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지훈 X 작사가 너봉 00
아무리 헤엄쳐봐도
벗어나지 못하는 너란 바다
피바람 속에도 살아남은 나는
언제까지고 헤엄쳐야할까
벗어나지 못하는 너란 바다
피바람 속에도 살아남은 나는
언제까지고 헤엄쳐야할까
몇번이고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한 단 한 구절이다.
분명 꿈에 나온 그 장면이 너무도 생생한데 이걸 뭐 어떻게 써야할지를 모르겠달까.
한달 전 본인이 만든 곡에 가사를 붙여달라며 의뢰가 들어온 이후로 한참을 고심중인데, 아직 딱 한구절밖에 쓰지를 못했다.
노래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지만 생생하고, 상당히 빠르지만 느린노래. 꼭 뭐랄까, 폭풍우치는 바다 속에서 혼자 헤엄치는 느낌이였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그런 느낌.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한달간 가사 없는 이 노래만 계속 듣고 있자니 이상한 꿈만 꿔대고 나까지 저절로 우울해져서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의뢰인이 요청한 기한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 결국 작업실 번호만 전해받은 탓에 이름도 모르는 이 노래의 작곡가의 작업실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푹 쉬어있는 목소리가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안녕하세요, 한달전에 가사 의뢰 받았던 사람인데요,"
그리고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순식간에 밝아지는 목소리였다.
"다 끝났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어, 사실 아이디어가 잘 안떠오르네요"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건낸 이야기에 또 한번 전화너머 공기가 푹 가라앉았다.
"...아..."
"아, 그래서 다름이 아니고 혹시 한시간만이라도 시간을 좀 빼주시면, 저희 만나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생각이 더 잘 날까 하는데."
그리곤 또 한참 있다가 들려오는 목소리다.
"...어, 제가 좀 바빠서...누굴 잘 안만나기도하고..."
"정말 잠깐이면 돼요! 제가 사실 원래는 작곡가분들이랑 만나서 같이 의논하면서 작업하고 그러는데, 이런 작업은 좀 생소해서요. 시간 내기 힘드시면 제가 작업실로 가도 돼요! 어떻게...안될까요...?"
"...문자로 주소 찍어드릴게요"
나이스. 전화를 끊고 곧 있어 작업실의 주소가 담긴 문자가 날라왔고 그길로 집을 나섰다.
"목소리 보니까 되게 성격 안좋을 것 같던데. 으으,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지...안그래도 가사 얼마 못써서 간 쫄리는데..."
한참 혼자 꿍시렁거리다보니 눈앞에 주소지의 그 건물이 나타나있다.
"4층에...3호네."
전등은 나간지 오래인 듯 보이고 계단도 썩 깨끗한 상태는 아닌걸 보아하니 등골이 오싹오싹 시려왔다. 진짜 음침하네 여기
4층에 도착해 403호라고 써진 검은색 방음 문을 똑똑 두드리곤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한번 더 두드린 뒤에도 반응이 없자 결국 조심스레 문고리를 내려 문을 살짝 열자 쿵쾅쿵쾅 들려오는 노랫소리다.
그에 깜짝 놀라 잠시 멈춰 섰지만 이내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도로 닫았다. 문부터 이어진 짧은 복도를 지나자 이번엔 창이 난 하얀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았고 그 안을 슬쩍 들여다 봤지만 작곡가라는 사람은 의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화면에 시선을 응시한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클릭해대는 모습이 얼핏 보면 꼭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어짜피 여기서 문을 두드려도 안들릴테니 노래 끝날 때 까지만 기다리자, 하는 마음으로 두 손에 볼펜과 수첩을 꽉 쥐고 벽에 기대 작업실 안을 눈으로 슥 흝었다.
작업실 안은 유리창으로 또 반이 나뉘어져 작업하는 공간과 녹음을 하는 공간으로 분리 되어 있고 온갖 전선들과 알 수 없는 기구들로 꽉 찬 어두운 작업실은 그리 깨끗해보이지는 않았다.
남자가 앉은 의자 뒤로는 검은 가죽 소파 하나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테이블 위는 뭐가 올려져있는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소파 위도 예외는 아니였다.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는건지, 배게와 이불이 널브러져있고 바닥엔 컵라면 그릇, 햄버거 껍질 따위가 나뒹굴었고 가끔 벗어놓은 속옷이나 티셔츠도 보였다.
한참을 쿵쾅거리던 스피커가 마침내 꺼지고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 의자를 빙글 돌려 바닥에 서있던 콜라를 집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음...남자 아이...?
상당히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 속에서 나는 그나마 발을 디딜 틈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고 작곡가라는 남자는
"어...작사 맡기긴 했는데 여자분일 줄은..."
하고 혼자 궁시렁대며 허둥지둥 소파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앉을 공간이 생기자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고 아, 하며 빠르게 소파에 가 앉았다.
"어, 그러니까..."
전혀 상상치 못했던 멀끔한 외모 탓일까 (목소리만으론 꽤 험상궂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막상 직접 얼굴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차에 발 밑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그를 손으로 주워 올리니 내 손에 들려있는건 다름아닌 남자 속옷이였다. 그것도 한번 입은듯한거.
그를 본 남자의 눈이 거의 세배로 커지더니 내 손에 들린 제 속옷을 거의 낚아채듯 책상아래로 던졌고 그에 우리를 누르는 공기는 더더욱 무거워졌다.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던 찰나에 누군가
"지훈아!"
하며 작업실로 들어왔고 작곡가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옅게
"범주형...!"
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작업실로 들어오던 그 범주형이라는 남자는 작업실에 앉아있는 나와 지훈이라는 남자를 번갈아보더니 다시 문을 닫고 분위기를 깨서 미안하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였다.
"...형...?"
하고 부르는 남자에도 무색하게 범주형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점점 더 어색해지는 상황에 결국 먼저 입을 연건 나였다.
"어, 그러니까, 이 노래를 어쩌다 작곡하신거예요? 음, 그러니까 어떤 감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묻는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답은 간단했다.
"뭐...그냥..."
"아, 그냥 만든 곡이예요?"
하고 얼척없다는 듯 되묻는 나에
"네...뭐..."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자가 썩 미워보였다.
이게 그냥 만든 곡이면 한달간 당신 감정을 추측하려했던 내 노력은 뭐가돼!! 하고 속으로 한참 화를 삭혔다.
"어...음, 그럼 가사를 어떤 느낌으로 붙였으면, 하시는거 있어요? 예를들어서 슬픈 사랑이라던가, 아니면 뭐 분노라던가..."
하는 내 질문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듯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만 똥그래지는 남자였다.
'뭐하는 애지 진짜...?'
그에 결국 한숨을 폭 쉬고
"전화번호 드릴게요. 뭐 생각 날때마다 저한테 연락 주세요. 아, 아니다 그냥 제가 연락 드릴게요. 번호좀 주실래요?"
하고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건냈다. 그러자 잠깐 우물쭈물하더니 핸드폰을 건내받아 전화번호를 찍는 남자였다. 그리곤 다시 내게 핸드폰을 돌려주는 그에
"통성명도 못했네요. 저는 작사가 김칠봉 입니다. 작곡가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으며 바로 핸드폰에 이름을 저장할 태세로 남자를 바라보자
"어...활동은 우지, 로 하고 있고...이름은 이지훈입니다"
하고 말하며 뭔가 불안한듯 계속 제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비비는 그였다.
우지...우지라...어디서 많이 들어본...
"어...! 그 예쁘다 작곡하신 분 아니예요? 헉 저 그 노래 진짜 좋아하는데...!"
하고 놀라 물으니 모자 쓴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였다. 귀는 왜 빨개지는지 모르겠지만, 뭐 하여튼 낯을 되게 많이 가리는 듯 싶었다.
"그럼 그 노래 가사도 다른 작사가분한테 의뢰하신거예요? 가사 되게 귀엽던데!"
하고 흥분하며 묻자
"아뇨...그건 제가...작사가 쓰는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며 수줍게 이야기하는 남자에 아, 그렇구나...하며 인사를 하고 작업실을 나섰다. 무거운 방음문을 닫고 다시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는 중에도 이 생각밖에 안나더라.
으아, 일주일 어떻게 버틸지 감도 안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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