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귀는데 있어서 최소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 이라던가 낯부끄럽지만 속궁합, 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앞에서 눈웃음을 치며 보란 듯이 소매를 걷는 김유권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대박! 그거 스위스 명품시계 까르띠에 아니야? 로고 보니까 맞는데?”
이태일이 먹던 과자를 똑 떨어트리며 종알댔다. 나는 흥 콧방귀를 끼고 나 자신을 보호하듯 팔짱을 끼었다. 그까짓 시간 확인용의 손목시계가 뭐라고. 요즘은 스마트폰 쓰느라 시계 따위 필요도 없었다. 부러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으응. 민혁 씨가 생일 선물로 사줬어.”
김유권이 쌜쭉하게 웃었다. 우리 권이 손목이 허전하더라구, 사실 이딴 시계보단 권이 손목이 훨씬 값지지. 오른편에 앉은 이민혁이 느끼하게 김유권의 볼에 뽀뽀를 남겼다. 나는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며 재빨리 작년 내 생일날 표지훈이 무엇을 해주었는지 기억 속을 뒤졌다. 이제 3년차가 되는 내 애인은… (심지어 내가 그 많은 힌트를 줬음에도) 당당히 까먹고 있었다. 선물은커녕 기억조차 못한 것이다. 배알이 꼴려 나는 앞에 놓인 냉수를 원샷 했다. 기분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었다.
“버클(시계의 잠금줄)봐! 간지 쩐다. 그거 다 금이야? 도색된 거 아니고?”
“응. 18K 전부 금이야.”
“헐. 엄청 비싸겠네.”
“이천만원 정도였나?”
김유권이 이태일에게 대꾸하는 척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쩜 저렇게 아니꼬울 수 있을까. 나는 입술 거스름을 잘근잘근 씹었다. 여우같은 김유권은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교묘히 내 약점을 파고 들어왔다. 구밀복검(口蜜腹劍), 입에는 꿀을 바르고 배 속에는 칼을 품은 채.
“지호 넌 저번 모임 때 입고 나왔던 자켓 또 입고 나왔네? 이번 시즌에 그 회사에서 신상 나왔던데.”
내가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그걸 모를 리가. 하지만 밀린 카드빚이며 하루하루 마이너스를 갱신하는 통장잔고 앞에서 어떻게 사치스럽게 쇼핑이나 하고 있을까. 월급날까지는 보름도 넘게 남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어? 바빠서 몰랐지.
“진짜? 잘됐다. 저번에 민혁 씨랑 신나라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너 생각나서 하나 샀는데. 지훈 씨가 좀 눈치가 없잖니.”
김유권은 이때다 싶어 은근슬쩍 내 애인, 표지훈을 거들먹거렸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김유권은 발치에 내려뒀던 쇼핑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의도적인건지 가격표가 삐죽 나와 있었는데 50만원은 훌쩍 넘었다.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깟 옷 한 벌 받자고 자존심을 팔수는 없었다. 더구나 김유권이 준 선물이라면 더더욱.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입꼬리를 당겼다.
“됐어. 요즘 그 브랜드 슬슬 질려가고 있던 참이었거든.”
개뻥구라다. 고양이가 멍멍하고 염소가 꼬끼오하는 것만큼이나 헛소리였다. 고등학교부터 나를 알고 지내던 김유권이 얄팍한 내 거짓말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다. 김유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응, 묘한 소리를 내더니 새끼손가락으로 컵 표면을 훑었다.
“지호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내가 입어야지.”
아, 네네. 김유권은 돈지랄로 내 코를 납작하게 누를 속셈이었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다가오는데 마침 핸드폰이 진동했다. 잽싸게 받으니 대출문자다. 나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부디 입 근육이 경련하지만 않았기를.
“친구가 전화를 했네. 하하 이 녀석 내가 그렇게 바쁘다고 했는데. 잠깐 통화 좀 받고 올게.”
어, 친구야! 왜 전화 한거니? 내가 들어도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뒤를 돌았다. 등 뒤로 이태일이 이상하다는 듯 속닥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한번밖에 안 울렸는데? 존나게 쓸데없는 곳에만 눈치가 비상한 놈이었다. 어어? 뭐라고? 사촌동생이 돌잔치를 한다고오오!? 나는 부러 목청을 돋우며 걸음을 빨리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씽씽 볼을 할퀴며 지나갔다. 나는 조금 추워지고, 또 서러워졌다.
[블락비/피코] 운명의 급전
w. 검백
나와 김유권은 묘하게 인연이 질긴 데가 있었다. 만나자마자 운명의 스파크가 파바박 튀었달까. 결코 좋은 쪽은 아니었다. 인사를 하며 손을 맞잡았을 때 나는 우리가 영원한 숙명, 라이벌로 남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툭 까놓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김유권 쪽도 별반 다르진 않았을 거다.
운명의 장난인지 뭔지 김유권과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을 했고 같은 대학, 같은 과를 갔다. 심지어 군대까지 같은 날짜에 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친구 이전에 쓸데없는 것에도 괜히 라이벌 의식을 느낀 채 경쟁했다. 성적부터 인기, 키, 몸무게, 노래, 춤, 아파트 평수, 옷 가격, 윗몸일으키기 개수, 콜라 마시는 속도, 머리카락 개수까지. 내가 키가 더 컸다면 김유권이 춤을 더 추는 식이었다. 내가 달리기를 더 잘하면 김유권은 옷이라도 비싼 것을 걸치는 식이었다. 우린 꽤 비등비등했다. 정확하게 계산을 하자면 내가 51:49 로 미묘하게 김유권을 앞지르고 있었다. 난 항상 (근소한 차이지만) 김유권보다 잘났고, 김유권은 만년 2등이었다. 내가 김유권이 쫓아오지 못하게 확 격차를 벌린 건 제대를 하고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표지훈, 이쪽은 우리 과 선배셔. 인사드려.”
“아, 안녕요.”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안녕요는 뭐지? 존댓말과 반말 그 사이의 어중간한 어투로 표지훈이 나와 김유권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표지훈은 잘생겼고,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입술이 하트모양으로 겁나 환상적이었다. 나와 김유권은 즉시 표지훈에게 반했다. 빌어먹게도 우리는 게이라는 성향과 이상형의 기준까지 같았다.
대학 생활 내내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우리는 한 학년 아래인 표지훈 후배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못 볼꼴을 다 보였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만큼 우리는 진지했고 치열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싸웠다. 표지훈이 지나가면 서로에게 웃으면서 앞담을 까는 건 일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삼각관계라니 유치하기도 하지.
표지훈이 정말 좋아서 그런 건지, 김유권 때문에 오기가 생겨서 그런 건지 혼란스러워질 즈음 표지훈이 돌발 선언을 터뜨렸다.
“나 외국으로 떠나.”
졸업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듣는 즉시 벙쪘다. 어, 어디로 가는데?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멀리 가. 표지훈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왜, 왜 가는데? 꼭 가야하는 거야?”
“음… 굳이 한 이유를 대자면 돈 벌러 가는 거겠지.”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돈 벌러 그 먼데를 간다고?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표지훈의 옷차림을 보면 아닌 듯해도 은근히 명품관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가 못해도 졸부집 아들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 걸까. 심장이 부서져라 뛰었다. 소주잔이 흔들리는 손에 치여 엎어졌다.
“야, 쏟아졌잖아.”
무심한 듯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얼마나 표지훈을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소주병은 겨우 반병밖에 비지 않았다. 눈에 고이는 이 눈물이, 알코올 탓은 아니라는 거다.
“가, 가지마. 가지마 지훈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김유권이 있다는 것도, 어이없이 날 보는 동기들이 있다는 것도.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제 발에 걸려 풀썩 넘어졌다. 우지호, 괜찮아? 표지훈의 목소리가 위에서 쏟아졌다. 나는 표지훈의 바지를 붙잡고 일어서서 그를 확 껴안았다. 표지훈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너 없으면 못살아, 흐윽. 가지마 지훈아. 내가 다 먹여 살릴게. 으헝헝.”
“우지호?”
드물게 표지훈이 당황했다. 나는 도리질 하며 힘껏 표지훈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물까지는 좋았는데 콧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책임질게! 흑, 나 너 없음 못 산단 말이야. 흐으으, 그냥 옆에 딱 있어주기만 해줘. 곁에 있기만… 으아아앙!”
쪽팔린 지도 모르고 목 놓아 울었다. 지금 나한테 고백한거냐? 동굴처럼 표지훈의 깊고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난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내 말이 가게 안을 울렸다. 모든 사람이 날 보고 있었다. 본의 아닌 커밍아웃. 눈물범벅인 얼굴을 표지훈의 목덜미에 문질렀다.
“알았어.”
표지훈은 용감하게도 내 추잡스러운 고백을 받아줬다.
그게 불행의 씨앗이었던 거지. 3년 전의 철없던 나를 생각하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당시 난 김유권을 이겼다며 제법 의기양양 했었다. 항상 패배를 모르고 표독하게 날 째리던 김유권도 그때만큼은 나의 승리를 인정하며 겸허히 백기를 들었다. 코가 쑥쑥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우리 대학 내 최고 인기남 표지훈. 그가 나의 것이었다. 아아, 통쾌해라. 나와 표지훈은 썩 괜찮은 커플이었다. 성격도 잘 맞았고 속궁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표지훈은 사춘기 소년처럼 정력이 넘쳤다. 섹스밖에 모르는 그의 단세포적인 뇌에 지칠 때도 많았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았다. 딱, 1년까지는 그랬다.
내가 졸업을 하고 취준생(말이 취준생이지 백수다)에 남아있을 때 표지훈은 이제 4학년 차였다. 물론 그놈도 취직 걱정이 많았겠지.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당시 나는 표지훈까지 챙겨야하는 막대한 책임감을 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초조했다. 하루빨리 일자리를 구해 돈을 싹싹 긁어모아야 했다. 아르바이트하는 틈틈이 눈에 불을 켜고 이력서를 작성했다.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면접만 가면 떨어졌다. 표지훈은 그동안 오로지 섹스밖에 몰랐다. 섹스, 섹스, 섹스.
섹스, 좋지. 응? 서로의 사랑을 나누는 행위. 씨를 퍼뜨리려는 본능적인 번식 행위. 얼마나 좋아? 어? 근데 그게 정도가 있어야하는 거잖아. 아침, 점심, 저녁. 거기서 한술 더 떠 새벽. 표지훈 때문에 나올 정자도 없었다. 강제 고자가 된 것이다. 묽다 못해 거의 물 수준이 된 나의 정액을 북북 짜며 표지훈이 씩 웃었다. 옛날처럼 따라 웃을 수 없는 내 처지에 한숨이 흘렀다.
다소 고단한 표지훈과의 2년을 보내고 지금 우리는 3년차 커플로 접어들었다. 충동적인 고백치고는 꽤나 오래간 셈이다. 나는 중소기업 물류회사에 취직했고 표지훈은 내가 구한 월세방에서 뒹굴며 놀았다. 가끔씩 노트북과 헤드셋을 가지고 뭐라 떠들긴 하는데, 뭔지는 잘 몰랐다. 게임에서 만난 얼간이들이랑 화상 채팅이라도 하나 보지. 내가 장난스럽게 취직 안하냐고 물을 때마다 표지훈은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곤 했다. 필요 없어, 네가 나 책임져 준다고 했잖아?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노력조차 않는 표지훈의 태도에 난 조금 상처받았다. 표지훈은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내 마음을 몰라줬다. 나는 점점 우리 관계에 지쳐갔다.
김유권이 하도 얄밉게 굴어서 안 그래도 기분이 개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 표지훈의 행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표지훈은 방바닥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걸그룹이 궁둥이를 흔들고 있는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 거렸다. 손은 부지런히 입에 과자를 바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 왜 꺼. 한참 재미있었는데.”
넌 노래가 재밌냐?! 재밌냐고! 리모컨으로 띡 티브이를 끄고 표지훈의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던졌다. 누군가를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도, 사랑도, 궁합도 아니다. 씨발, 돈이 최고다! 나는 발로 표지훈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한풀이를 했다.
“응? 넌 왜 사니, 왜 살아? 김유권이 옷 줄 때 냉큼 받았어야 했어. 집에 식충이가 있는데 내가 배가 불렀지! 응?”
“아, 아파. 자기야.”
표지훈이 내 발길질을 피해 몸뚱어리를 뒹굴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3년 내내 집에 박혀 운동도 안한 녀석이 식스팩만은 여전했다. 유전적인 건지, 나 몰래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건지. 셔츠가 올라간 탓에 훤히 들어나는 표지훈의 근육질 몸매를 보자 더 짜증이 났다. 몸매가 좋은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적어도 애인에게는 그랬다. 표지훈이 쓸데없이 잘빠진 바람에 항상 데이트를 나가면 추파가 들어온다. 남남 커플이어서 그런지 사귀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표지훈에게 연락처를 물어온다. 생각해보면 표지훈이랑 사귀고 나서 잘된 일이 없다. 섹스밖에 모르는 저 무심한 놈은 내가 어떤 걱정을 시름시름 앓고 늙는지도 모르고…….
무언가가 욱! 받쳐왔다. 나는 표지훈을 걷어차던 것을 멈추고 돌아섰다. 재수 없게 눈물이 찔끔 고였다. 인생이 너무 초라했다. 볼품없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땅이 부서져라 걸어 쾅! 방문을 닫았다. 허름한 월세방은 방음벽이 너무도 취약했다. 표지훈의 목소리가 문과 벽을 투과해 내 고막에 박혀 들었다.
“우지호, 생리해? 요새 엄청 까탈스러워졌어.”
여전히 표지훈은 내 마음을 몰라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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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완결을 내지 않고 자꾸 새작품만 가져오네요 ㅋㅋㅋ... 같은 피코지만 분위기가 확 다른 걸로..() 어떤 착한 꿀벌님이 독방에 제 글을 홍보해주셔서 갑자기 덧글수 폭발 ;ㅁ; 과분한 관심이에요...ㅠㅠ 감사합니다!
①새우깡
덧글, 피드백 늘 사랑해요~~
+ 단편/장편을 구분해서 필명을 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