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ant OST- 잃어버린 사람들
경성 비밀결사대 20
『남준의 이야기』
written by 스페스
동경에 발을 디딘 이후로 남준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수업이 파하면 곧장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창으로 비치는 노을 진 하늘은 학업에 지친 남준에게 유일한 쉼이 되었다. 남준은 불그스름한 하늘을 보며, 보고픈 얼굴들을 떠올렸다. 돌아가신 어머니, 경성에 홀로 계신 아버지, 월이, 정국이. 하나둘 떠올리다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면 눈을 감고 수십 번은 족히 읽었을 시를 마음으로 읊었다. 그럴 때면 월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점으로 달려가던 발걸음. 찐 고구마를 한 아름 이고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민족 잡지를 받아들고는 제 어깨를 두드리던 손길. 부산행 기차 창문 너머로 몇 번이나 제게 손을 흔들던 모습.
상념이 길어질라치면 남준은 다시 낡은 나무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인가는 책상에 몰래 보고픈 이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놓기도 했다. 새카만 연필심이 뭉뚝해질 때까지 힘을 주어 쓰다 보면 괜스레 마음이 이상해졌다. 한글로 공들여 쓴 이름을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고 후다닥 펼쳐든 교과서에는 죄다 일본 글자뿐이었다.
늦은 밤 동기들이 자리를 뜰 때까지 책에 파묻혀 있던 남준은 늘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고 어스름한 새벽녘 못다 한 숙제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간혹 시간이 나면 남준은 그리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수신자는 대부분 월이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날로 쌓여갔다.
유학 초기에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탓에 여러모로 고생을 했으나, 주눅 들기는커녕 더욱 집요하게 학업에 몰두했다. 특유의 승부욕과 뛰어난 재능 덕에 일본어를 습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채 반년이 차기도 전에 남준은 동경에서 발행되는 웬만한 신문은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동경으로 온 지 일 년쯤 지나서였다. 남준을 보며, 문학 선생들은 하나같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네가 일본인이었다면 더 크게 빛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얘기가 귀에 들릴 때면 남준은 그저 미소로 답했다.
유학길에 오른 지 일 년 반쯤 지나, 차차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날은 남준이 처음으로 교내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던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학우들의 질투 어린 시선과 비웃음에도 남준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저 피와 땀으로 일궈낸 결과를 어떻게든 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성적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습시간 되었을 때, 선생은 교실 문을 열고 남준의 일본식 이름을 불렀다. 여자의 표정이 사뭇 이상했다. 남준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복도는 고요했다. 남준을 뒤에 두고 또각거리며 복도를 걷던 여자가 구석에 멈춰 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검은 가쿠란 차림의 남준을 내려다보았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한 통의 편지로 날아온 아버지의 부고. 그 소식을 접한 남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식간에 날아든 이별의 소식. 멍한 남준의 손에 선생이 편지를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복도를 빠져나갔다. 남준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앉은 채로, 소년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복도를 내다본 소년들의 수군거림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 이후로 한 달여간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유학생 규정 상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예 학업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준은 귀국하기 위해 짐까지 쌌으나 평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들의 끈질긴 만류에 어쩔 수 없이 조선행을 포기했다. 실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다. 부고와 함께 날아온 아버지의 편지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학업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길 바란다. 나의 아들 남준에게.'
남준은 허탈함을 느꼈다. 마지막 말인데. 이제 남은 것은 품에 든 아버지의 사진과 편지뿐인데. 육성으로도 듣지 못한 아버지의 단 한 줄뿐인 유언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직 사랑한단 말도,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다 전하지 못했는데.
남준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결코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었으나, 아들에게만은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였다. 특히 남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들에게 어미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남준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학업에 정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남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수업에 매진하기로 했던 날, 남준의 선생이 그를 교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쏟아냈다.
「너희 아버지의 소식에 많이 놀랐을 걸 안다. 네가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길래 내가 총독부를 통해 소식을 알아봤어.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가 대일본제국 반역 모임에 가담했더구나. 결국 동료의 밀고 때문에 체포됐다더군. 한 배를 탄 동료의 배신이라... 배신 따위 없었다면 네 아버지도 그렇게 희생되지는 않았을 테지. 이게 조선인들의 수준이다. 이쯤 들었으니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미련한 짓은 안 하겠지.」
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섰다. 자신을 향한 선생들의 날카로운 시선도, 쑥덕거리는 말소리도 무엇 하나 들리지 않았다. 교무실을 빠져나온 남준은 곧장 운동장 옆 창고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텁텁한 먼지 냄새가 끼쳤다. 남준은 개의치 않고 캄캄한 창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학교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장소라고는 그곳뿐이었다. 부러진 책걸상 더미에 기대앉은 남준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한번 비집고 나온 울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가슴 아픈 배신, 아버지를 그리며 버텨온 유학생활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남준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제껏 참아온 설움을 토해냈다. 그리고 해가 떨어져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창고를 빠져나왔다. 밤공기가 찼다. 홑겹의 모직 교복 탓에 추울 법도 한데, 소년은 코가 빨개진 채 밤이 늦도록 운동장을 걸었다. 숨을 뱉을 때마다 허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슬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분으로 변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배신 따위 없었다면 네 아버지도 그렇게 희생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둠이 내린 새카만 운동장을 걷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남준은 모래바닥을 내달렸다. 차디찬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럴 때면 무릎을 짚은 채로 숨을 골랐다. 그러나 배신, 밀고, 희생. 잔인한 단어들은 남준의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투쟁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다. 그것도 믿었던 동료의 배신에 의해. 그루터기와 같은 아버지. 저를 홀로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끝. 어둠 사이로 걸어가는 남준의 발걸음은 마치 끝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에서 남준은 독립잡지를 건네며 월에게 했던 약속들을 모두 내던졌다. 동시에 동경에 온 목적도 의지도 모두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남준에게는 감시가 붙었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배신을 당한 놈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녔다. 당장에 고국으로 돌려보내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또다시 선생들이 나서서 만류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글솜씨는 그냥 되돌려 보내기 아까운 수준이었다. 차라리 남준을 회유하자는 의견들이 주를 이뤘다. 남준 또한 제게 붙은 순사들의 눈초리를 알아챘으나 개의치 않았다. 밤새 운동장을 내달린 그 밤 이후로 감시 따윈 필요치 않았으므로.
* * *
"축 동경제국대학 입학"
남준은 손에 들린 합격증을 바라보았다. 주변 학우들은 가지 못해 안달인 그 대학의 합격증은 남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남준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더 문학에 파고들었다. 간혹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습관처럼 동경 곳곳을 배회하고는 했다.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가 남준을 더욱 외롭게 했음에도 종종 긴자나 시부야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두 달 전쯤 긴자에서 개통된 지하철을 타러 가던 때였다. 사람들은 신문물에 열광했다.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지상에서 움직이던 전차가 이제 지하에서 다니게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구경하기 위해 역으로 몰려들었다. 남준은 사람들의 관심이 제법 사그라질 즈음 긴자역으로 향했다. 땅 밑으로 걸어들어가는 게 조금 꺼림칙했으나 지하철을 볼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던 날이었다. 역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곧 도착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늦은 시각이라 승강장은 꽤 한산했다. 남준은 모직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선로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깊은 굴안에서 차량이 빛을 내며 다가왔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과 바람이 일자 남준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때 낯선 남자가 남준 곁에 붙어 섰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선로를 긁는 날카로운 소음이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남준은 남자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배신이 아니었소. 당신 아버지의 자발적 희생이었지."
지하철이 승강장에 멈춰 서고 철컥 문이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차량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남준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베레모 밑으로 드러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남준에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문이 닫힌 차량이 선로를 따라 다시 승강장을 빠져나가는 사이, 남자가 혼란스러워하는 남준을 향해 말했다.
"내일. 같은 시각. 긴자 도쿄은행 뒷골목 사쿠라 앞."
남자는 편지봉투를 쥐여주고 곧 인파 사이로 스며들었다. 남준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뒤늦게 남자를 찾아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감히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남준은 봉투를 손에 꼭 쥔 채로 거리를 걸었다. 유난히 안개가 많이 낀 밤이었다. 희뿌연 안갯속을 걸으며 남준은 제가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숙집에 돌아오자마자 남준은 편지봉투를 이불안에 숨겨놓은 채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아직껏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낯선 사내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무엇보다 아버지라는 단어에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이불 속에서 봉투를 꺼내든 그는 책상에 앉아 마치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지저분한 종이가 봉투에서 미끄러져 책상 위에 툭 털어졌다. 미쳐 다 펴기도 전에 종이 한쪽에 드러난 익숙한 필체에 남준은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레 속이 뜨거워지고 왈칵 눈물이 솟았다. 아버지였다. 야속하게도 제게 학업에 전념하라던 단 한 줄을 남긴 채로 마지막을 맞이했을 아버지.
혹여나 눈물이 편지를 적실까, 남준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소매로 눈가를 꾹 누른 남준이 울음을 참으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아.
부디 이 편지가 네 손에 전달되기를 바란다. 지금쯤 네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곧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세상과도 안녕이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즈음에는 이 나라도 따뜻한 봄이었으면 한다.
아들. 나는 늘 네가 자랑스러웠다. 어미 없는 설움에 주눅들 법도 한데, 너는 항상 이 아비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훌륭하게 커주었다. 삶의 종착점 앞에서 내가 가장 보고픈 사람은 두말할 필요 없이 너다.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네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이 아비가 먼저 떠난다고 원망하지 마라. 조선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응당해야 할 일이다.
이 부족한 아비는 떠나는 길에도 네게 부탁을 하게 되는구나. 혹시 이 편지가 네 손에 들어간다면, 이 편지를 전해준 사람이 네게 그 내용 또한 전달할 거다. 평생 외로워질 일이다. 그래서 아비가 아들에게 이런 짐을 지게 하는 것이 옳은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수락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가 거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불효가 아님을 명심하길 바란다. 아들. 줄곧 해주지 못한 말을 편지를 통해 전하게 되어 유감이다. 사랑한다. 너를.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날. 서대문에서.
남준은 편지를 끌어안은 채 밤새 숨죽여 울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그리워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배신과 밀고에 실망해 모든 것을 놔버린 채 지나버렸던 지난 시절. 마음속으로 숱하게 원망했던 그 누군가. 아버지가 제게 부탁했을 그 외로워질 일에 대한 궁금증. 두려움. 긴장감. 수많은 생각들이 뒤범벅된 밤이었다.
* * *
사쿠라는 긴자 뒷골목에 위치한 낡은 선술집이었다. 남준은 약속시간을 한 시간이나 앞두고 긴자로 향했다. 진탕 술에 취한 이들이 비틀거리며 지나쳤다. 한쪽에서는 선거권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끄러웠다. 남준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사쿠라로 향했다.
선술집 앞에 선 남준은 틈만 나면 회중시계를 딸깍거렸다. 일 분, 일 초가 느리게도 흘렀다. 혹시나 어제 만난 그 남자를 놓칠까, 두 눈은 정신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삼십여분이 지나 베레모를 쓴 남자가 자신을 주시한 채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코앞까지 걸어온 그 남자는 남준과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는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남준 또한 홀린 듯 그를 따랐다.
선술집 안은 예상대로 시끌벅적했다. 술에 취해 내지르는 소리들이 귓전을 때렸다. 가장 구석진 자리, 나무 의자를 꺼내 앉은 남자가 멀뚱히 서있는 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은 엉겁결에 그의 반대편에 착석했다.
맥주를 유리잔에 가득 채운 남자가 그중 하나를 남준 앞으로 건넸다. 남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곧이어 잔을 든 남자가 남준 앞에 놓인 유리컵을 짠 부딪치고는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이 정도는 마셔 줘야 그래도 선술집 온 사람들 같지 않겠나.”
입가를 닦은 남자가 남준을 쳐다보고는 웃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배신 아닐세. 누군가는 희생자가 되어야 했어. 그걸 아버지가 감당하신 거고.”
담담하게 이어진 목소리에 남준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부탁한 일은 수락하겠나. 아, 그 일이 뭔지 부터 말해줘야겠네.”
“합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해요.”
“……. 아버지를 똑 닮았네.”
남자가 다시금 웃고는 잔에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외로워질 거야. 누군가에게는 오해를 살 거고, 매 순간 긴장해야 하고. 항상 스스로 검열해야 하네.”
“…….”
“결코 마음 편할 일 없다는 얘길 세.”
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업에 정진하게나. 일 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네. 한량처럼 시나 읊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말이야."
한참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던 남자가 테이블 위에 지폐를 내려놓고는 선술집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밤의 긴자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짙은 어둠이 깔린 골목. 그 길에 들어서자, 남자가 뒤를 돌아 남준을 응시했다. 껄껄 웃으며 맥주 잔을 맞대던 그 수더분한 모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주에서 내린 작전, 자네 글을 통해 지시하게 될 거야.”
남자는 몇 마디를 더 뱉고는 어둠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점점 희미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남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차디찬 숨을 뱉으며 운동장을 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로 걸어들어 갔던 그날. 제아무리 뛰어보아도 가슴에 걸린 무언가가 자신을 죄여왔던 그때. 그러나 남준은 알았다. 자신이 이제 막 그 기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정확히 일 년 뒤, 남준은 조선 땅을 밟았다. 매일신보의 편집장. 그리고 독립단체의 비밀 결사 단원으로.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이번화는 남준이의 이야기를 다뤘어요. 남준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이들 예상하셨더라고요^^ 사실 1년 전쯤 9화를 쓰기도 전에 적어놨던 남준이의 뒷얘기였는데 이제야 풀게 되었습니다. 최근 화들이 좀 어두웠던 터라, 좀 더 밝은 이야기를 들고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다음 화는 그래도 한층 즐거운 얘기를 들고 오길 제 자신도 기대하며...... 아울러, 암호닉은 이제 댓글로 받지 않고, 암호닉 공지글에서 정해진 기한동안 받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늘 애정해주시는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인사드리며, 좋은 밤 되세요. p.s.저도 사담 밝게 쓰고 싶은데 사담만 적으면 맨날 얼음이 됩니다...... 그렇게 무거운 사람 아닙니다.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