마자 이렇게 같이 맞자고 내려오라고 한 거야?"
"응. 나는 너가 좋아하는 거 다 하게 해주고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려 전정국을 바라보았다. 전정국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바라보고 있는 전정국의 반짝이는 눈은 펄펄 내리는 하얀 눈만큼 아름다웠다.
전정국이 갑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반듯하게 접어놓은 종이 세 장이었다.
전정국은 그 종이를 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장에는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집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파란색 지붕에 하얀색 벽돌로 쌓인 집이었다.
'파란색 지붕에 하얀색 벽돌로 쌓인 집에서 살고 싶어.'
오키나와 관람차에서 미래를 상상하며 내가 했던 말을 전정국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서툰 그림 솜씨일지라도 열심히 그리고 색칠했을 전정국을 생각하니 귀여워서 웃음 새어 나왔다.
그러다 뒤에 종이 두 장이 더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뒤로 넘겼다.
두 번째 장에는 전정국이 그린 그림집이 진짜 집이 되어있었다.
전정국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입체적인 진짜 집의 모습으로 만들어 프린트한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왔던 그 파란색 지붕에 하얀 벽돌집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세 번째 장으로 넘겨보자 구체적인 설계도와 내부 구조도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나는 꿈꿔왔던 집이 담겨있는 이 종이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눈으로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다.
"건축가 분한테 내 그림 보여드리고 이런 집 짓고 싶다고 상담받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어.
물론 지금 당장 이 집을 짓겠다는 건 아니야.
우리도 이제 곧 회사에 정식 출근하기 시작하면 돈 벌기 시작할 거고,
부모님이 그냥 주신 돈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번 돈으로 이 집 만들고 싶어.
그래서 우리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자."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하게 해주고 싶다는 전정국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가듯 말했던 나의 소망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현실로 만들어준 전정국의 선물이,
또 전정국이 만들어주고 있는 우리의 미래가, 전정국의 예쁜 마음이 날 가득 행복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전정국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
"정국아, 오늘 무슨 날이야? 아까 꽃도 사 오고, 이런 멋진 선물도 준비하고?"
"응. 무슨 날이야."
웃으며 장난처럼 던진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전정국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날이라니? 그럼 나만 기억 못 하는 건가?
머릿속으로 많은 기념일들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어서 당황하고 있을 때
내 손 네 번째 손가락을 깊이 감싸고 들어오는 촉감이 느껴졌다.
"내가 너한테 청혼하는 날."
"..."
"나랑 결혼해줄래?"
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이상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의 결혼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이미 우린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였고, 우린 이미 부부였다.
그렇기에 결혼해주겠냐는 질문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정국이 나에게 청혼했다.
그 청혼은 우리가 진짜로 결혼한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기업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우리가 정말 사랑해서 우리는 결혼한다.
우리에게 더 이상 정략결혼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다.
고개를 들어 전정국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승낙의 의미가 담긴 키스였다.
내 손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진 전정국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반지 가운데에 박혀있는 작고 투명한 보석은 지금 내리고 있는 눈송이처럼 반짝였다.
이 반지를 볼 때마다 아름답게 눈 내리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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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티가 아파서 브금이랑 짤이 안뜰까봐 걱정이네요ㅠㅠ
많이 부족하지만, 힘들때마다 독자님들 댓글 보면서
정말 힘 많이 얻었고, 더 열심히 쓰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어요
35화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음화는 마지막화로 찾아뵙겠습니다! (주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