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 토끼놈 02 커피를 받아온 정국은 몇 분째 말 한마디 없이 빨때를 물고 커피 마시는 것에 열중했다. 아니, 여주를 바라보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이미 커피를 다 마신 것도 모르고 밑바닥에 조금 남은 얼음 녹은 물만 쪼르륵하며 마시고 있었다. 자신이 주문할 때와는 다르게 방긋방긋 웃으며 주문을 받고 있는 여주를 바라보는 정국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물론 여주는 혼자 일하게 한 게 정말 미안해서 오늘은 시급을 두 배로 주겠다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은 뒤로 자본주의 정신을 불태우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 사정을 알리 없는 정국은 혼자서 샘통이 나 있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호석이 정국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새로운 화젯거리를 꺼냈다. “정국아, 너 새로 살 집 가볼래? 지금 짐 다 정리 끝났다는데.” “......” “아, 궁금하다. 도대체 새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 애써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려 했지만 정국의 관심을 돌리는 데 실패한 호석은 정국을 이대로 두면 저 여자가 퇴근할 때까지 저러고 있겠구나 싶어서 억지로 정국의 몸을 일으켰다. 결국 정국은 한껏 심통이 난 표정으로 호석을 따라나섰다. 정국과 호석이 탄 차가 멈춰 선 곳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의 새하얀 집 앞이었다. 전회장은 정국에게 학교 주변의 고급 오피스텔 하나를 내어주려고 했지만 제대로 대학생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정국의 말에 호석이 보통의 주택가에서 살 집을 구했다. 마침 해외로 발령이 나서 당장 집을 내놓는다는 사람을 발견했고 집 내부 사진을 본 정국도 꽤 맘에 들어 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계약이 진행되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작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마당과 집 옆의 작은 계단이 정국의 눈에 들어왔다. “형, 저 계단은 옥탑방으로 가는 계단인가?” “어. 저기 옥탑방에 다른 사람 살고 있으니까 올라가지마.” “아, 오케이.” 신신당부하는 호석의 말에 미련 없이 눈길을 돌린 정국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제 방을 옮겨 놓은 듯 익숙하게 꾸며진 집 내부를 본 정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뛰어들었다. “역시 형 센스는 최고야.”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리던 정국이 아, 하며 눈을 번쩍 뜨고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형, 나 듣고 싶은 수업이 있는데..” “어 맞아. 어차피 내일 시간표 짜야 하니까 너 듣고 싶은 수업 있으면 말해 봐.” “아까 그 여자애가 듣는 수업. 다 듣고 싶어.” 정국의 마지막 말에 노트북 자판 위를 바쁘게 날아다니던 호석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춰 섰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게 해줬더니 이번에는 스토커 짓을 하겠다는 거니 정국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호석은 한심한 눈길로 정국을 한 번 바라본 뒤 알겠다며 다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 지금 나 미쳤다고 생각하지.” “당연한 거 아니야? 진짜 미친놈...” 정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호석을 바라보며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재벌 3세가 가지는 당연한 신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하는 여주의 반응이 보통 사람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정국이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오기를 발동시키게 되었다. . . . .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몇 줄기의 강한 햇볕에 여주가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손을 뻗어 가져온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10시... “10시?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른 여주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물소리 중간중간 들리는 자책하는 소리와 우당탕하며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여주의 늦잠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다... 지금 몇 시야...” 엄청난 속도로 샤워와 화장을 마친 여주가 가방에 책 몇 개를 쓸어 담은 뒤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속도로 학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여주가 숨을 헐떡이며 강의실 문을 열자 다행히 담당 교수가 이제 막 출석을 부르려는 참이었다. 숨을 고르며 빈자리에 앉은 여주가 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내고 펜까지 꺼내 들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 재수 없는 토끼놈이네. 그리고 곧 들려오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여주의 표정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자, 그럼 일단 옆 사람과 인사 나누세요. 한 학기 동안 실험을 함께 할 파트너입니다.”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의 정국과는 달리 매우 언짢은 표정의 여주가 정국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래. 이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고 알고 보면 토끼놈은 꽤 괜찮은 사람일수도 있어. 그래. 실험을 끝장나게 잘 하는 천재일 수도 있잖아? 끝내주는 마인드컨트롤을 해낸 여주가 싱긋 웃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여주는 정국과 통성명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때만 해도 이 토끼놈이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뒤인 다음 실험 수업 전까지만 해도. . . . . . 교수가 출석을 다 부를 때까지 여주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오늘은 첫 번째 실험을 할 것이니 절대 빠지지 말라는 교수 말을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하며 여주는 슬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험을 시작하라는 말이 들릴 때까지 정국은 실험실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하는 여주는 혼자 실험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이서 해야 하는 실험을 혼자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첫 번째 실험을 완벽하게 망쳐버린 여주가 속상함 반, 정국에 대한 원망 반으로 다음 실험 안내 프린트를 한 손으로 구기며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망할 토끼놈. 수업 중에도, 알바 중에도 여주는 망할 토끼놈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다시 만나는 그날을 기약하며 매시간 정국에 대한 분노를 쌓아갔다. “망할 토끼놈....” 카페 마감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망할 토끼놈을 연신 중얼거리던 여주가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샀다. 도저히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정국에 대한 분노가 거의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여주는 집 앞에 도착했고 그 분노를 담아 거칠게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선 채로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자기 볼을 꼬집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망할 토끼놈이 왜 우리집에 있지?” “말은 똑바로 하자. 이제 여긴 내 집이거든, 이 옥탑방 소녀야?”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아유, 안녕하세요. 저희가 오늘 일층으로 이사 왔는데.. 옥탑방 사시는 분이신가 봐요!” 삐딱하게 서서 대꾸하는 정국의 등을 한 대 때린 호석이 뒤늦게 인사를 해보지만 하루 종일 분노로 가득 찬 상태로 되뇌었던 망할 토끼놈을 눈앞에 둔 여주의 귀에 호석의 인사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여주의 눈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은 정국만이 가득 차있었다.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실험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려낸 여주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아랫집... 잘 지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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