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Dream
01
Q. 얼마 전 캐스팅이 발표된 드라마 <아찔한 로맨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A. 벌써부터 많이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기대해달라.
Q. 상대 배우인 김태형씨와의 호흡은 어떤가?
A. 아직 정식으로 만나뵙지는 못 했다. 워낙 유명하시고 하는 작품마다 흥행을 이뤄내시는 분이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다.
Q. 작품 질문은 이쯤 하고 다른 분야의 질문을 드리겠다.
A. 얼마든지.
Q. 오늘 오전 배우 전정국씨와 가수 유해리씨의 열애 스캔들이 터졌다. 전정국씨와 절친 동료사이로 유명한데,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나?
"미친 거 아니야?"
인터뷰 질문이 왜 이래? 이딴 거나 쳐 물어보고 말이야.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가 던진 폰을 말없이 주워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석진 오빠는 얕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잔뜩 심통난 얼굴로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앉아있기만 몇 분 째. 이것 봐라, 이것 봐. 뭘 잘했다고 연락 한 번 안 해? 잠잠한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다가 쇼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축 늘어졌다. 열애설 부인 기사가 뜨긴 했지만 그년은 그년이고, 나는 나고.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럴 땐 문자 한 통이라도 남기는 게 예의 아니야?
"잘 됐어. 이 기회에 확 헤어져버려."
"…뭐?"
"보는 내가 답답해서 그래. 그 사람 저번에도 너 호텔로 불러내서 스케줄 펑크나게 만들고, 드라마도 몇 번 전정국 그 사람 때문에 엎어지고. 그걸 오란다고 쫄쫄 가고 엎으란다고 진짜 엎는 너도 답 없지만."
내 말이. 그렇게 답 없는 애들끼리 하는 연애는 또 얼마나 막장이겠어. 그러니까 3년 째 이 모양이지.
"오늘 별다른 스케줄 없지?"
"너 저녁에 드라마 출연진들 미팅 있잖아."
아, 그게 오늘이야? 예상치 못한 변수에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는 것도 잠시, 빨간 목도리를 칭칭 두르는 날 보고 서있던 석진 오빠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너 설마… 아니지? 내가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려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걱정 마. 안 들킬게.
"들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미팅 시간이랑 장소 찍어서 보내줘. 데리러 올 필요 없어."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면 뭐해, 생일 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데. 조용한 걸 보니 외출 중인 듯 싶다. 어디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집안이 깔끔한 건 며칠은 집에 안 들어왔다는 거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이를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했다. 혹시나 방에 있나 싶어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슬쩍 훔쳐보다 방 문을 확 열어젖혔다. 자기 방에 말없이 들어오는 거 누구보다 싫어하는 놈이라 없다는 거 확인했으니 도로 나가려 하는데,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잖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모르면 불안하고.
"…."
근데 또 알면 실망할 거 뻔히 알면서, 그렇게 다시 한 번 더 좌절하고. 화장대 서랍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있는 링을 손에 집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까지 남겨줄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뭐, 원래도 숨기려는 시도조차 안 하는 놈이긴 하지만. 딱히 충격적이지는 않는데, 그래서 더 속상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야. 속상하다는 표현은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이니까, 화가 난다로 정정하자.
"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싸우러 왔나봐?"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문 틀에 기댄 전정국이 삐딱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적당한 인삿말이 생각나지 않아 반지를 손에 꽉 쥐고 서있기만 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열려있는 서랍을 소리나게 닫는다. 투박한 소리에 상당한 불쾌감이 드러나있었다. 나가서 얘기해. 먼저 등을 돌린 그가 몇 발자국 앞섰다. 오늘따라 저 넓은 등이 밉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헤어져."
분노에 가득 차 있지도, 내심 붙잡아주길 바라듯 애절하지도 않았다. 단조로운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인상깊은 말 한마디에 전정국이 가던 길을 멈춰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진짜 재밌는 코믹 영화를 볼 때 간간이 보이던 웃음과 같았다.
"지금 피곤해서 너랑 장단 맞춰 줄 힘 없거든?"
"왜 피곤해? 그 년이랑 호텔에 같이 있었던 거 아니라고 둘러대고 다니느라?"
짜증난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허리에 손을 짚은 전정국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장단 맞춰줄 필요 없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래도 얼굴은 보고 얘기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그의 표정까지 살필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기에 바빴으니까. 처음엔 우정 반지라고 둘러댔었나? 그런 뒤에 한참동안 나 혼자만 끼고 다녀서 더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이미 반지를 쥐고 있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똑같은 크기의 링 두 개를 화장대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그대로 쳐박아 버렸다. 이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꽤 불편해 보였다. 근데 또 모르지. 여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서로 바빠서 요즘은 연락 잘 못해요. 인터뷰 질문 대답은 이걸로 통일하자구."
"…진심이야?"
"재밌자고 이런 유치한 연극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린 전정국이 제 이마를 짚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가 무어라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옆을 스쳐지나갔다.
"아, 그리고. 그 년 웬만하면 내 눈에 띄지 말라그래."
"…."
"다시는 이 바닥 발도 못 디디게 매장시켜버릴 거니까."
"어쩔 수 없죠, 뭐. 제가 따로 연락드리던지 할게요."
네, 네. 손목에 차여진 롤렉스가 보기 좋게 빛나고 있었다. 통화하는 내내 입이 귀에 걸릴 듯 환하던 미소는 그가 휴대폰을 자기 허벅지 옆으로 떨구면서부터 점차 사라져갔다. 소주 몇 잔 입에 댄 게 전부인데 몸이 뻐근했다. 오늘은 그냥 씻고 빨리 누워야겠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텅 빈 공간으로 태형이 홀로 걸어들어갔다. 17층.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층수를 알려주면 태형은 나른한 몸을 벽에 기대어 말없이 눈을 감았다. 정말 피곤할 때에는 이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어도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그 달콤함을 깨는 요란한 소리에 곧 다시 눈을 떠야만 했지만.
제 몸에 밴 것 보다 더한 알코올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은 태형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지려 했다. 뾰족한 구두굽이 가차없이 엘리베이터 바닥을 밟을 때 마다 쿠당탕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냥 조용히 있는게 낫겠다 싶어 숨까지 죽여가며 모른 척 하고 있는데, 얼마 안 가 13층을 알리는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느낌이 들자 태형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내일 스케줄은 뭐가 있었더라, 생각하다 말고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눈을 번뜩 떴다.
"안 내리세요?"
13층인데. 활짝 열려진 엘리베이터 문에 긴 아파트 복도가 보였다. 그러던지 말던지, 귀신같이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늘어져있는 여자는 정신차릴 생각이 없어보인다. 설마, 여기서 잠든 건 아니겠지? 눈까지 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태형은 육성으로 오 마이 갓을 낮게 외쳤다. 제 멋대로 닫히려는 문을 열림 버튼을 눌러 막은 태형이 입을 앙 다물고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살면서 이런 일에 말려들어 좋았던 기억이 없었다. 늘 나만 피곤했어, 나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버튼에서 손을 뗸 태형이 나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어 깨우기에는 또 처음 보는 여자 몸에 손대기가 좀 그래서 그냥 가만히 두기로 했다.
"…저기요. 잠은 댁에 가서 주무시죠?"
좋게 말하면 남을 잘 챙기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더럽게 넓은 것. 그것은 학창시절부터 확고한 태형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두고 내렸다간 진짜 이 엄동설한에 여기서 날밤 샐 것 같아서 주저 앉아있는 여자 앞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목소리를 크게 내고 싶기는 한데 그런다고 깰 것 같진 않았다. 불그스름한 볼이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매니저 불러서 어떻게 해보라고 할까.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던 태형이 정처없이 흔들리다 뒤로 넘어가려는 머리통에 어어, 소리를 내며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그에 빨간 목도리에 파묻혀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번져버린 아이라인에 피부 화장이 조금 지워진 상태였다.
"뭐야, 이 여자?"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뭐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매니저가 싹싹 빌면서까지 퇴짜를 날리나 싶었는데, 겨우 이 꼴 나자고 그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한 거야? 이 상황이 웃기다가도 어이가 없어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감을 못 잡는 태형이었다. 앞으로 이런 여자랑 직장에서 매일 마주쳐야 하는 건가. 흠, 별로 안 내키는데. 입술을 쭉 내밀고 여주를 지켜보던 태형이 17층임을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난 분명 몇 번이고 깨웠어. 약속도 펑크 낸 주제에 자기 집도 알아서 못 찾아가는 저 여자 잘못이야.
"…집은 그렇다 치고 전화는 좀 받으시죠?"
모른 척 내리려는데 울리는 진동 소리에 다시 여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바닥에 누워 하염없이 울고 있는 휴대폰을 아는지 모르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녀를 태형이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꼭 저런 사람들이 나중에 옆에 있던 사람 탓한다니까. 왜 자기 안 깨웠냐고. 휴대폰을 주워든 태형이 지친 표정을 하고 그녀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어느새 잠잠해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오호라-. 태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 이걸 어째. 선택의 기로에 선 태형이 흥미롭게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폰은 그의 손에 들어온 지 오래였다. 이미 정국과 여주는 연예계에서 절친하기로 유명한 관계였다. 여주의 데뷔작에 정국이 함께 출연하면서 둘이 서로 많이 의지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모 방송사 인터뷰에서 얼핏 그렇게 들은 것 같다. 근데, 새벽 2시에 부재중 전화 일곱 통을 남기는 친구라….
"여보세요?"
그냥 문득 궁금해졌다. 그게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멋대로 받아든 이유의 전부였다. 아주 단순하고 별 의미없는.
"…누구,"
아마 상대가 전정국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국의 날이 선 목소리를 들으며 태형이 여주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깨로 휴대폰을 받치며 제 집 현관문 앞에 선 태형이 얌전히 감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친구야, 애인이야? 그것만 말해."
"…네가 왜 얘 전화를 받아."
"와, 내 목소리 기억하나봐? 이걸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여주의 몸을 지탱해주며 벽에 기대게 만든 태형은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무섭게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정국의 목소리가 웃겼는지 큭큭 거리면서 말이다. 김여주 바꿔. 단호한 음성에 태형이 여주를 힐끔거렸다. 흐음, 지금 그럴 상황은 아닌데.
"…뭐?"
"화는 내지 말고. 친구야, 애인이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복도에 설치된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아래 서있던 남녀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형이 한참 뒤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여주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넣어줬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겼다. 나 너무 원망하지 마요. 달콤한 목소리가 복도에 나지막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