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네이밍+
00. "다시 해" 툭.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하나하나 장수를 세워왔건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내 앞에 떨어진 두툼한 종이뭉치에 바보처럼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형광펜으로 중요한 내용도 그어놓고 혹시 팀장님께서 이해를 하지 못하실까봐 영어단어까지 포스트잇에 정성스럽게 써 붙여놓았던 나였다. 항상 서류를 낼 때마다 '정성이 부족하다', '내용이 별로다' 등 별 개같은 근거로 까였기 때문에 최대한 트집이 잡히지 않도록 옆에 앉은 사원에게 커피까지 사주며 오타검사와 내용검사 다 검토했건만... 시발 저걸 본 체도 하지 않고 던지다니! 불금을 포기하고 편의점에서 파는 스누피 커피도 몇 잔 들이키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느라 고3때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삭신이 다 쑤셨다. 대학생 때 과제 낼 때보다 열심히 집에서까지 노트북을 두드려 하마터면 안구건조증까지 와 안과를 가야할 뻔했다. 이번에는 칭찬 받을 줄 알았건만 쌍그리 개무시하고 다시 해오라는 팀장의 말에 설마, 생각하며 최대한 이를 악물고 다시 읽어보라고 권유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 나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다른 직원들이 가져온 서류를 한장한장 읽는 팀장에 진심으로 씨발의 '씨'자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을 거야?" "...네?" "다시 해오라고. 나두 한 번 이상 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는 나를 잠시 바라본 팀장이 '왜 아직도 여기있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경악하며 슬랙스 자락만 꾹 쥐자 피식 웃으며 다른 사원이 준 서류를 탁, 하고 내려놓은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가 없으면 좀 키우던가," "지금 이딴걸 보고서라고 줬으면 죄송하다고 말해야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나를 직시하는 팀장의 눈빛이 매서워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까지 '오늘은 칭찬 받을 것 같아요!'라며 엄지척을 날려준 옆자리 사원에게 칭찬받으면 오늘 저녁사주겠다고 손을 꼭 잡은 게 5분 전 같은데, 내가 회사에 막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눈빛에 조롱을 깔고 나를 바라보는 팀장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마음 같아서는 눈깔 달렸으면 다시 보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확실히 갑을관계이고 개기면 죽음이기 때문에 팀장의 말에 그대로 개처럼 깨갱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엄마보고싶네 시발. "죄송합니다" "..." "다시 해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억울해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폴더폰처럼 허리를 굽혔다. 그런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팀장이 흐음, 콧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다시 앉아 의자에 허리를 기대었다. 마치 말을 잘듣는 개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같아 급격히 기분이 내려갔다. 오늘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문자나 보내야지. 빨리 이 지옥구덩이에서 빠져나가고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푹신한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나를 바라보는 팀장의 눈치만 살짝살짝 보았다. 언제즈음 나가야할까... 눈만 도르륵 굴리며 나갈 타이밍을 살펴보는데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팀장에 진심으로 뛰쳐나가고싶다는 욕구가 솓구쳐올라오기 시작했다. 허리에 쥐가 난 것마냥 저려올 때즈음, 다시 다른 서류를 살펴보는 팀장이었다. 에이포용지를 넘기는 팔랑팔랑거리는 종이소리만 팀장실을 가득 채웠다. 식은땀으로 가득찬 손만 슥슥 문지르며 분명히 립밤을 발랐는데도 쩍쩍 갈라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가고싶다, 나가고싶어...!! 빨리 이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 나를 도와준 최사원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저녁 사내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오늘은 이슬톡톡이나 까야지. 아, 야근이라 술 살 시간은 있냐. 거의 멘탈붕괴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여갈 때 즈음이었다. "아직도 허리 숙이고 있네" "아..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이제는 진심 울고싶어질 지경이었다. 개씨발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말장난인가 싶어 고개를 살짝 들었지만 진심 장난끼를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을 지은 팀장에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저 세모눈, 나를 좆나게 괴롭힌다. 이 가시방석같은 분위기와 상황이 나의 몸을 옥죄이는 것 같았다. 아주 이제는 서류를 손에 놓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바라보듯턱을 괴고 나를 쭈욱 지켜보는 팀장에 다 때려치우고 이 문을, 아니 회사를 나갈까 생각이 들기까지 시작했다. ...엄마 미안. 나 이 회사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 같아. 응? 회사가 아니라 그 개같은 팀장 때문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기를 빨아들이는 이 곳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 싶어 두 주먹을 꽉 쥐고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다시 해오겠습니다...! 오늘 야근이라도 해서..." "아니야. 됐어" "네?" "이거 오늘까진데 언제 다 끝내게" 시발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던가. 진심으로 저 하얗고 맨들맨들한 면상에 주먹을 꽂아넣고 싶은 심정이 나를 감싸안기 시작했다. 거의 기가 다 소멸한 상태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는 팀장에 턱, 하고 긴장이 풀려 하마터면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뻔했다. 정말 구라 1도 첨가하지 않고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야근하면 어쩌나, 이대로 상무에게까지 혼이 나면 어쩌나 온갖 생각에 휩싸인 채 불안해했던 지라 내 심정도 모른 채 미소를 짓고있는 팀장을 보니 볼케이노 치킨을 콜라없이 먹은 것마냥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허리 아프겠다. 나가봐. 손을 휘저으며 나에게 나가라는 제스처를 하는 팀장을 멍하게(거의 체념한 표정으로)바라보며 뒤를 돌자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라스트 콤보로 들려오는 팀장의 목소리였다. "아, 나가기 전에 내가 던졌던 서류 좀 다시 가져다주고" "..." "집에 얌전히 가서 반성문 쓰고 있어" 아...개새끼. 처음으로 직장상사를 찢어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감싸안았다. * 그렇다. 저 좆같은 팀장과 나는 단순히 회사에서 서로 마주하고 욕을 짓이기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 무슨 사이냐 묻는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엄연히 혼인 신고서에 서로 이름도 박은... 부부였다. 나도 무슨 바람이 들어서 성격이 하루에 3번씩 바뀌는 저 팀장님과 눈이 맞고 결혼을 한 건가 매일 회상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때 미친 게 맞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을 하니깐 닭살까지 돋는 건 아마 내가 팀장을 좀 싫어하나 보다. 회사에서는 온갖 멋있는 척, 간지나는 척 다 하면서 집에만 오면 어린애같이 변하는데 회사에서 서류 던지면서 화낼 때마다 주먹질이 나가는 걸 꾹 참는 걸 자기는 알까. 하도 배틀식으로 연애를 해서 신혼인데도 불구하고 달달함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아니, 회사에서 티 내지 말자면서 혼자 저렇게 꿍해가지곤 내 완벽한 보고서도 던지는 건 무슨 행패인 지 그래도 하늘같은 팀장님의 지시라 나는 하얀 종이에 검은 네임펜을 들고 반성문을 끄적끄적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반 성 문> 민윤기랑 점심 먹기로 하고 다른 '남자' 사원과 우동을 먹음. 그 아이에게는 여자친구까지 있고 나랑은 거의 불알친구 사이인데 어쨌든 남편을 두고 외간 남자와 밥을 먹었으니 이건 엄연한 나의 잘못이다. 존~나 반성하겠다. 내일 프로젝트 준비가 있어 야근을 하는 팀장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해 종이를 들고 각도를 무시한 채 셀카 한 장 보냈더니 바로 1자가 사라졌다. 뭐지, 일하는 중 맞아? 이렇게 빨리 확인할 줄 알았으면 더 정성스럽게 쓸걸... 입천장을 한 번 혀로 쓸고 홈버튼을 누르는데 답장이 왔다. 빠르다. 민팀장ㅗ : 반성문은 진짜 좆같은데 얼굴 봐서 참는다 나 : 내 얼굴을 보고 참는다고요? 뭐 잘못 먹었어? 이 사람 갑자기 왜 내 얼굴을... 결혼식 때 우는 나를 보고 못생겼다고 타박했던 사람이 이런 문자를 보내니깐 조금 기분이 이상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장난치지 말라는 말을 타자로 치는데 민팀장ㅗ : 야근이 너무 힘들다 나 : 집에 언제 오는데요 민팀장ㅗ : 내가 얼마나 힘들면 너가 보고 싶겠냐 나 : 나 보고 싶어요? 민팀장ㅗ : 그것만 알아듣네. 그래, 보고 싶어. 그런 사람이 오늘 그랬대? 어이가 조금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데 진짜 힘이 든건가, 평소답지 않게 민윤기스러운 애정표현을 하는 그가 조금 불쌍해 우는 이모티콘을 보냈더니 의자에 앉은 채 종이비행기를 던지는 공룡 이모티콘을 보낸 팀장이었다. 심심한 답변에 괜히 민윤기를 약올리고 싶어 주위에 굴러다니는 립스틱을 하나 꺼내 입술에 두껍게 바르고 최대한 유혹적인 표정을 하며 최대한 티셔츠를 끌어내려 어깨선을 보이게 하고 셀카를 찍어 민윤기한테 보냈다. 나 : 오늘밤이 외로워요 ~ 민팀장ㅗ : 야근이라고 했지 오늘 집에 안 간다는 말은 안 했는데. 나 : 아 좆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