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른 말을 해보래두. 얘, 입이 있으면 무엇 하느냐.
우리 마을에는 이름도 없이 그저 아가라 불리는 아이가 있었다. 세살배기조차 '난세야, 난세'를 입에 붙이고 사는 마당에 이름 없는 것은 흠도 아니었다. 가급적 존재가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역병들라, 순사가 잡아갈라 감추고 감춰야만 하는 것이 숙명이었다. 백일이 지나서도 살아있으면 다행이라 여기고, 성년이 되면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주마 약속하는 어른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제법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 세상 풍파에 덜 휩쓸린다는 것이 마을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마을 한복판에는 폐가로 여겨져 오던 집이 한 채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안 식솔들이 모두 떠나가, 주인 잃은 지도 오래되었었을 것이다. 그나마 골조가 탄탄한 기왓집이라 용케 허물어지지는 않았으나, 역신이 머무는 집이라 하여 모두가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꺼리던 집이었다. 그런 집에 어느 날 건장한 목수들이 여럿 모이더니 뚝딱뚝딱 고쳐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쪽머리를 한 아주머니들 여럿이 모여 쓸고 닦으니, 고새 반질반질한 부잣집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십 여 년 간 어떤 외부인의 유입도 없던 동네에 누군가 이사를 올 모양이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일꾼들 행색을 보아하니 돈있는 집에서 징집 안 당하려 도망오는 것이리라고, 그 집안의 재력을 두고 추측해보는 것이 한동안의 관심사였다.
곧 쓰개치마를 꽁꽁 두른 한 여인과 신식 양장을 한 아이가 이사를 왔다. 우리 마을에선 좀체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대단한 양반댁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각각 양손에 작은 보따리가 가진 짐의 전부라 모두가 의아해 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마을 한복판의 그 기왓집이었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새로 올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일찌감치 그 집 앞에 모여 있었고 나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여인은 급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서둘러 대문을 열려다 그만 바람결에 손에서 쓰개치마를 날리고 말았다.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비단을 바라보는 여인이, 어른들 몰래 읽은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가 저랬을까 싶을 만큼 희고 고왔다. 어미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리따웠다. 뒤따라 걸어오던 아이가 사뿐, 쓰개치마를 주워 여인에게 건냈다. 비록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으나, 그럼에도 아이 또한 사내인지 계집인지 분간도 안 될 만큼 예뻤다. 눈썹을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그려놓은 듯 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레 이어지는 코는 오똑 솟아 있었다. 고 새초롬한 입술을 바라볼 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정신도 못 차린 채 멀뚱히 아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여인이 모여있는 동네 애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 이 아이와 가까이 어울리면 아니 된다.
그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 고운 목소리로 미운 한 마디만 내뱉고선 집안으로 사라지니 얄미웠다. 아이도 우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이대로 보내줄 줄 아느냐.
- 얘, 너 우리랑 놀기 싫으니? 이 문 열고 들어가면 다시는 얼굴 마주할 생각조차 말아라.
아이는 내게 잡힌 제 소매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더니 내 손을 하나 하나 잡아 펴내고선 그저 싱긋 웃어보이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른들로부터 '계집애가 저리 선머슴 같아서야 쓰겠냐'는 소리만 들으며 골목 대장 노릇해오던 나였다. 그간 내 말을 거절하는 마을 아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모두의 앞에서 수모를 당했단 생각에 그저 무안하기만 했다.
대꾸 한 번 못하는 애는 나도 싫어. 그래도…예쁘잖아. 그 아이의 세련됨을 한 번 맛보고서도 얌전할 사람은 없었다. 본 적 없는 이방인, 도시아이, 귀티. 내가 아쉬운 입장이었다. 이름이 무언지, 왜 이사를 왔는지,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아 견딜 수 없었다. 몰려든 아이들에게는 재수 없다면서 돌아가자고 말하고 물려보냈다. 그 후 곧장 담장 가로 가서 폴짝폴짝 뛰어가며 집 안을 들여다 보려 애썼다. 한 번 발을 구를 때마다 사랑채를, 안채를 눈으로 재빠르게 훑었다. 집 뒤편까지 왔을 때 쯤이었다.
- 엄마야!
폴
담장 아래 숨어있던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나와 동시에 뛰었다. 덕분에 얼굴을 눈 앞에서 마주한 나는 불타는 고구마처럼 발-게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돌틈을 발로 짚고 담장 위에 팔을 걸쳤다. 너, 왜 아까 내 말 무시했니?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수첩과 신기한 막대기 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써보였다. 삼촌이 보여준 한글 교본 속 글씨와 똑같이 가지런한 필체였다. 사람들이 많아서 부끄러웠어. 그렇구나. 그런데 왜 말로 안 하니?
- 혹시 일본어 밖에 못하는 거니? 나 일본어 조금 할 줄 알아! 걱정 마!
아이는 소리 없이 쿡쿡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말을 못해. 화들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 그럼, 이름은…이름은 무언데?
아이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무어라 벙긋거렸다. 아아? 아가? 아가냐고 물으니 끄덕였다. 멋들어진 양장을 갖춘 아이가 이름이 아가라고 밝히니 우스웠다. 제 손가락을 주억거리며 나이도 밝혔다. 나보다 두 해 먼저 태어났다고 했다. 덩치가 조그마해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였다. 죄다 모순적인 아이로구나.
- 아가라고 불리는 거 싫지 않으니? 내가….
그 때 아이가 제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쉿.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네 어미인 거니? 아이는 재빨리 수첩에 글을 써서 찢어내고선 담장 너머로 던지고 제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한 거 아냐? 짜증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꾹 참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펼쳤다.
해 진 직후 다시 이 담장으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누워 있었다. 아주 큰 일을 저지르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전의 일들을 찬찬히 돌이켜 봤다. 담장에 오랫동안 발을 걸치며 치마에 흙이 많이 묻었던 터라 일부러 헌 치마를 입고 갔는데, 그 아이가 담장 앞에 서 있었다. 주홍빛 하늘이 짙은 파랑색으로 칠해지던 참이었다. 왜 아까 그냥 방으로 돌아가버렸느냐고 물으려 했는데 얼굴을 보니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서운해서 입술만 삐죽 튀어나왔다.
- 사실은…나 아까 네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
- 그런데 네가 곧장 가버리니 말해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집에 돌아가서 읽었던 소설책들을 뒤지고 또 뒤졌어. 최고로 근사한 이름 지어주고 싶어서.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애써 구겨 넣어뒀다.
- 태형.
- 어른 되면 새로 이름 지을 수도 있지만….
- 그래도 난 너 이렇게 부를래, 태형아.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련되고 도도한 그 아이는 더이상 아가가 아니다. 내게만은 태형으로 존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