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물넷이 되는 ㅇㅇ는 오늘도 아무도 반기지 않는 어두운 집안으로 발을 밀었다. 조용한 걸음으로 넓지 않은 곳을 걸어 제 방까지 가는 모습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 몰래 지켜보던 여우의 마음을 콕콕 쑤시게 하더라. 불도 켜지 않은 채 달빛에 의존해 제 자리를 찾던 ㅇㅇ가 침대 위로 엉덩이를 붙이고 무릎을 끌어모아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거기까지 지켜보던 여우, 펑 소리와 함께 작게 변하더니 앞발로 창문을 톡톡 두들겨 제 존재감을 알리던 그날. 요괴와 인간의 첫 만남이었다. 달빛 마저도 구름 뒤에 숨은 밤처럼 01. 검은 여우 W. 꾸기짐 이제는 어디서부터 꼬인 인생인지 고민하기도 지친다. 습관처럼 창밖을 확인하던 ㅇㅇ가 퐁퐁 내리는 눈에 잠깐 시선을 두다 곧 질끈 눈을 감았다. 두 달이었다.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여우들에게 시중을 받으며 생활하기 시작한 지 딱 두 달 하고도 일주일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이 아니야.’ ㅇㅇ가 살던 곳은 이렇게 매일 눈이 내리지 않았고, 눈이 내린다고 해도 저런 싱싱한 푸른색을 띄는 나무와 꽃은 겨울에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나풀대는 의상도 시중을 받는 여우 또한 말이다. 2018년 1월 3일, 길지도 짧지도 않던 스물넷의 생을 마감했다. 아니, 그럴 뻔했다. 답답한 마음에 옥상에서 하늘 구경 한다는 게 미련하게 보고만 있다 중심을 잃어서 추락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네 인생 그리 버릴 거면 내게 주지 않으련?” 몸이 기울어 추락하려는 와중에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을 땐 며칠 전 봤던 검은 여우가 전부였다. 웃긴 생각인 걸 알면서도 발이 붕 뜨는 순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저 여우라도 나를 붙잡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아가마.” 시리도록 차가운 손목이 내 손목을 잡았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일어났어?” 근 두 달 시중을 들어주는 여우들만큼 자주 보는 얼굴이었다. 아직 태어난 지 20년 조금 넘겨 이름을 받지 못했다고 여우야 부르라던 아이는 매일 아침 세숫물을 들여왔다. “그... 있잖아 누나, 보는 건 좋은데 침자국은 어떻게 안 될까?” “깔끔 떨기는.” “우리 종족은 원래 깔끔하다구.”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씩 웃으며 대답하던 여우가 꼬리를 살랑였다. “누나 앵두 좋아하니?” 들여온 세숫물로 얼굴을 씻던 ㅇㅇ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여우를 보았다. 뒤로 가만히 서 있던 여우들이 다가와 두꺼운 외투를 어깨 위로 걸쳐주곤 세숫물과 함께 사라지니 그제서야 ㅇㅇ의 입이 열렸다. “앵두?” “나랑 그거 먹으러 가자.” “이 날씨에......” 무슨 앵두냐고 말하려다 창문 밖 마냥 푸른 잎을 보고 입을 다문 ㅇㅇ가 손을 저었다. 추워서 싫어. 단호한 대답에 여우의 살랑이던 꼬리가 축 늘어지더니 쭉 뻗은 눈꼬리가 금세 처졌다. “나도 알아. 사람은 연약하다며.” 조금만 추워도 골골대고 우리가 툭 치면 부러진다구 미호님한테 들었어. 축 처진 모양의 여우가 침대 위로 엉덩이를 붙이더니 이내 꼬리를 팔랑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데 그 얼굴이 참 맑았다. 그래서일까. “앵두는 어디에 있는데?” ㅇㅇ의 목소리에 쫑긋 귀를 세운 여우가 손으로 벽을 가리켰다가 이상한 탄식을 뱉더니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이 무얼 의미하는지 너무 뻔히 보여 이만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춥지 않게 내가 꼬옥 안고 갈게.” ㅇㅇ가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모습이 해칠 것 같지는 않아 가만히 지켜보던 여우의 얼굴이 금세 당황으로 물들었다. 벙긋벙긋 소리는 나지 않으나 열심히 입을 움직이던 여우가 당황으로 얼룩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ㅇㅇ가 여우의 볼에서 손을 떼었다. “따뜻하다 너.” “여우는... 원래 따뜻하다구.” “그럼 그날 그건 여우가 아니었나......” 떨어지려던 찰나에 들려온 목소리 그리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손목을 붙잡던 차가운 손. “여우는 다 따뜻하다고 했지?” “그렇대도.” 침대에서 일어난 ㅇㅇ가 간단한 심호흡 한 번으로 검은 여우에 대한 생각을 지워냈다. 가자, 앵두 먹으러. ✨✨✨ 호족(여우족)은 다른 요괴들과 다르게 유독 하늘의 개입이 심했다. 하늘이 정한 여우를 수장으로 섬기게 되는데 수장이 되기 전 천계에서 미리 보내는 두 가지의 신호가 있다. 첫 번째, 본디 호족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하나의 꼬리를 원칙으로 하나 수장이 될 여우는 천계에서 살아온 만큼 꼬리의 갯수를 늘려준다. 그 모습이 다른 여우와는 확실히 다르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족들 사이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모습이니 호족들의 수장은 꼬리의 수를 붙여 미호라 불리곤 했다. 두 번째, 오로지 흰여우만이 고귀한 혈통으로 천계는 흰여우에게만 수장의 자격을 주는데 꼬리가 생기기 전부터 수장이 될 아이는 흰털이 검은털로 바뀌며 호족들 중 단 하나의 검은 여우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정국, 37대 수장이 되었다. “미호님, 해가 졌으니 이제 그만 쉬러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누가 그랬나. 호족의 수장은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정국이 보고 있던 것을 접어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있던 자리에 달이 대신 자리잡고 있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보던 정국이 얼굴을 구겼다. “아이들을 들일까요?” “되었습니다.” “밤에 잠도 잘 못 주무시지 않습니까.” 정국의 등을 졸졸 따라오며 시종일관 더 나은 잠자리를 위해 아이를 들여야 한다 향을 피워야 한다 잔소리를 퍼붓는 재하를 가볍게 무시하던 정국이 교각을 지나며 걸음을 멈췄다. 기우는 달은 항상 보던 것이니 당연히 익숙하기 마련, 허나 이 향은. “미호님?”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습니다.” “허나 아직......” “산책을 할 생각인데 방해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하며 다녔을 정국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낌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조용히 사라졌고 재하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정국이 교각을 건너기 시작했다. 예민한 코로 앵두향이 맡아졌다.
“익숙하다 했더니 고작 이거였나.” 별것도 아닌 앵두향인데 왜 익숙하다 못해 그리운 향까지 난 것인지. 교각을 완전히 벗어난 정국이 조금씩 보이는 앵두 나무로 시선을 두었을 때. 때마침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ㅇㅇ도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달이 기우는 밤, 하얗다 못해 시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다. 한참을 보고만 있던 ㅇㅇ가 정국의 등 뒤로 펼쳐진 일곱 개의 검은 꼬리를 보았을 때 정국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너였구나.” 부드럽게 풀린 정국과는 반대로 ㅇㅇ의 눈은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커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밤마다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귀신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여우인지 알 수 없던 존재, 이게 호기심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본인조차도 모르던 감정의 출처. “바빠서 너를 잊으며 살았다.” “너......” “지긋한 일상에서 너를 보러 가며 느꼈던 자유가” 이 그리움의 원인이었...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정국이 품으로 들어오는 작은 여인의 몸을 달래듯 당황한 손길로 끌어안았다. 바르작대는 생명체가 안쓰러워 등을 쓸어주니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진작 얼굴 좀 보여 주지...” “미안하구나.” “이렇게 따뜻한데 여태 차가운 줄 알았잖아.” 혹여 세게 끌어안으면 부서질까, 힘주어 토닥이면 숨이 멎을까. 자신이 데려오고 그 존재를 까마득히 잊었으니 이 아이 입장에선 제가 얼마나 미울까. 복합적인 감정이 조금씩 정국의 안에서 제 존재감을 알릴 때 드디어 ㅇㅇ가 정국에 품안에서 벗어났다. 말간 얼굴에 금세 얼어붙은 눈물 자국이 보였다. 연약한 존재였다. “네가 울렸으니까 책임져.” “어떻게 책임져 줄까.” 내리는 달빛에 가만히 서 본인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 꼭 화초와 같다 생각한 정국이 ㅇㅇ의 겉옷을 제대로 여미며 말했다.
“여우굴 구경이라도 시켜 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