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이 공주의 풀린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한동안 울었는지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부었다. 사실 또 미안할 일을 했다고, 그리 고백을 하러 왔는데. 황제의 귀에 들어갔으니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므로 제가 먼저 말해야만 했다. 그런데 울고 있는 공주를 달래주다 결국 말하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우는 공주가 가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그런 말을 생각할 틈도 없이 머릿속이 하얘졌다. 태형이 조금씩 뒤척이는 공주에게 이불을 당겼다.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이른 새벽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긴 했으나 그 소리가 작아 그것이 도화궁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할 방도는 없었지만 창밖이 푸르스름한 것을 보니 조금씩 동이 트는 것 같았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는 것을 감안하면 어젯밤부터 꽤 오랜 시간을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부모님께 말하지 않고 밤을 새웠는데, 혼이 나려나. 태형이 쉬지 않고 느리게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단향이 은은하게 나는 부드러운 것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태형이 조금씩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고생이 심했으니 방해 말고 편히 자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행여나 제 조그만 움직임에 깨어날까, 몸을 틀 때마다 흠칫하고 몸을 멈췄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태형이 공주의 자는 얼굴을 흘끗댔다.
“또 올게.”
입모양으로 들리지 않게 말했다. 바깥은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도화궁의 입구는 어김없이 관군이 지켰다. 병조 판서가 명을 거두지 않은 까닭에 교대를 거쳐 가며 자시부터 해시까지 도화궁 출입을 통제했다. 도화궁 나인들과 정국이 드나드는 것은 교대와 시간이 맞물려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상궁과 나인들이 이따금씩 궁금증을 자아냈을 뿐. 태형은 그 탓에 담을 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주를 만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으니까.
태형이 나가는 것을 관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연못 쪽 담으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커다란 은행나무에 올라가 도성을 구경한 전적이 있어 담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형이 매끄러운 담에 신을 올리려다 멈추었다.
“…어디 가요?”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태형이 몸을 정자세로 바꾸곤 고개를 돌렸다. 잠든 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온 공주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편하게 자라고 나온 건데.”
“어디 가냐고요.”
“…집에.”
“근데 왜 거기로 나가요?”
태형이 뒷목을 긁적였다. 이거 알면 공주가 싫어할 거 같은데. 그러니까, 그건….
황녀(皇女)
十八
밀려들던 잠이 어스름하게 동이 트는 새벽녘과 함께 깼다. 졸린 눈을 두어 번 끔뻑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큰 보폭으로 걸었다. 어느새 담장 쪽에서 달려온 김태형은 내 팔목을 덥석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좁은 마당 끝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잠깐만, 공주야.”
“…왜요.”
도화궁 앞에 관군이 있다고 했다. 그들의 출입통제 때문에 너무 늦게 왔다고. 담장을 넘을 생각을 했다고. 내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김태형, 오라버니, 정국이, 도화궁 나인들. 관군을 세울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이는 이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 담장을 넘어 도화궁으로 들어온 김태형이 관군을 세웠을까. 아니, 오라버니였다. 나를 지키겠다던.
어릴 적 오라버니에게 좁은 궁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싫다며 투정한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는 말없이 눈을 맞추며 모든 것을 들었다. 나 하나 지키겠다고 혼자 만든다며 오라버니에게 비수를 꽂을 때도 오라버니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 열여덟 해 만큼의 미안함이 담긴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국이를 보내 주고, 김태형을 살린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관군을 세운다니. 그것도 궐 안에서.
“무슨 뜻이 있으실 거야.”
내 팔을 꼭 잡던 김태형은 급기야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김태형을 올려다보며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었다.
“비켜요.”
“내 말 듣자. 응?”
“…나 열여덟이에요. 내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해요.”
“…….”
“근데, 너무 지나치잖아요.”
오라버니의 걱정은 모르는 게 아니었으나 관군을 세우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더는 가슴에 못을 박고 싶지 않았는데, 오라버니는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건데. 내 손짓에 조금 밀려난 김태형을 뒤로 하고 쪽문을 열었다. 책으로만, 이야기로만 보고 듣던 관군의 복색이 눈에 들어왔다. 등을 돌린 채로 보초를 서던 두 남자가 문소리를 듣고선 몸을 돌렸다. 놀란 기색이었다.
“…뭐해요?”
“…아, 여기 출입을 통제…,”
“여기 왜 서있는 거냐고요!”
두 남자 중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도화궁을 나왔다.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궐 안 어딘가로.
공위청(攻僞廳). 거짓을 처벌하는 관청이라는 뜻이었으나 대체로 잘못한 죄인들을 처벌하는 곳이었다. 살인과 같은 큰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이 불려왔지만 요즘 들어선 도성이 잠잠하기도 하였고, 섣불리 무죄인 백성을 처벌해선 안 되었기에 불려오는 일이 적었다. 넓은 공위청의 마당에 조그만 나무 의자 하나가 세워졌다. 터덜터덜 맨 발로 걸어온 여인이 그 낡은 의자에 앉았다. 머리칼은 산발이었고, 흰 옷은 얼룩덜룩해졌다.
“고개를 들라.”
석진이 여인의 앞에 걸어와 멈춰 섰다. 궐 안에선 으레 고집하던 존칭조차 버린 채였다. 석진은 죄인인 여인에게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인은 석진의 말에도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윤 가(家) 수아.”
“…….”
“고개를 들라.”
석진의 옆에서 얼음장 같은 물을 들고 있던 남자가 물을 뿌릴 생각으로 움직였으나 석진이 그를 제지했다. 제 이름을 들은 여인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구설(口舌)의 죄로 자숙 중이었던 수아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리 대하느냐….”
목소리가 갈라졌다. 간밤 공위청 관리들에게 호되게 당한 탓이었다. 수아가 공위청 관리에게 하는 말인 듯 하대했다. 석진은 무덤덤하게 수아를 내려다봤다.
“허면, 나는 누군지 아느냐.”
“……폐, 폐하.”
수아가 석진의 날카로운 말투를 듣곤 고개를 들었다. 양반가 규수의 고운 얼굴이 처참했다. 그녀의 집에선 황명으로 궐에 불려간 줄만 알지, 이리 고문을 당하고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수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명이라기에 궐 사람과 동행했는데, 갑작스럽게 고된 일을 겪을 줄이야.
“구설의 죄는 어떤 벌을 받는지 아느냐.”
석진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천천히 닦으며 말했다. 빛나는 검에 석진과 수아의 얼굴이 비쳤다. 수아는 황제의 질문에 대답을 망설였다. 구설 죄가 이런 벌을 받아야 했었나. 내 시부(媤父) 될 사람이 사법부의 대사였는데.
“…가택에서 자숙하는 것으로 아옵니다.”
수아가 아는 바로는 그러했고, 연좌제에 의한 구설의 죄인 제 아비가 집에 머물고 있었다. 석진이 얼핏 웃었다.
“아는 바가 맞다.”
“…….”
“허면, 황녀에 대한 구설의 죄는 어찌 다스리는지 아느냐.”
“……예?”
석진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가 ‘황녀’이야기를 듣고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 태형이 말한 대로 황녀에 대해 발설한 윤 씨 일가에게 구설의 죄를 적용시켰지만, 섣부른 죄인을 만들어선 안 되었기에 소문의 근원을 찾으라 일렀는데 그것이 이제야 찾아져 죄인을 다스리는 것이 늦어졌다. 마지막으로 간 윤 씨네 집 노비는 지나가다 사랑방에서 대감마님과 아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고 전했다. 노비가 주인의 말을 엿듣고 그것을 알린 것은 잘못한 일이었으나 석진은 최초로 발설한 자를 죄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황명을 내렸다. 그 집 여식을 불러 엄히 다스리라.
“입을 찢어 죽인 뒤에 뒷산에 버리는 것이다.”
여태 화양골 송 씨네 딸이 나인으로 입궐한 뒤 그런 처사를 받았고, 궐에서 일하던 연이 실종된 후 그런 처벌을 받았다. 석진의 말을 들은 수아의 눈이 커졌다.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폐, 폐, 폐하!
“저, 저는 그 이야기를 아버지 밖에…!”
“그건 구설이 아니더냐?”
“…….”
“현(賢)이 민(旻)의 사대국인 건 알고 있겠지.”
수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석진이 말을 이었다.
“오래 전에 전쟁이 났다. 선황께선 목에 선 칼날을 보고 항복하셨지.”
“…….”
“민은 황녀를 바치라고 했다. 이어 태어난 여자 아이를 선황께선 민으로 보내기 싫어하셨어.”
“…….”
“그래서 죽었다고 했다, 산 아이를.”
“…….”
“넌 선황폐하의 뜻을 그 말 많은 입으로 저버렸다. 이는 역모와 다를 게 없지.”
석진이 수아의 볼께로 손에 든 장검을 갖다 댔다. 찬바람 속에서 날이 선 칼은 더욱 시렸다. 수아는 몸을 흠칫 떨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발악과도 같았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
“소, 소녀를 죽이시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
“한 번 더, 새, 생각해 보심이…!”
석진이 칼날을 세우고 내려다보며 웃었다. 수아는 떨리는 입가를 잠재우려 애썼다. 황제의 웃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허면, 네 말은 죽은 아이로 알려진 아이를 죽은 채로 계속 두라는 말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별 걱정을 다 하는 구나.”
석진이 표정을 굳혔다. 떨리는 수아의 몸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참, 싸늘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
“죽은 아이를 살게 둘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었으니.”
민과의 전쟁을 이름이었다. 석진이 말을 마치곤 칼끝을 스쳤다. 고통에 찬 고함소리가 공위청을 울렸고, 차가운 흙바닥에 핏자국이 생겼다. 피가 묻은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황녀를 위한 일이긴 했으나 자신의 백성 중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었다. 아직 죽지는 않고 기절했으나 저리 두면 피를 너무 흘려 죽거나, 기절한 채로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석진이 동이 터 푸른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한 사내가 공위청 안으로 들며 석진을 불렀다. 힘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말을 전하러 온 모양이었다.
“누군가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석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나를 왜 찾는다고. 석진이 대답 없이 손을 휘저었다. 돌려보내라는 뜻이었다. 사내는 황제의 말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말을 머뭇거렸다.
“그게…,”
뒷말을 들은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내는 석진의 반문에 재차 대답했다. 민의 황제가 찾아왔습니다.
지민이 앞에 놓인 차의 향을 음미하다 한 모금 들이켰다. 이른 아침부터 궐에 찾은 탓에 급히 끓인 것이었다. 지민이 든 빈영전(賓寍殿) 또한 갑작스런 방문에 별다른 준비가 되지 않은 채였다. 석진이 객을 맞이하기 위해 환복한 채로 지민의 건너편에 앉았다. 이리 일찍 황제를 만나는 것은 예가 아니었으나 사대국의 황제이므로 내치지 못하고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 아쉬웠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지민이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유한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석진이 괜찮다며 틀에 박힌 대답을 하곤 지민과 함께 웃었다. 두 황제의 눈이 긴 호선을 그리며 곱게 휘었다. 정식으로 마련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그만큼 형식적이고 딱딱했다.
“사실 연으로 가려던 참에, 현의 저잣거리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그때 저잣거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아서.”
연(娟)은 현(賢) 옆에 위치한 대국(大國) 중 하나였다. 민과 연은 동맹국을 맺어 이따금씩 황제가 방문해 국가 사이를 돈독히 했다. 민(旻)에서 연으로 가기 위해선 여러 방법이 있었으나, 그 중 현을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현 국경 너머 주위엔 산이 많았고, 갈 곳 잃은 도적떼가 들끓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강대국의 황제인 지민은 많은 군사를 이끌기에 이를 겁내지는 않았으나,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 저잣거리라면, 성령제 때인가 봅니다.”
“…헌데, 저잣거리에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요.”
지민이 얕게 웃었다. 이상한 소문이란, 요즘 떠도는 황녀의 얘기를 뜻하는 것이려나. 석진이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폐하. 이제 백성을 조금 돌아보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한 여인이 술을 들이키는 사내에게 말했다. 여인의 차림은 화려했고, 사내의 복색은 황제의 그것과 같았다. 민(旻)의 황후와 황제였다. 황제가 민을 강성하게 만든 후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백성들의 혈세와 간간히 들어오는 공물로 놀음을 벌이는 것을 보다 못한 황후가 한 말이었다. 황제는 하나뿐인 황후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술을 들이키며 다른 여인을 불렀다. 황제는 국모인 황후보단 첩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지민이 유모와 함께 황제의 침전 앞에 멈춰 섰다. 왔음에도 들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어미가 박대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린 지민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어째서 그 아이가 오지 않는 것이냐!’
조금 늙은 황제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린 지민이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에겐 황태자라고 해도 응당 고개를 숙여야 했으나 지민은 술에 취한 황제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모의 옷깃을 꼭 쥐며 방 안에 있는 제 어미, 황후를 흘끗 보았다.
‘우리 태자 아닌가!’
‘…아바마마.’
황제가 황후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어린 지민이 황태자에 오른 이유는 명확했다. 정부인의 하나 뿐인 아들이기 때문에. 황후가 딸을 낳았다면 애첩의 아들이 황태자에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민이 손을 꾹 쥔 채 유모의 뒤에 몸을 조금 숨겼다. 황제가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너는, 현의 공녀를 황후로 맞을 거다.’
황제는 지민을 만날 때마다 이따금씩 이런 말을 했다. 술에 취했을 때면 더더욱. 현을 사대국으로 삼았을 땐 공녀로 오는 황녀를 제 첩으로 들일 생각이었으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첩으로 삼아 무엇 할까. 제 아들인 지민은 여인에겐 여직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황후로나 맞아야겠다고, 황제는 그리 생각했다. 이후 황태자 생활을 이어 온 지민이 혼인을 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제 아비의 쓸모없는 고집. 황제의 폭정 때문에 이름난 양반가 규수의 사주단자가 제출되지 않는 까닭이기도 했다. 지민은 황제를 보며 절대 제 아비처럼은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황후를 박대하고, 폭정을 일삼는 제 아비처럼.
지민이 황제가 없는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저앉아 있는 황후의 얼굴이 어두웠다. 고왔던 얼굴이 점차 늙어가고 있었다.
‘어마마마!’
‘태자 아닙니까.’
지민이 황후의 품에 안겼고, 황후는 지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조그만 체구가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지민이 제 어미의 옷깃을 꼭 쥐며 우는 얼굴을 했다.
‘…아바마마는 너무 하십니다.’
‘그런 말 하면 못 씁니다, 태자.’
‘전 절대 저런 황제가 되지 않으렵니다.’
황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쓰읍- 하고 혀를 찼다. 지민은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소자는 제 비(妃)만 결코 아낄 거예요.’
‘그러십시오, 태자.’
황후가 제 어린 아들을 보며 웃었다. 좁은 등 안에 닿는 조금 늙은 손이 따뜻했다. 지민은 제 다짐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후 황후는 목숨을 다했고, 지민은 안식처를 잃은 채 황태자 생활에 몰두했다. 놀음을 계속하던 황제는 황후가 죽은 이후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시름시름 앓다가 정사에 참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지민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황제는 황태자의 곁을, 황제의 자리를, 민을 떠났다. 지민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아 민을 다스렸다.
물려받을 일은 많았다. 제 아비가 하지 않은 일까지 하고 있는 것 같긴 했으나 지민은 불평 없이 많은 것을 해냈다. 혼인을 제외하고선. 도성의 이름난 규수와 혼인하는 것도 가능했으나 지민은 그러지 않았다. 은연중에 제 아비가 말한 현의 황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녀자가 경거망동하십니다.’
위로 공물에 대한 감사방문이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낸다고 색색의 연등을 켜놓고 다들 분주하기에, 제 호위무사와 함께 저잣거리에 방문했다. 함께 따른 군사들과 가마는 이미 궐로 보내놓은 채였다. 지민이 걷다 부딪혀 넘어진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황한 표정이 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 불찰입니다. 미안합니다.’
‘…….’
‘이 녀석이 조금 날카로울 뿐이니 마음 푸세요.’
넘어진 이는 지민의 손을 잡지 않았다. 지민이 어정쩡한 자세로 내민 손을 거두었다.
‘대신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가자, 공주야!’
사내와 여인이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인의 치맛단에 예쁘게 박힌 자수가 머릿속에 남았다. 지민이 저잣거리 속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사내가 여인을 부르던 말을 곱씹었다. 공주?
‘예쁜 자수네요.’
현의 궐 안에 있는 빈영전에 든 지민이 말했다. 석진의 도포에 새겨진 자수를 보고 한 소리였다. 석진이 얕게 웃었다. 지민은 저잣거리에서 본 여인의 치맛자락에 그려진 자수와 비슷한 자수인 것 같다고, 그리 생각했다.
“숨겨진 황녀가 있다니.”
지민이 찻잔 안에 든 꽃잎을 빙글빙글 돌리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석진은 시린 손끝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황녀를 재촉하던 민의 전언을 기억했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열여덟 해 동안 지켜온 아이가 순식간에 민으로 끌려가겠지. 그러니 대신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사실을 숨겨야 했다. 죽은 아이를 산 아이로 만들고 싶었으나 그건 조금 뒤의 일로 미뤄둬야만 했다. 기필코. 조금 긴장한 탓인지 몸이 뻣뻣하게 굳은 석진이 애써 표정을 풀었다.
“소문이 진정입니까?”
“자잘한 소문에 귀 기울이는 것이 황제의 몫입니까.”
“…자잘한 소문이라.”
“저잣거리를 떠도는 한낱 말들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지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빈영전 창문 틈새로 보이는 매화가 봄이 오는 모양인지 생기를 조금 잃었다. 고요함이 두 사람과 빈영전을 메운 내관, 군사 사이를 스쳤다. 그 고요가 깨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빈영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잠깐만, 체통을 지키심이…,”
“…오라버니, 어째서 관군이…!”
석진의 어린 누이, 현국의 숨겨진 황녀인 공주였다. 석진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황제끼리의 만남이었으므로 최소한의 인원이 두 사람을 지켰기도 했고, 이른 아침에다 갑작스런 방문이기에 빈영전 앞을 지킬 관군을 미처 부르지 못해 빈영전 바깥이 텅 비어있는 까닭에 든 것일지 몰랐다. 지민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오라버니?”
“…….”
“이제 보니 자잘한 소문이나 한낱 말들은 아니었나 봅니다.”
공주는 몸을 멈춘 채로 떨었고, 석진이 제 동생을 보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민의 군사가 이를 제지했다. 지민이 냉랭하게 웃었다. 치맛자락과 도포에 새겨진 만개한 꽃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번이 두 번째네요.”
첫 번째는 저잣거리에서의 가벼운 충돌을 이르는 것이 분명했다. 공주가 뛰쳐나올 때부터 따라 나온 정국이 공주를 가로막은 몸을 뒤로 뺐다. 빈영전 안의 공기가 참 싸늘해졌다고, 그리 생각했다.
* * * *
^ㅁ^
사실 17화 뒤에 붙어있어야 했던건데 넘 길어질 것 같아서 잘랐어요
뭔가 점점 막장같지만 완결을 내야하니까..ㅎ
☞ 제 사랑 드실 93분♥ ☜
0806 / 1214 / ♥김태형♥ / Remiel / 곤잘레스 카레 / 골드빈 / 공주야 / 군림 / 깻잎사랑 / 꽃게 / 꽃길 / 꽃단비 / 꽃소녀 / 꽃오징어 / 꾸꾸 / 끌로에 / 나너조아 / 냥군땡 / 노트북 / 뉸뉴냔냐냔 / 니케 / 다니단이 / 다홍 / 단아한사과 / 됼됼 / 뜌 / 라슈라네 / 룬 / 리자몽 / 리프 / 망개똥 / 망개하리 / 매직핸드 / 맴매때찌 / 먹고쥭자 / 모찌민 / 미스터 / 밍밍 / 방소 / 보고싶찐 / 복동 / 봄비 / 불나방 / 비데 / 빵빠레 / 삐삐까 / 사막여우 / 사용불가 / 석진이시네 / 설탕파티 / 솔트말고슈가 / 순향 / 슈가나라 / 승댕 / 싸라해 / 아망떼 / 압솔뤼 / 열렬히 / 예찬 / 오레오 / 오월 / 오징어만듀 / 온새미로 / 옮 / 우와탄 / 우유 / 유자쿠마 / 윤기 / 은갈칰 / 응캬응캬 / 이다 / 이스트팩 / 입틀막 / 정꾸야♥♥♥ / 줄라이 / 지호 / 진격 / 집수니 / 찬아찬거먹지마 / 천사소녀제티 / 체셔리어 / 초코빵 / 쵸코두부 / 커몬요 / 태형아뷔태해 / 틸다 / 피쯔아 / 하트반지 / 핫초코 / 현질할꺼에요 / 호비 / 화학 / 황토색
(가나다순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