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4
w.규닝
14. 환영이 아닌 것
처음엔 그게 좋았다.
재로 변한 집에서 나와 거의 무너져가는 허름한 옥탑방과 계약을 맺고나서 이틀째 되던 날, 몇일 전부터 저만을 훔쳐보고 있는 남자를 거둬 집으로 데리고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녀석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토록 위험한 중독이 될 줄은. 녀석이 집에 머물게 되는 날이 많아질수록 저 혼자 갖게 되는 시간이라던가 잠깐이나마 담배를 태우게 되던 시간들이 현저하게 줄었어도 괜찮다. 오히려 우현이 비흡연자라서 좋았다. 그렇게나마 사소한 습관을 바꾸게 된 것도 좋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놓여있던 물건의 위치가 다른 이에 의해 바뀌어져 있다는 것도 좋았다. 사소했지만 그만큼 좋았다. 정말이지 작은 변화래도 그게 좋았다.
나중에는 그런 게 좋았다. 하루하루 사는 의미가 없어 언젠가부터 눈에 보이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넣기 시작한 것이 이토록 가쁜 의미를 안겨주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도 몰라주는 제 삶의 의미를 그려 넣고 있다는 걸 녀석은 알았을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도 이만큼 살았어. 내일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오늘까지 살아있어. 그렇게 하루하루 그려 놓은 동그라미 옆에는 어느새 의미 모를 동그라미가 나란히 따라붙었다. 그래서 성규는 요즘들어 펜 뚜껑을 입에 물고 한참을 생각한다. 매일같이 그리고 있던 동그라미지만, 이제는 내가 그리기 싫어졌다고 인정한다. 성규가 멍한 눈을 들어 달력을 올려다보다가 펜 뚜껑을 닫았다. 남우현이, 이따가 알아서 그리겠지.
그렇게 한참동안을 텅 비어있는 달력만 쳐다보고 있으면 문이 열렸다. 아침 8시 정각 즈음이면 으레 그렇듯이. 그러면 성규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나서 말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성규가 우현의 시선을 회피하며 코를 훌쩍이면 곧이어 익숙한 대답이 들려왔다. 천상에선 뭐 먹고 살았는지 모르겠어서 집히는대로 다 사왔어! 우현은 언제나 시덥잖은 말장난과 함께 질릴만큼 웃어댔다. 성규가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던 손길을 멈추고는 잠시 우현을 흘겨다보면 아침이 시작됐다.
몇분 후면 달력은 채워졌다. 어느샌가 우현이 옥탑방에 들르면 언제나 가장 먼저 챙기고 있는 게 달력이었으니까.
* * * * *
"좀."
"응"
"대가리 좀 치워줄래? 하나도 안 보이잖아."
성규가 짐짓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제 발치에 앉아 무릎에 기대어 꾸물거리고만 있는 우현을 향해서. 아까부터 계속 험한 말로 쏘아댔어도 우현은 당최 들어먹지를 않았다. 성규가 티비 화면의 절반은 가뿐히 가리고 있는 우현의 머리에 진심으로 치솟는 짜증을 느끼면서 발로 우현의 허리를 밀어냈다. 씨발, 너 새디스트야? 왜 이렇게 욕 먹는 걸 즐겨. 성규가 잘 높이지 않는 언성마저 높여 우현의 웃는 낯짝에 또 한번의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에 우현은 그저 기분 좋아보이는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김성규.
"……."
"김성규"
"소리도 안 들리거든? 너 입 꼬매버리기 전에 닥쳐, 진짜."
"나보다 투니버스가 더 좋아?"
"어."
"진짜?"
"나 지금 진짜 참고있는건데."
"왜 투니버스가 더 좋아?"
"귀찮기만 한 니 머리통보단 좋아."
성규가 화면을 가리는 우현의 머리를 피해 옆 쪽으로 고개를 빼면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거머리새끼. 마음속으로는 우현을 향한 욕지거리를 끊임없이 뱉어내며 터지는 화를 꾹꾹 참은 성규가 입을 꾸욱 다물고 슬금슬금 자리를 빼려고 했을 때였다. 왜? 고개를 옆으로 갸웃한 우현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왜, 내 머리보다 투니버스가 좋은데.
"내 머리에는 입도 달렸는데!"
아, 또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우현의 입술이 성규의 입을 찾아들었다. 그에 옆 쪽에 놓아두었던 리모콘을 얼떨결에 손으로 짚은 성규가 으읍,하는 신호를 주었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녀석의 애정공세가 펼쳐질 때면 으레 그렇듯 공기는 부족했다. 남우현은 언제나 일방적이었으니까. 성규는 두 손으로 저의 뺨을 붙잡아오는 우현에게 고정당한 고개를 이리저리 비트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공기가 부족해도 남우현은 남우현이다. 제가 원했던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입술을 떼는 남우현은 아무리 강한 발길질로 걷어차여도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 날 이후로 생기게 된 매번 같은 생활 패턴이었다.
성규가 얼떨결에 짚었던 리모컨이 바꿔놓은 시사 채널을 다시금 투니버스로 돌려놓으며 입술을 닦았다. 진짜 미친새끼. 성규는 우현이 다가오지 못하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 티비를 시청했다. 그러면 우현은 배실배실 웃기만 할 뿐 한동안은 성규의 가까이에 다가오지 않았다. 키스를 하고 난 다음이면, 가까이 다가가봤자 얻게 되는 것은 어딘가에 생길 멍자국 같은 게 전부일 것을 알기 때문에.
또, 남우현은 이제 제법 저를 노려볼 줄도 알았다.
평상에 남아 제가 먼저 키스를 했던 그 날 이후로 생긴 또다른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습관이란 게, 이젠 이게 저에게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항상 헛웃음만 나게 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우현은 시도때도 없이 성규에게 뽀뽀를 시도했다. 밥을 먹을 때도, 빨래를 널 때도, 먼저 선잠이 들 때에도 둘만 시작하는 브루마블을 하는 와중임에도 틈틈이. 물론 그럴 때마다 성규는 우현의 멱살을 잡아다가 멀찍이 집어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우현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까지 내어 웃으며 바닥을 굴렀다. 나중에는 정말로, 어딘가 머리가 고장나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멱살이 잡힌 채 내동댕이를 쳐진대도, 발길에 채여 항복!항복을 외쳐대는 한이 있더라도 내려올 줄을 모르던 우현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른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저를 보고 있는 우현을 보는 것은 익숙치가 않았다. 성규가 저에게 바짝 당겨 앉아 짜증기가 가득 묻은 눈초리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우현의 얼굴을 대면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노려봐?"
"……."
"왜 노려보냐고, 신경쓰이게."
"핸드폰"
"뭐?"
"핸드폰 왜 들고 있어?"
우현이 성규의 손에 붙들린 휴대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잡고 있잖아, 나랑 얘기하면서도.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이 더욱 성규의 가까이에 당겨 앉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렇게 자신이 휴대폰만 잡고 있으면 우현은 여지없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성규는 그 날 이후로는 무슨 감정이든지 솔직하게 부딪혀오는 우현이 어색하면서도 짜증이 나 그저 그런 대답으로만 회피해 왔다. 내가 핸드폰을 들고 있던, 껴안고 자던 니가 무슨 상관인데.
"기어오르지 마."
"이런 게 싫으면 신경쓰이게 만들지 마."
"팔 놔, 잡지도 마."
"넌 연락하지 마."
"야."
"내가 옆에 있잖아. 걔 생각,"
하지 마. 그렇게 지지않고 말해오며 우현이 또다시 성규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쳐왔다. 평소처럼이 아닌 달래듯이 들어오는 그 때의 입술만큼은 왠지 모르게 내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며, 종래에는 또렷하게 힘을 주고 있던 눈을 천천히 감아버렸다. 우현은 언제부터인가 제게 명수 얘기를 먼저 꺼낼 줄도 알았다. 어쩌다 가끔씩 명수를 떠올리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 입술을 부딪혀오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제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 감겨 있는 우현의 눈을 볼 때면 알 수 있었다. 남우현은 지금, 김명수를 잊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열에 한 번 정도는 눈아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정말, 욕의 의미로 '개새끼'하며 부르던 게 다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니 지금은 진짜 완벽한 개새끼임을 확신했다. 성규가 제 입술에서 떨어지면 어김없이 목덜미를 감싸안는 우현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생각했다.
강아지는 가끔씩 주인의 손을 깨물 줄도 안다. 조금만 저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 싶으면, 저에게 쏟던 관심을 어느새 다른 것에 쏟아붇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면 나오는 버릇인 것이다. 나랑 놀아 주세요,하는 그런 작은 버릇. 특히나 그것은 주인이 평소에도 저 말고 사랑해 마지 않는 어떤 것에 관심을 돌릴 때면 더욱 그렇다. 컴퓨터를 하고 있을 때에 발에 매달려 앓는 소리를 낸다거나 하는 것. 성규는 우현이 그런 것 쯔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렇게 저를 끌어안아 놔주려 하지 않을 때에도 그저 가만히 허공만을 쳐다봐주었다. 내가 옆에 있잖아. 지금. 이렇게 말해오면 컴퓨터 같은 것은 꺼버린 후에 발에 매달려 오는 강아지를 안아올려야 한다는 것 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ㅡ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는 정말로, 손을 깨무는 강아지랑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성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머리 옆에 가까이 붙은 우현의 머리칼과 같이 슬려 부서지는 저의 옆머리를 느끼면서.
"내 담배 어디갔어?"
하지만 이렇게 점점 심해지는 우현의 장난이 계속 될 때면 아무리 강아지라고 해도 짜증은 치솟기 마련이다. 성규가 거실 바닥에 멀뚱히 앉아 있는 우현을 향해서 짜증스럽게 물어왔다. 베란다에 놔뒀던 담배, 어디갔냐고?
"니가 피웠을 리는 없고."
"당연하지. 내가 안 손댔어."
우현이 그런 성규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눈을 접어 웃었다. 성규가 짜증기 가득한 눈으로 자세를 고쳐 잡고 우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어디다 숨겼는데?"
"난 모른다니까"
"너 진짜 뒤지기 전에 빨리 내놔."
"몰라"
우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게 진짜. 성규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떴다. 오냐오냐 해주니까 끝도 없다, 남우현.
가뜩이나 고장난 문 탓에 찬바람이 새어들어와 집 안 가득 한기가 도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젠 별게 다. 성규가 소파 위에 놓여있던 두터운 담요를 들어 제 몸에 두른 후에 우현을 걷어 찼다. 이 씨팔, 말이 말 같지가 않지 넌?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마구 휘두르며 우현의 어깨를 강타하려고 했을 때였다. 아아! 진짜! 아파! 정말로 아픈 모양인지 평소와는 다른 톤으로 악소리를 내던 우현이 몸을 일으켜 도망가다가 대칭구조를 이루고 나서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너 담배 피는 게 싫어서 그러는건데!"
"지랄하네. 당장 내놔."
"그러면 줄 테니까, 뽀뽀 해줘."
"…아까도 했잖아."
"그런 거 말고. 니가 먼저 해주는 뽀뽀."
우현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쭈욱 내밀어 손가락으로 두어번 톡톡,두드렸다. 먼저 뽀뽀 해주면 주우지. 말꼬리까지 늘려가며 얄밉게 말한 우현은 제가 먼저 성규 쪽으로 다가가 눈을 감아 입술을 대기했다. 성규는 정말이지 리얼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우현의 입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그 날, 천국이니 어쩌니 하면서 키스를 해주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달려들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언제나, 편안함과 동시에 후회를 안겨주는 일이라고ㅡ그렇게 생각한 성규는 한기를 막아내느라 몸을 덮었던 담요를 쥔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진짜 미친새끼. 성규의 입술이 우현의 입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여기요"
짧은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녀석이 내민 것은 제 주머니에 숨기고 있었던 담배갑이었다. 성규가 우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밀고나선 담배갑을 앗아왔다. 수 쓰기는. 성규가 제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우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물론 이 장난질은 한 번에 그치질 않았다. 성규에게 먼저 뽀뽀를 받아낸다는 것에 맛이 들린 모양인지 우현은 그 뒤로도 종종 성규의 물건을 훔쳐냈다. 그렇게 '담배 또 어디갔어?'라고 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우현의 음흉한 시선 뿐이라는 것을 알아챈 성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다가 뽀뽀를 해주었다. 그리고나서야 담배를 돌려받으면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퍼붓고.
그게 대여섯 번 반복되다보면 아무런 감흥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성규는 또 다시 저의 담배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나서는 시치미를 뗀 채 모르는 척 앉아있는 우현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겨워 죽겠네. 애써 아닌척 연기를 하며 티비에 집중하고 있는 우현의 앞에 얼굴을 들이민 성규가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담배. 그리고 나서 짧게 말한 성규에게 우현은 어김없이 숨겨뒀던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협상고리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우현은 성규의 손바닥 위로 담배갑을 올려두며 샐샐 웃어제꼈다. 많이는 피지 마. 언제나처럼 따라붙는 그 충고까지도 함께.
"넌 온도계같아."
성규가 공중 위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날이 더욱 따뜻하게 개인 날이었다. 고장난 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아직까지 약간 찬 기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 창문을 열어둬도 좋을만큼 기분히 적당히 좋았던 그런 산뜻한 날이었다. 비교적 얆은 담요를 나란히 두른 둘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끼이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현관문 소리를 들으면서 카드놀이를 하다가 잠시 멈춰 눈을 마주보았다. 온도계? 제게 들어온 조커 카드를 입에 물고는 성규의 말을 따라한 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됐어, 카드나 내."
성규가 우현이 들고있는 패 중에 하나를 뽑아 막무가내로 내버렸다. 야 씨! 나 그거 낼 생각 없었는데! 멀뚱한 눈을 성규에게로 고정하고 있다가 봉변을 당한 우현이 패를 집어들어 무작정 무르려고 성규와 씨름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게 누가 딴생각 하래. 제 멋대로 게임을 진행하려 패를 겹쳐 낸 성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현은 불만스러운 입을 쭉 내밀어 성규를 노려보았다.
"니가 나 온도계같다며."
"응."
"왜냐고?"
성규가 눈을 들어 우현을 마주봤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성규가 우현의 머리를 힘주어 밀어버렸고, 옆 쪽으로 기우뚱한 우현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 왜ㅡ말은 꺼내놓고 알려주지는 않는건데.
그에 성규는 저의 패를 내려놓고는 다시 한 번 웃어보였다.
"내 맘인데."
그 사이에 슬쩍한 우현의 좋은 패를 소매 밑으로 밀어넣으며.
* * * * *
옥탑방 나이트에 오신, 악! 신나게 스위치를 딸각거리며 껐다,켰다를 반복하던 우현이 악소리를 내며 저의 머리를 감쌌다. 볼일을 보러 들어간 줄로만 알았던 성규에 장난을 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느닷없이 문이 활짝 열리며 화난 얼굴의 성규가 튀어나와버린 탓이었다. 씨발! 내가 진짜 하지 말랬지! 양치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입에 칫솔을 물고 있던 성규는 우현의 머리를 있는 힘껏 때렸다. 불! 끄는! 거! 싫!어!한!다!고! 그렇게 얻어맞다가 얼떨결에 부엌 즈음까지 뒷걸음질을 치고나서야 주먹질이 멈추어진 것을 느낀 우현이 아픈 표정과 웃긴 표정이 공존한 얼굴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장난이지이 김성규. 우현은 다시금 저에게 주먹을 치켜드려는 성규의 등을 떠밀어 화장실 안으로 구겨넣었다.
"김성규 오늘, 장동우 집에 좀 다녀와라."
화장실 문 앞에 털퍼덕 주저 앉아 성규의 양치질이 끝나기까지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우현이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성규가 물기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눈썹을 찡그렸다. 동우 집? 내가 왜.
동우랑 이호원이 너한테 할 말 있대. 우현이 끌어당긴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잠깐이면 돼. 두 세시간 정도면 될 걸. 우현은 역시나 미심쩍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규를 보며 웃었다. 이럴 줄 알았어. 뭐든 의심부터 하고 본다니까. 우현은 그런 성규에게 겉옷 하나를 걸쳐주며 집 밖으로 등을 떠밀었다. 동우가 이 앞에 나와준다고 했으니까, 따라갔다 와! 우현은 여전히 꿍한 얼굴로 계단 앞에 서서 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만 있는 성규에게 손인사를 건네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서 정확히 두 세시간 후, 옥탑방에 들어서게 된 것은 도어락이었다.
허름한 옥탑방에 미칠듯이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하얀 분필로 그려넣어진 악어 그림 옆 쪽으로 자리잡은 도어락은 쇳소리를 내며 열고 닫겼던 예전의 현관 문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손으로 치면 시멘트 가루가 떨어져 내릴만큼 초라한 벽과 말끔한 도어락 문. 아이러니하지만 만족스럽다고 느낀 우현이 자신감에 찬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마침 문이 고장났던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잠기지조차 않는 문이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우현은 생각해뒀던 회심의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난 다음 따뜻한 공기로 가득찬 옥탑방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성규가 다시금 집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 쯤 뒤였다. 동우에게서 '형 갔다'는 문자를 받고나서야 드러누웠던 몸을 일으킨 우현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현관문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쾅쾅,하며 문을 걷어 차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풉,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삑삑삑삑, 하고 몇 번이나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나면서 손인지 발인지 모를 걸로 부술듯이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까지 전부 다 웃겨 미칠 지경인 우현은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며 끅끅대는 웃음을 삼켰다.
"야! 씨팔! 이거 뭔데 너?????"
결국은 언성이 높아진 성규의 목소리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현이 현관문에 바짝 다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튼튼한 문이지!
"나 잘했어, 김성규?"
"비밀번호나 말해!"
"비밀번호."
1253! 이라고 크게 외친 우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삑삑삑삑,열린 현관문은 잔뜩 어이없음으로 가득찬 성규의 얼굴을 마주하게 했다. 기가 찬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선 성규가 제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너 미쳤어? 왜 이런데에다가 돈을 써?"
"바람도 새고, 잠기지도 않는 문이었잖아. 뭐 어때서. 아 그것보다, 비밀번호가 왜 1253인줄 알아?"
성규가 허탈함에 가득 찼던 눈을 한층 누그러뜨렸다.
"…왜인데?"
"이리오삼~♡"
이지.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린 성규가 우현을 지나쳐 유유히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미친놈. 허락도 없이 멋대로 남의집을 개조해놓은 주제에 이리오삼이라니, 진짜 지랄이 아닐 수 없다. 성규는 저의 뒤를 좇아 다가와 앉는 우현의 얼굴을 멀찍이 떨어트리면서 마지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잘했지. 그렇게 덤벼드는 우현의 입술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다시. 그러면 또 나 잘했지,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저에게 달려들어왔다. 그래 너 잘했어,하는 대답이 떨어지기 전까지 집요한 입술은 계속해서 이렇게 달려들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성규가 대답했다. 응.
잘했어.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마자 입술을 부딪혀온 우현은 성규의 허리가 뒤로 넘어가도록 부드러운 힘으로 그의 몸을 넘겨왔다. 한 손으로 끌어안은 뒤통수가 기어코 바닥에 부딪히고 나서야, 찬바람이 스며들었던 성규의 옷깃에 따뜻한 저의 몸이 부딪히고 나서야 살짝 입을 뗀 우현이 웃었다. 상은 없어? 그에 성규가 어이없는 눈을 하고서 대꾸했다. 오버하기는. 물론 그의 말이 뱉어지기도 전에 다시금 겹쳐져온 우현의 입술로 인해 다음 말은 속으로 삼켜지고야 말았지만.
비밀번호는 결국 0214로 바꾸었다.
1253이 뭐냐며, 누를 때마다 오글거려 죽겠다고 투덜대는 성규와 마주앉아 한참을 끙끙대며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우현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열심히 머리를 싸맨 끝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성규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0214 어때, 우현이 눈을 접어 배시시 웃었다. 그에 성규는 1253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살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네. 성규가 저에게 팔베개를 해주겠다며 팔을 뻗어오는 우현에게 기대며 대답했다.
영원히 둘이, 한명처럼 사는 곳.
멋진 생각 같아.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의 목소리에, 베고 누운 팔 언저리로 고개를 파묻은 성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지랄도 병인데. 종래에는 그런 투덜거림이 파묻힌 고개 안에서 새어나왔다.
이천 칠년 |
이천 칠년 마지막 겨울 바닥 위로 삼십센치 그 발목을 끌어내려 봄이 오기 전에 끝날것 같던 나의 생을 이어 붙여 나를 보던 니가 좋아 다시 태어나 처음 본 눈동자 고마워요 어여쁜 나의 구원자 기억나지 않는 어느 계절 처음 만진 머리카락 니 입냄새 처음 흘린 내 눈물도 니가 샤워할때 불을 끄던 내가 좋아 니가 똥을쌀때 문을 따던 내가 좋아 소리치던 니가 좋아 그 눈썹이 좋아 나는 그냥 그게 좋아 이상한 나와 안 이상한 니가 좋아 니 술은 내가 마실께 나를 봐줘 그게 좋아 나는 미쳤는데 멀쩡하던 니가 좋아 까먹을께 내일 얘기해줘 이천팔년 아직 가을인데 하수구 옆으로 삼십센치 엎어진 내가 좋아. 그 바닥이 정말 좋아 그 화장실. 이삼공오 그땐 아마 하얀 타이루 생각이나 했을까 처음 본 니 눈동자 미안해요 나의 구원자 죽기 전의 얘기지만 나는 아직 그게 좋아 닳고 닳은 얘기지만 달고 달은 니가 좋아 썩은이가 좋아 썩은 니가 좋아 죽기 전의 얘기지만 나는 그냥 그게 좋아 까먹을께. 내일 얘기해줘 고마워요 어여쁜 나의 구원자
- 엄 홍 식 (유아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