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은 자유롭게 틀어주세요!
"나, 너 부른 적 없어."
안 믿을걸 알면서도 김상균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
"너 말고 누가 나한테 열 통이나 문자를 했겠냐, 퍽이나."
술은 좆같다란 비유가 가장 찰떡이다. 시발 같다 개 같다란 비유는 이상한 이질감이 드는데 술은 좆같다란 비유는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꼭 그게 국어사전에 등재 된 표현일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매우 잘 떨어지고. 나는 핸드폰 창을 열어 문자를 문지르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김상균이 나와 동한이를 번갈아 본다.여기까지 와 준 김동한에 대한 미안함은 너그러이 넘겨도 김상균이 던지는 오해의 눈빛은 좆같다. 그러므로 나는 날 위해 와준 김동한에게 죄송하게도 김상균의 눈치를 최우선으로 신경썼다. 눈동자를 굴리니 김상균은 이방인을 바라보는 데면한 눈빛으로 김동한을 쏘아보았다. 손님으로 왔을때는 그렇게 자상하더니, 사적인 만남에는 친절 가면이 해제된 듯 했다. 칼을 갈은 눈동자로 기싸움을 마친 김상균이 입을 뗐다.
"저번에 왔던 그 친구?"
"네 사장님."
김상균은 이례적으로 초면인 동한에게(정확히는 구면이지만)냉한 얼굴을 걸었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라는 이 오그라드는 멘트가 사명일 것 같은 미소쟁이가 말이다. 뭐가 마음에 안 든 것일까.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헤어스타일과 옷이 마음에 안들었다고 보기엔 김동한의 오늘 옷차림은 너무나 퍼펙트하다. 동한이가 마침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집에 가야지."
"너...!"
너나 가... 라고 솔직한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당연했다. 드라마로 치면 짝사랑의 진전이 전혀 없던 여주가 처음으로 터닝포인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그 기회를 방해하는 김동한은 악역일 수 밖에 없었다. 곱지 않은 눈, 아니 눈깔을 아래로 내리고 김동한에게 아니꼽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김동한의 눈이 느리게 내 표정을 읽는다. 그리고 꺼져! 라고 하는 내 입모양도. 스캔을 마친 김동한이 공중으로 쓰게 고소를 뱉었다. 그렇지. 뭐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저를 위해 달려와준 노동에 고맙단 댓가 하나 없으니.
"얘를 왜 이 지경까지 마시게 했어요?"
벤치 위의 봉투가 툭 하고 넘어진다. 김동한은 마침내 음식물로 추레해진 몸을 내밀며 헤벌레하는 옷을 발견했다. 그리곤 저렇게 김상균을 책망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던지 김상균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 술을 마시다 취하면 항상 내 책임만 전가하는 놈이 바깥에서만 연대책임을 지려 한다. 거기다 대고 잘못 아닌 잘못에 사과를 하는 김상균의 심리는 대체 무엇인지.
"죄송합니다."
"얘는 제가 데려갈게요."
김동한은 사과를 끊고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집으로 돌아가잔 뜻일 것이다. 사장님이 막지만 않는다면 나도 돌아가잔 김동한의 독촉에 그럼직한 구실을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개새끼가! 나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욕을 눈빛에 모두 담아 김동한에게 건넨다. 사장님은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아까부터 마뜩잖은 표정으로 나와 김동한을 번갈아본다.
"저 오늘 차 가져왔어요. 데려다 줄게요."
"...아니, 제 말은!"
"..물론, 그쪽도."
물론 그쪽도...발음의 모서리를 꼼꼼히 씹으며 말하는 텐션이 너무 강해 김동한 역시 거절하진 못한다. 김동한의 어깨가 움찔한다. 기싸움에 눌린 김동한이 짜증난단 눈빛으로 벤치 위 내 옷이 담긴 봉투를 어깨에 걸었다. 그것이라도 챙겨 관계성 부분에서 우위라는 것을 사장님한테 표출하고 싶어서일까. 하여튼 김동한의 마음은 도통 알지를 못하겠다. 김상균은 대충 차 문을 열어 손으로 먼지를 쓸었다. 가까이서 꼼꼼히 보니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차는 남색으로 꽤나 고급스러운 때깔을 지녔다. 김상균은 역시 영앤리치... 이런것에도 덕통사고를 당하는 나 자신이 어이가 없다. 김상균은 마침내 앞문을 열어 김동한에게 안기듯이 붙잡혀 있는 나에게 눈빛을 쏘았다.
"타요."
"아니, 전 그냥 얘랑 가면 돼요. 걱정은 감사하지만..."
그 무슨 개똥같은 자존심일까. 김동한의 마지막 발악에 김상균은 크게 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
"둘이서 가는 거.. 짜증나니까."
말의 끄트머리를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인 듯 작게 얼버무린다. 김동한은 멍한 얼굴로 홍당무라고 느낄 정도로 빨개진 그의 얼굴을 쫓았다. 완벽히 김상균의 승리였다.
***
사건은 그 뒤로 일어났다. 나와 김상균의 로맨스 관계를 뒤집을 두 번째 터닝포인트 기회를! 카페 안 김상균은 펜을 문 채로 수첩에 꼼꼼히 뭔가를 적었다. 식탁 위에 있는 계산기도 두어 번 두드려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김상균은 인터넷 종료를 끝으로 현빈이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걸레질을 하고 있는 현빈이에게 뭔가를 검사 받듯 수첩을 건넸다. 무표정의 중심을 잡아주던 권현빈의 광대 근육이 한껏 올라가며 화색이 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만 괜히 설레발을 쳤다가 실망감만 커질까봐 계속 원두기계를 돌렸다. 돌돌돌- 원두가 갈리는 소리 위로 현빈이의 열정적인 함성이 겹친다.
"와, 진짜요?"
권현빈은 늘 좋은 일이 때마다 제 반경의 사람들이 아니라 김용국에게 소식을 알리러 간다. 툭- 하고 아련하게 밀걸레가 내쳐진다. 권현빈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김용국의 어깨를 치며 별사탕 같은 눈빛을 굴렸다. 나는 그것으로 그가 들은 소식이 희소식임을 알아차린다. 뭐지. 김상균은 수첩을 들고 내게 다가와서 두어 번 헛기침을 날렸다. 공중으로 눈을 돌리기 몇 번, 말을 어물거리다 귀에 제 얼굴을 갖다댔다. 낮고 부드러운 온풍이 분 듯한, 혹은 솜사탕을 귀에 굴린듯한 그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갑작스럽게 훅- 하고 끼치는 따뜻한 숨에 나는 본능적으로 숨참기를 멈추었다.
"우리 여행가요."
...순간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발 끝에 모여있던 혈관 세포들이 역류하며 심장을 마구 후드려 팼다. 얼굴이 불을 덴 듯 뜨거워진다. 김상균은 말을 마치고 황급히 얼굴을 떼서 포스기로 통통통 잰걸음을 뛰었다. 꼭 그 품새가 냄비를 향해 몸을 굴리는 토마토 같달까.
"야, 사장님이 우리 다같이 여행가쟤애애애앸!"
"닥쳐 권현빈."
"네 형."
권현빈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내 심장에 찬 물을 끼얹었다. 그런 권현빈의 흥분에 김용국이 칼같은 경고를 날렸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니까 직원 다 같이 여행가잔 소릴 왜 얼굴 빨개져서 하냐 이거다!! 김상균은 오해하는 발언 하는데 천재적인 기질이 있는게 분명하다.
***
"다들 알아서 점심 먹어요."
"네, 사장니임!"
"현빈이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나무와 석지가 어우러진, 그리고 겨울의 끝을 간신히 물고 있는 빨간 꽃이 곳곳에 피어있는 곳. 우리는 산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갈색 나무 벽지가 인상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대충 짐을 구석 모퉁이에 바리바리 밀어 넣고 점심을 챙겼다. 애들이 다들 요리하기 귀찮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챙겨 오기로 했었다. 나는 가방만 크고 들 것은 적은 짐을 풀어 휑뎅그렁하게 놓인 도시락을 집었다. 나 역시 요리란 행위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도시락은 존나 간단한 김밥! 나는 도시락 뚜껑을 따고 주린 배에 음식물을 채웠다. 사장님 앞에서 체면? 동물적 본능앞에 그딴 건 없다. 안 들키면 그만인 것을. 평생 나란 주체와 안 어울리던 등반을 시도한 탓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옆구리를 돌며 진탕을 쳤다. 밥을 흘리는 건 둘째요, 수저에 밥을 그득히 뜨고 악어같이 입을 쩍 벌리는 무장 해제를 한다. 그 순간 이상한 기운이 등 뒤에 도사렸다. 불길한 기운에 시선을 모로 돌렸다.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잘 먹네."
김상균이 날 웃으며 쳐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시발!!
"켁! 컥!!!"
밥풀이 튀며 공중으로 흰 것이 미세먼지처럼 나부낀다. 그 슬로우 모션에 깔끔한 것을 사랑하는 김용국의 질겁한 시선이 내 얼굴과 닿았다. 용국오빠 미안해요 사랑해요 I LOVE YOU... 김용국의 흰 후드티에 모서리가 사라진 밥알의 입자들이 나뒹군다. 김용국은 헛웃음을 지으며 티슈를 집으러 화장실로 자취를 감추었다. 푸하하하하핡! 권현빈은 기겁한 김용국의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운지 복부를 잡고 흔들기 바빴다. 알바생들의 얼굴에 한바탕 웃음이 걸린다.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것을 신경쓸 겨를 없이 권현빈의 웃음이 민망해 들고 있는 김밥을 집어 입안에 쑤셔 밀었다.
"이거나 처먹어."
"헙!!"
우씨...나는 애꿎은 김밥에게 화풀이를 하며 포크로 그것을 푹푹 찍었다. 김상균이 제 추한 작태를 어떻게 봤나 궁금하다. 그러니까 이런 집 같이 편한 곳은 오면 안된다. 내 본면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아주 위험한 곳이다. 쪽팔려 미치겠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밥풀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계속 김밥을 입에 들이밀었다.
"용국씨, 티슈좀."
김상균은 용국이에게 티슈를 받아들더니 몇 장을 뽑았다. 그리곤 슬금슬금 나에게 무릎을 밀며 다가온다. 또 뭘 하려고..거대한 손이 햇빛을 등지며 덮친다.
"여기 나 좀 봐요. 닦아줄게."
존나 잘생긴 사람이 채 30센티도 안되게 다가와서 얼굴을 닦아준다고 상상해보라. 심장이 남아날리 있나!! 넓은 손등의 핏줄이 제가 남성임을 여실히 드러내며 불룩거린다. 밥풀의 향로는 종잡을 수 없었던지 동그랗게 호선을 그린 이마까지 티슈를 쥔 손길이 미쳤다. 꼼꼼히. 아이 얼굴을 닦듯 세심하다. 손의 따뜻한 온도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멍한 제 얼굴을 담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 심장이 계속 뛰었다. 미친. 이제 김상균의 얼굴 앞에선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런데, 사장님...제발 이런 오해할 행동 좀 하지 마시라구요..
"됐어요. 사장님. 제가 닦을게요."
김상균을 완벽히 꼬셔 썸의 상태로 만들때까진 안된다. 이 로맨스가 내린 을의 취급을 거부하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김상균에게 쳤던 최초의 철벽이자 마지막 철벽이었다. 티슈를 쥔 손을 김상균의 가슴 부근께까지 밀어내자, 그가 두 손을 쥔 채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구겼다. 어쩐지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저건 어떤 감정의 표정일까. 포커페이스가 워낙 심한 남자라 입술을 살짝 내밀고 있는 저 귀여운 행동이 뭔 뜻인지 모르겠다. 썅. 나만 코피나오네. 아마 확신하건데, 김상균 본인도 왜 제가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었는지 모를것이다.
아까의 쪽팔림 때문에 나는 김상균과 말 없이 침묵의 시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계속 내 옆에서 먹지도 않는 케이크를 뚫어져라 보셨다. 미친 고해성사하나. 남은 배고파 디지겠는데. 김상균은 돼지처럼 처 먹는 나의 옆에서 젓가락을 들었나 놨다를 반복했다. 긴 고민의 시간이 지난다. 김상균은 마침내 결심한듯이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제 도시락에서 케이크를 집었다. 그리곤 내 도시락으로 케이크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이거 먹어요!!"
"어?"
"어제 밤에 만들었어요."
김상균은 말을 마치고 급한 손길로 제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갑자기 내려놓은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장님이 주저하며 올려놓았던 것은 이벤트 때에만 판매한다고 아쉬워했던 카카오 라이언 미니케이크였다. 고개를 숙이고 딴 짓을 하는 김상균의 귀가 빨개져 있었던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아니면 그냥 아까 제 친절을 거부한 민망함의 여파일까. 그것을 놓칠리 없던 약삭빠른 아름이가 또 오지랖 그물을 휘두른다.
"어? 사장님 그럼 저희 것도 다 챙겨 오셨겠네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내 앞으로 안으며 김상균의 선물을 사수했다. 급작스레 타격을 입은 김상균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한다. 친절함과 다정함이 몸에 밴 김상균의 태도는 뻔하지 뭐. 보라 김상균! 이 캐릭터의 흐름대로라면 또 분명히 도시락 하나 더 꺼내서 케이크 애들한테 나눠줄...
"아름씨는 나중에 가게 냉장고에서 꺼내줄게요"
롸. 내 예상을 뒤엎는 반응이다. 와 김상균 미친 철벽보소. 여러분 보셨습니까? 김상균이 이렇게 갓벽합니다...외치세요 김상균 갓-벽.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코피를 쏟고 만다.
***
부른 배를 북처럼 두드리며 권현빈과 김용국이 널부러진다. 아름이와 세영이, 그리고 다른 알바생들까지 공복을 채운 기쁨에 바닥에 누워 몸을 딱 붙였다. 다들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여기 오면 뭔가 할 줄 알았더니 막상 오니까 아무것도 안한다. 게임을 하기엔 너무 소수고 그렇다고 아무 얘기 안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처지고. 결국 나는 회심의 카드를 꺼내든다. 창백한 달빛이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이럴 땐 무서운 얘기를 하면 딱이란 뜻이다. 무서운 얘기해요! 다들 무료했던지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균만 빼고.
"..그래서 뒤에서 내가 세탁기 쪽으로 갔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예요."
권현빈이 허리를 빳빳히 세운 채 근엄한 표정을 떨어뜨린다. 이 자식이랑 직장베프 먹어 잡담을 나눈 게 백만년째이다. 어쩌면 이렇게 안 무서울 수 있을까. 저렇게 안 무섭게 말하는 것도 재주네. 흔한 레퍼토리에 고개를 저었다.
"귀신ㅇ..."
"꺄악!"
"아니 그래서 귀신이..."
그리고 그 흔한 레퍼토리에 굳이 굳이 속아주는 한 명의 여자. 김상균의 말랑해 보이는 팔을 잡으며 아양을 부리는 아름이... 저 정도면 내가 졌다. 그 근성에 분노가 서린 이를 질겅질겅 씹었다. 아름이는 사장님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며 더더욱 아양을 피웠다. 사장님 무서워용 하는데 목소리 뒤에 저 물결표시는 뭐냔 말이다!! 제발 아름이 OUT. 김상균이 제발 저 여우 근성을 간파하고 또 한 번 철벽을 쳤으면 좋겠단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예상을 뒤엎고 김상균은 그 재미없는 이야기에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예민한 신경을 집중시켰다. 아름이는 신경도 안쓰인다는 듯한 과도한 집중력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아름이가 김상균의 눈치를 살피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비장의 기술을 쓴다.
"사장님 무서워용..."
"...저도요."
".....???"
롸? 김상균은 권현빈의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무섭다는 듯이 무릎을 끌고 제 얼굴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저 애기같은 모먼트는 뭐람. 아름이는 당황하여 아, 무, 무서워요? 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아마 김상균이 무서워하는 자신을 챙기고 다정남의 모먼트를 기대했을진즉. 쌤통이다. 권현빈은 아름이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방자하게 제 가슴을 벽쪽으로 뻗었다. 그리곤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두어 번 치며 꺼들먹거렸다.
"야, 무서우면 이 오빠 어깨에 기대라?"
권현빈의 눈치 없음을 수치로 계산한다면 제로에 가깝다. 그 눈치를 관망하던 김용국이 혀를 찼다.
"...븅신새끼."
"아, 형. 왜 나한테만 그래요!"
그와 달리 김용국은 눈치가 빠르다. 김용국은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권현빈의 소설이 재미 없다는 것을 표명했다. 권현빈 이야기 재미없어요. 용국은 결연하게 무릎을 다잡고 자리를 좁혀 나갔다. 좀 더 무겁고 시린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불이 꺼지고 김용국은 어디서 성냥을 가져왔는지 촛불 하나에 성냥을 켰다. 화르륵- 붉은 화염이 회색 심지를 꾹 물었다. 안 그래도 김용국은 무표정한 얼굴이라 냉한 기운이 강한데 저 특유의 무감각한 톤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다들 김용국의 이야기에 홀린듯이 빠져들었다. 권현빈의 서운한 입술이 삐죽나온다.
"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이야긴데..."
"...."
숨을 못 쉬던 김상균의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인다. 사장님, 혹시 떨고 있나요...??
***
김용국은 이야기를 하다 지쳐 이불을 펴고 잠이 들었다. 와 어떻게 이렇게 일찍 잘 수가 있지. 역시 우리 카페의 대표 고양이라 할 만한 습성이었다. 우리는 자고 있는 김용국을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또 조촐한 술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한 병, 두 병 술병이 놓이고 오징어같은 각종 안주거리가 쌓여갔다. 나는 이번엔 최대한 몸을 사리기로 결심했다. 오바이트를 쏟으며 골골댔던 끔찍한 잔상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김상균도 나의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내 옆으로 붙어선 계속해서 내 술잔을 체크한다. 굳이 감시안해도 알아서 덜 마실건데 말이다. 2병을 넘어가자 김상균은 알딸딸한지 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두어 번 문질렀다. 피곤한지 긴 속눈썹이 내려앉을 듯 말 듯 했다. 붉은 입술이 하- 하고 짧게 숨을 토해냈다. 시발 섹시해... 김상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계속해서 주저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뭐지, 술주정인가. 자기관리 최상급이라는 김상균의 술주정은 꽤 명장면일 것인즉.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김상균의 굳은 몸이 풀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내 희망을 버리고 김상균은 이부자리를 펴고 제 몸을 뉘였다. 이윽고 검정 가죽시계를 걸친 팔뚝 한 쪽이 눈 위로 내려앉는다. 뭐야...자는 거야?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술에 콜라를 따랐다. 아휴, 술 맛 안나.
"야, 우리 자자."
"그래, 자야겠다."
깐 술병이 15병을 넘자 우리는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권현빈 혼자 5병이라니. 진짜 말술이다 싶었다. 쟤를 감당할 베프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나는 권현빈이 제 몸에 이불을 돌돌 말아 곯아떨어진 것을 보고 나 역시 꽃이불을 폈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비록 옆은 아니지만 사장님과 같은 방을 쓰고 있다니. 나는 결국 푸른 새벽의 절경을 안주거리 삼아 밤을 지새기로 했다. 뭐 날 새다 애들이 잠꼬대 하면 내 눈만 이득이지 뭐. 괜히 김상균의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저를 을의 입장으로 밀어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그 얼굴을.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을 김상균은 모르겠지. 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모로 돌리자, 김상균의 긴 속눈썹이 빛에 취해 명예롭게 반짝였다. 그는 뭐가 자꾸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리곤 이불을 걷는 소리.
"으음..."
시발. 왜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난리야? 나는 황급히 몸을 떨어뜨려 다시 이불을 덮었다. 뭐야. 뭐 잠든지 1시간 밖에 안 돼서 깨? 자기 얼굴에 대한 사랑이 특출나니까 자기는 잠을 잘 때도 잘생겨야 한다는 건가? 거울보나? 온갖 의문점들이 머릿속을 뒤엎을 시점에 그는 이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반경에서 가장 가까운 현빈이의 허리를 흔들었다.
"현빈씨..."
"크르렁....컭!!"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진 현빈이의 모습에 김상균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결국 허리를 일으켜 내 쪽으로 몸을 꼬았다. 뭐야. 왜 갑자기 이 쪽으로 와? 사박사박- 바닥을 밟는 조그마한 소음이 떨어진다. 그가 내 곁에 왔다는 것이 느껴지게 차가운 숨이 떨어졌다. 김상균은 한참을 그렇게 내 곁에서 주저했다. 호기심이 동하여 실눈을 뜨자, 벌개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김상균과 마주한다. 김상균의 손이 마침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사장님, 뭐 불편한 거 있어요?"
막 일어났다는 듯한 제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이 정도면 연기대상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게 아니고...."
"왜요?"
"아까아... 용국씨가 너무 무서운 얘기 해서..."
"술 깨고 싶은데..밖으로 혼자 나가기가..."
"무서워요?"
김상균은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24살의 성인. 그것도 대단한 스펙을 가진 남자가 저렇게 무서운 이야기 하나에 약해지다니. 술기운 덕에 빨개진 얼굴인가. 아니면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인지 홍당무가 된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무슨 이유든 상관없었다 시발. 김상균 귀여워!! 지금 내 코에 흐르고 있는 것이 코피인가? 오늘로써 코피를 터뜨린 것이 세 번째다. 이쯤되면 우리는 이것을 병명으로 칭할때도 됐다. 김상균 얼굴만 보면 코피나오는 병. 땅땅땅! 나는 웃음을 만면에 띄고 사장님의 어깨를 잡았다.
"나가요."
***
흐린 달빛이 구름에 갇혀 거뭇거뭇 고개를 내밀었다. 쓰린 술기운인지 바람이 쓰린지 겨드랑이 안 쪽이 시리다. 나는 팔짱을 끼고 추위에 저린 팔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렇게나 풀밭에 주저 앉았다. 비가 왔던지 풀이 진 둔덕에 물컹하고 찝찝한 기운이 바지를 덮쳤다. 김상균이 마른 세수를 하며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괜히 추운데 나오자고 했나봐요."
"아니에요."
"무서운 거 싫어한다고 하셔서 실망했죠."
존귀였는걸요..라고 골백번을 외치고 싶었다. 김상균 당신이란 존재는 숨만 쉬어도 존귀탱인 것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사장님."
"....."
"사장님은 뭐든 귀여우신데요!"
"완존!"
"이만큼!"
나는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들고 사장님의 얼굴 아래로 따봉을 그리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이가 없었던지 아니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온 미소였던지 사장님은 넓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웃겼다. 어렸을적부터 개그우먼 모먼트가 강했던 나는 짝사랑의 상대를 웃겼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망가지면 어때. 김상균이 웃었는데!! 김상균이 얼굴을 모로 돌리자, 가까이 다가온 잘생김에 저절로 입꼬리가 휘어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던가. 예쁘진 않지만 김상균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눈꼬리를 접었다. 그런데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투명하고 흰 피부가 다 비칠정도로. 김상균이 내 웃는 모습 뒤에 다시 한 번 허- 하고 섹시하고 짧은 숨을 토했다.
"그거 알면서 하시는 거예요?"
"뭐가요...?"
뭘 말하는 거지. 나는 물음표를 얼굴위에 띄운 채 다시 한 번 반문했다.
"...그렇게 웃으면 제가 너무 설레요."
***
제 글 B편이 초록글에 올랐더라고요...생각도 못했는데 진짜로 감사합니다!
늘 재밌게 봐주시고 정성스레 댓 달아주시는 비회원님들 그리고 회원님들 다들 고마워요!!! ㅠㅠ저 맨날 댓글보면서 광대 퍽발...
암호닉 명단 : [베리] [뽀쨕] [빙구]
혹시 암호닉에 오타가 났거나 빠지신 분들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보아요!
다들 우리 상균이의 갭모에에 오조오억번 치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