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내일이네. 아, 가지말까.”
달력에 동그랗게 표시된 날짜를 보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무신경하고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표지훈이었지만 그는 요새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섹스할 때도 자꾸만 내가 신경질을 냈고, 툭하면 잔소리를 줄줄이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는 표지훈이 내 변덕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치킨을 사왔는데, 그 자리에서 다 엎어버렸다. 병신아! 하필 사와도 왜 제일 비싼 KFQ 치킨을 사오는 건데!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표지훈의 포켓 속에 들어가는 용돈은 전부 내 월급에서 깎여 나오는 것이었다. 치킨이 쏟아져 바닥에 양념이 지저분하게 튀었다. 심했나 싶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감정이 통제 되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보천치처럼 줄줄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짜증내는 횟수가 잦아지자 표지훈은 포기했는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지 딴에는 반항이었다. 무시하겠다는 거지. 그래도 내가 지 밥줄인데 굽신굽신하지 않고 어떻게 배겨? 나는 나대로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는데 핸드폰 단말기에서 벨이 울렸다. 난 발신자 확인도 안하고 전화를 받았다.
[지호야.]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팔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김유권이다. 그냥 끊을까 했다가 마음을 다스리고 잠자코 있었다.
[내일 물고기 동호회 모임 나오는 거지?]
“당연하지.”
나긋나긋한 어조에 당차게 대답했다. 아차, 실수.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김유권과 이민혁이 붙어서 닭살을 떨어대는 걸 또 봐야하다니. 벌써부터 욕지기가 치밀어서 까득 이를 깨물었다.
[지호 너도 알다시피… 내가 대학생 때 표지훈을 좋아했었잖아.]
뜬금없는 김유권의 고백에 재채기가 나왔다. 한 번도 제 입으로 표지훈을 좋아했다고 한 적 없던 녀석이다. 약을 처먹었나. 무슨 꿍꿍이지?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요즘 지훈 씨랑은 잘 지내는 거지?]
원래 나는 물고기 동호회 모임에 표지훈과 함께 참석했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김유권이 대기업 월급쟁이인 이민혁과 사귄 뒤부터 표지훈을 데려올 생각을 아예 접었다. 김유권이 말하길 이민혁은 한 달에 500만원을 기본으로 보너스다, 성과급이나 뭐다 하면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인다고 했다. 우리 집 식충이 표지훈과는 천지차이였다. 분명히 표지훈과 동행하면 김유권이 은근슬쩍 표지훈에게 취직은 했느냐, 연봉은 어떻게 되느냐 물을 텐데 내가 어찌 시뻘겋게 눈 뜨고 그 지랄을 보고 있으리오.
응, 우리 지훈이는 아직 백수야. 한 달에 수입 빵푼! 게으르고 근성도 없는데 핸드폰 요금제는 더럽게 비싼 팔만 오천원대를 쓰는 거 있지? 기계 값만 한 달에 만 이천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가~
입이 찢어져도 그렇게 말할 순 없다.
[지호야?]
“어, 어. 물론 잘 지내지. 아주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하하하하. 밤일 때문에 허리가 쑤셔서 잠을 못 자겠다니까.”
아주 행복한 척 거짓부렁을 줄줄이 늘여 놨다. 잠시 수화기 저편에서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 그래? 사실 내가 민혁 씨에게 대학교 첫사랑 얘기를 조금 했거든. 지훈 씨가 네 애인인 걸 말해주니 아주 관심이 많던데. 가능하면 내일 같이 지훈 씨랑 올 수 있을까?]
“아, 지훈이는 바빠…….”
[방금 전에 문자 보내니깐 지훈 씨, 내일 스케쥴 없다고 그러더라. 주말이라 회사에 갈 것도 아니잖아.]
“…….”
[같이 올 거지? 응? 민혁 씨 대신해서 이렇게 부탁해.]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꺼진 단말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침대 위로 던졌다. 폰이 고장 나면 새로 사야할 텐데 물어줄 위약금이 걱정됐던 것이다. 제기랄,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지? 아아아악!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발광을 했다. 표지훈은 내가 이제 소리를 지르고 미친놈처럼 굴어도 상관도 안했다. 나는 들으라는 듯이 더 괴성을 질러댔다. 목이 쉬고 침이 말랐다. 표지훈이 방문을 벌컥 열고 쯧쯧 혀를 찼다.
“너 조만간 정신 병원 한번 가봐라.”
“꺼져!!”
베개를 집어 던졌다. 반사 신경이 뛰어난 표지훈은 방문을 엄폐물 삼아 내 공격을 피했다. 더 열이 치솟았다. 나는 학창 시절 표지훈이 사줬던 곰 인형에다 마구마구 주먹질을 했다. 묘하게 인형이 표지훈을 닮아 주먹질 할 맛이 났다. 때리면 때릴수록 신명났다. 표지훈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블락비/피코] 운명의 급전
w. 검백
결국 와버렸다. 나는 좌절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표지훈을 보고서 더욱 좌절했다. 오면서도 몇 번이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나와 오랜만에 외출한다며 즐거워하는 표지훈을 보니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하긴, 지가 창피해서 같이 다닐 수 없다하면 저 무심한 놈도 마음에 상처는 몰라도 기스 정도는 날 거다. 오늘 표지훈은 괜찮았다. 추리닝 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말끔하게 정장을 입으니 봐줄만 했다. 나는 속으로 이민혁과 표지훈을 비교해봤다. 입을 다물고 첫인상만 봤을 땐 압도적인 표지훈 승이다. 문제는 그 뒤였다.
나라고 표지훈을 갱생시키려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머리 쓸 일이 전혀 필요 없는 단순 노동직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소개 시켜줘도, 채 3일을 못가서 표지훈은 때려치웠다. 표지훈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누누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거 다 필요 없어. 글쎄 그 필요는 내가 정한다니까! 하여간 표지훈은 똥고집이었다. 표지훈을 소개시켜준 바람에 주선자인 나만 사장님께 된통 욕을 얻어먹었다. 다섯 번 정도 그 일이 반복되자 나는 표지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 한마디도 하지 마.”
“한마디도?”
문을 열기 전에 표지훈에게 경고했다. 표지훈은 심드렁한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그의 반질반질한 구두에 콱 발을 올리며 일갈했다.
“내가 말 하라고 할 때까지 한 마디라도 해봐! 그날로 우린 완전 끝이니까. 알아들었어?”
사나운 내 어조에 마지못해 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 후.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계획은 표지훈을 인형처럼 앉혀놓고 나 혼자 김유권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대충 내가 다니는 회사에 말단으로 일한다고 해야지. 월봉은, 음 300만원정도? 아니다. 너무 없어 보여. 400만원이 좋겠다. 나는 비장하게 웃었지만 서글퍼졌다.
김유권보다 잘난 우지호여, 안녕. 만년 2등이 1등을 넘어섰을 때의 처절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각오를 다지고 문고리를 잡았다. 표지훈의 불만이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가뿐히 씹었다. 나는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호 왔구나. 지훈 씨는? 아, 뒤에 오고 있네.”
김유권은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지보다 어린놈에게 꼬박 꼬박 ‘~씨’를 붙이다니. 느끼함이 지 애인한테 옮겼나. 별개 다 짜증나고 못마땅했다.
오늘 물고기 동호회 정모 인원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태일, 김유권, 김유권 남친 이민혁 외 12명, 그리고 나와 표지훈. 분명히 내가 망신당하는 꼴을 동네방네 떠들려고 김유권이 사람들을 모은 것일 거다. 지독한 놈. 평소보다 북적북적한 인원이 껄끄러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어?”
이민혁이 나를 보더니, 아니 내 옆자리에 앉은 표지훈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아는 사이였나? 고개를 갸웃하는데 김유권의 낭랑한 목소리가 퍼졌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도 왔네요. 우리 물사모(물고기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님들! 시작하기 전에 깜짝 소식이 있답니다. 들으시면 모두들 놀라실 거예요.”
김유권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기묘한 빛을 띠었다. 무기질 눈동자가 따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유기적으로 보였다. 나는 다리를 꼬고 만만의 준비를 했다.
“다들 제가 지호와 고등학교 동창이신 건 아시죠?”
“아하하, 물론이죠. 두 분은 물사모에서도 소문난 절친이잖습니까.”
절친? 개풀 뜯어 먹는 소리하네. 나도 모르게 비소가 튀어 나왔다.
“제 첫사랑이 지금 지호의 애인이라는 것두요?”
김유권은 돌직구를 날렸다. 오냐, 시시한 껍데기는 치우고 알맹이만 가자는 거지? 나는 뿌드득 손가락 마디를 접었다. 사방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정말이요? 진짜요? 물사모 내에서 인기가 좋았던 김유권인 만큼 파장은 컸다. 놀란 눈초리가 내게 이어졌다.
“설마 옆에 계신 분이, 그……?”
모두들 싱거운 표지훈의 낯짝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신경한 표지훈의 얼굴이 오늘만큼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옳지, 잘한다.
“이야. 유케이님(김유권의 물사모 카페 별명)께서 반하실 만하네요. 진짜 잘나셨습니다. 직업도 아주 근사할 것 같아요!”
올게 왔군. 나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지훈이, 그니까 제 애인은 현재 저와 같은 회사에 다녀요. 한 달 전에 저 따라 취직했어요. 일종의, 사내 커플이죠. 일할 때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와, 닭살. 부러워요!”
“하루 종일 보시겠어요. 딱 제 로망인데.”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졌다. 뭔 소리야? 지훈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내게 입모양으로 물었다. 난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뭐든 간에 백수보단 나아 보일 거다. 이민혁이 얼빠진 얼굴로 표지훈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쟨 왜 저래?
“어, 정말루? 너희 회사 꽤 위험하지 않니? 구조조정 들어갈 것 같은데 그새 신입사원을 뽑았단 말야?”
김유권이 새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맞는 말이었다. 가지치기도 바쁜 와중에 인력을 더 뽑을 리가 없다. 거짓말임을 눈치 챈 듯싶지만 상관없었다. 지가 지금 인터넷으로 찾아 볼 거야, 어쩔 거야. 하지만 김유권은 치밀하고 생각보다 더 교활한 놈이었다.
“지난달에 네 회사가 신입사원을 채용했다며. 홈페이지 들어가 보니 암 것도 안 뜨는데?”
톡톡 스마트폰을 터치한다 싶더니 김유권은 그새 증거물을 찾아 물사모 회원들 앞에서 당당히 내밀었다. 이런 된장, 이렇게 빨리 거짓말이 들통 나다니. 잘렸다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의아한 듯 궁금증이 가득한 24개의 눈알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만 싶었다.
“표지훈… 부사장님? 표지훈 부사장님 맞으시죠?”
적막을 깨고 이민혁이 졸린 듯이 말했다. 표지훈이 입을 열다 말고 날 보더니, 후 한숨을 내쉬었다. 까닥. 표지훈이 우아하게 고갯짓을 했다.
“어, 어떻게 여기에! 항상 영상 스크린으로만 보다가 드디어 직접 뵙네요. 인사드립니다, 이민혁 차장입니다.”
이민혁이 90˚로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얼떨떨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천재지변이 일어났나? 김유권도 마찬가지였는지 이민혁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민혁 씨, 그게 무슨 소리야? 부사장이라니?”
“아, 저쪽은 오성 그룹 회장님의 손자인 표지훈 부사장님이야. 몸이 안 좋으셔서 회사에 직접 출근은 못하고 자택 근무를 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이민혁이 다시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평소에 많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가 가게를 울렸다. 표지훈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고개만 한번 까딱, 움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 중심축을 잡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표지훈이 당연하다는 듯 팔꿈치부터 나를 받아줬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동자만 움직여 표지훈을 보았다. 왜. 혼란스러운 내 시선에 표지훈이 입모양으로 물었다.
“너… 재벌 3세였냐?”
“…….”
표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쇠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쇳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이제 주둥이 열어도 돼! 너, 재벌 3세였어?”
“응.”
“언… 제부터?”
“태어날 때부터.”
현기증이 돌았다. 하늘이 노래졌다. 아니, 가게 천장이 노란 거구나. 어찌됐든.
“왜 그동안 숨겼었어?”
“언제? 네가 안 물어 봤잖아.”
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입이 막혔다. 툭, 하고 무슨 끈이 끊어졌다.
“이, 이, 이 나쁜놈아아아아아아!!”
돼지 멱따는 괴성이 가게를 떠들썩하게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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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이네요 (웃음) 망글이라 에필로그를 가져올지 말지 모르겠어요..오..=_ㅜ 역시 새벽에는 글을 쓰면 안돼.
새우깡
혹시 암호닉 빠지신 분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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