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Sky
01
나는 어둠과 친하다. 어둠의 입술과 손톱과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안다. 구석진 곳에서 다리를 모으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어둠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를 듣는다. 햇빛은 무섭고 낯설다. 바깥세상 사람들과 달리 나는 햇빛보다 어둠이 더 좋았다. 내 세상은 너무나 좁다. 나의 하늘은 1미터 70센티미터였다. 나는 하늘만큼 키가 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둠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리고 햇빛이 쏟아지는 찬란한 세상이, 무한한 세상이 도래했다. 19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제 2의 자궁인 지하실에 벗어나 태어날 수 있었다.
02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삼일에 한 번씩 왔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다. 아버지는 맨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씨발, 썅년아, 닥쳐. 어머니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우리가 모두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다리 사이에 있는 긴 살덩이를 어머니 몸에 끼워 넣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헐떡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서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몸을 웅크렸었다.
03
사람이 사람을 낳는 건 너무나 신기하다. 부른 어머니의 배를 만지며 물었다. 어머니 나도 이렇게 사람을 낳을 수 있나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너는 남자아이라 아기를 낳을 수 없어. 나는 다시 물었다. 왜 남자는 사람을 낳지 못하나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배가 두 손으로 껴안지 못할 만큼 불렀을 때 징그러운 빨간 핏덩이가 나왔다. 동생이었다. 나도 태어났을 때 저런 모양이었을까? 그 작고 꼬물거리는 것은 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9개월 동안 어머니 배속에 있던 것 치고는 너무 짧은 생이었다. 바퀴벌레보다도 못한 생명력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시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죽으면 바깥으로 갈 수 있는 걸까? 나는 문득 죽고 싶어졌다.
04
지하실에는 18인치 티브이가 있다. 손바닥과 발바닥만 있으면 화면이 다 가려지는 아주 작은 상자. 그것이 우리를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줄곧 이것저것 가르쳐주며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가 크면 클수록 말수가 줄어드셨다. 한 달에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갈수록 몸이 마르셨고 눈이 움푹 들어가 퀭했다. 어머니께 아무리 말을 걸어도 답을 주지 않으셨고 그래서 내 유일한 친구라곤 티브이뿐이었다. 나는 하루, 이틀, 삼일, 보름, 한 달, 넉 달, 열두 달, 일 년, 십 년, 십구 년 매일매일 티브이와 대화 했다.
05
어머니는 가끔씩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야 바깥세상에 나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바깥세상에서 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 바깥세상 문은 아버지만 다닐 수 있게 조작돼 있었다. 아버지가 나가실 때 몰래 밖을 쳐다보면 또 문이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티브이에서 알게 된 조각들로 바깥세상을 맞춰보았다. 너무 어려웠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건 너무도 많았다. 바깥세상에 나가도 또 바깥세상에 나가야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자는 도중에 비명을 지르고 자해를 하고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는 내게 죽으라고 했다가, 불쌍하다고 했다가, 다시 죽으라고 하기를 반복했다. 어머니는 점점 미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06
지하실에는 창문이 없으므로 사계절이 거의 의미가 없었지만, 나는 유독 여름만큼은 매우 싫어했다. 여름만 되면 사우나 같은 더위가 시작되었고 나는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다가 몇 번이고 탈수 증상으로 정신을 잃었다. 더위를 도저히 버티지 못할 때는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멋모르고 하루 종일 문을 열었다가 안에 들은 음식이 몽땅 상한 적이 있었다. 배탈 때문에 장이 홀라당 뒤집어졌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상한 음식을 먹어야했는데 아버지께서 냉장고에 새 음식을 채워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07
아버지의 형상은 자주 변했다. 괴물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도깨비로. 도깨비에서 구렁이로. 구렁이에서 악마로. 그날 아버지는 악마였다. 아버지는 투명한 초록색 병을 들고 나타났다. 발걸음은 매우 불안정했고 얼굴은 새빨갰다. 나는 떡진 더벅머리 사이로 구석을 찾아 몸을 웅크렸다. 아버지는 나만 보면 소리를 지르셨으므로 최대한 떨어져 있는 것이 답이었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가 입고 있는 거적때기를ㅡ옷보다는 거적이었다ㅡ 찢으셨고 그래서 어머니는 알몸뚱이인 채가 더 많았다. 어머니는 그때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옷을 입으셨다면. 그러나 만약을 가정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바지를 내리는 대신 손을 추켜 올리셨다.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08
아버지의 손찌검은 익숙했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거나, 어머니를 때리거나, 나와 어머니를 때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씨발년, 나에게는 씨발놈이라 했다. 씨발놈이 뭔지는 몰랐지만 나쁜 뜻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퍼부은 폭력은 평소보다 길었다. 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어머니의 푸른 멍 위로 붉은 상흔이 덧씌워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괴로워보였다. 당연했다. 맞으면 끔찍하게 아팠다. 아버지는 왜 우리에게 아픈 짓을 하는 걸까. 오래전에 묻었던 궁금증을 떠올리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너무 오래 구타당한 탓에 어머니는 반쯤 혼절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지하실 바닥에 쓰러졌다. 빨갛고 음울한 것이 웅덩이로 흘렀다. 초록색 병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09
나는 초록색 병이 도깨비 방망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티브이에서 본 프로그램에서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빨간 것이 자꾸 흘렀다.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고 숨도 쉬지 않아서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살려야 했다. 나는 아버지 손에 들려있는, 이제 반 밖에 남지 않은 도깨비 방망이를 뺏으려 했다. 아버지는 나를 발로 찼다. 입에서 나오는 끈끈하고 기분 나쁜 것이 내 뺨에 튀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넘어진 등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화끈거렸고 따가웠다. 초점이 흐려져서 천장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간신히 손을 뻗어 등을 만지자 초록색 파편이 뽑혔다. 부서진 도깨비 방망이는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다.
10
내 이름은 우지호야. 우지호는 이제부터 자기가 내 아버지가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럼 나는 아버지가 두 명인 건가요? 우지호는 아니라고 했다. 19년 동안 알고 있던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자신이 내 아버지를 하겠다고 했다. 지하실에 나온 후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멋대로 였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바뀌고 새아버지가 생겼다. 나는 더 불행해졌다고 느꼈다.
더보기 ♡암호닉♡ 새우깡 야상 컴백 흑백 현미밥 망고 --------------- 5화마다 한 편씩 짤막하게 지호 외전 '다크 스카이'가 들어갑니다 ㅎㅎ! 덧글이나 지적 항상 감사하게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