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열여덟.
A
그래, 할 수 있다. 설마 오늘도 못 하겠어? 오늘도 실패하면 난 정말 머저리 중에서도 상머저리. 저 우산꽂이 옆에 잔뜩 찢겨져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슬리퍼보다 못 한 거야. 오늘은 진짜, 정말로. 쿵쿵 뛰는 심장을 손으로 꾹 부여잡았다. 떨리는 마음에 입술을 어찌나 깨물었는지, 입을 움직일때마다 가장자리가 따끔여온다. 아, 찢어졌나. 밉보이면 안 되는데. 오늘 새로 산 틴트도 발랐단 말이야. 긴장감에 덜덜 떨리는 것만 같은 다리를 움직여 거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그게 실은, 향했어야 했는데…….
"어, 설아야."
"안녕 난쟁이."
"애한테 난쟁이가 뭐냐. 근데 또 어쩐 일로 왔어? 점심 시간인데 밥 안 먹어?"
"김정우 사랑꾼이냐?"
"조용히 좀 해라. 설아야,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조금만 일찍 움직일걸 그랬나봐. 이렇게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나는 지금 입술 상태도 엉망이고, 또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을 텐데. 왜 너는 오늘도 혼자가 아닌 건지. 부끄러움이 두 배는 무슨 이십 배 쯤은 되는 것 같다. 어제부로 정확히 8일 째 전해주지 못한 상자가 내 손에는 9일 째 되는 오늘 날 지금의 내 손에 또다시 들려있고, 너는 내 앞에 있고. 그러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뭔 상관. 병신아."
결국 오늘도 나는 머저리라고. 그것도 상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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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첫만남? 아니면 계기? 그것도 아니면, 내가 김정우를 좋아한다는 거? 실은 김정우를 좋아한다고 말 하기엔 살짝 어긋난다. 약간 사랑하는 쪽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게쒀여. 물론 처음부터 김정우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다. 태생부터가 비운명론자였고, 그랬기에 첫 눈에 반한다 따위의 어줍잖은 가설은 믿지 않았다. 세상에 보자마자 심장 반 쪽을 내어줄 만큼 완벽 한 건 없다고, 있더라도 그건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운명 일 것이니 애초에 탐내지도 말자고. 그냥 그 어릴 적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김정우랑도 그랬다. 뭐, 개는 어제나 저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아무 생각도 없겠지만 말이다.
처음 봤을때, 그래. 솔직히 생각 쯤은 했다. 와, 존나 잘생겼다, 고. 다들 잘생긴 사람 보면 그 정도 생각 쯤은 하잖아. 아니라고? 누구라도 김정우 얼굴 보면 아니라고 잡아떼진 못 할 걸. 내가 장담할게. 아무튼, 그 잘생긴 김정우랑은 작년에 처음 만났다. 같은 반 친구가 전부였다. 어쩌면 친구라는 단어도 그닥. 그냥 같은 반 학생이라고 정정하는게 나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김정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뭐냐면…… 아, 이 얘기 하기 전에 먼저 김정우가 어떤 애인지부터 말하는게 낫겠네.
김정우는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저 순진무구갑, 혹은 눈치제로. 말그대로 멍청하다는 뜻이다. 이 멍청하다는게 단순히 머리가 안 좋아서 공부를 못 한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김정우는 공부도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너무 착해서 바보같다고 해야할까? 내가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김정우와 짱베프를 먹은 사이었다면, 아마 5년 뒤 쯤 보증 서달라고 연락 할 명단 0순위에 자리 할 것 같다는 말이다. 생긴 건 그렇게 안생겨서 초등학생 남자애 마냥 이상한 유행어나 만들고 다니고.(우리학교 유행어가 된 건 안 비밀이다. 에바킹스덤? 뭐라더라…….) 또 운동은 어찌나 좋아하는지 체육 시간만 되면 미친 개처럼 뛰어다닌다. 특히 그 놈의 축구에 미쳐서 쉬는시간이며 점심시간이며 공만 차고 다닌다. 그러다가 또 넘어지지, 짜증나게. 또 뭐가 있지, 아. 양배추를 엄청 좋아한다. 작년이었나? 급식에 양배추 스프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급식실 한 구석에서 큰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김정우가 아주머니께 양배추 스프 좀 더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것 마냥 사정사정 하고 있더라. 난 워낙 양배추를 싫어해서 배식조차 받지 않았지만…… 김정우가 좋아한다길래 그 맛이 궁금해 친구 몫을 뺏어먹었다가 그 날 하루종일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도 있고.
착하고 순진하고, 또 눈치 없는 건 귀엽게 봐줄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상대방 미치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친구들과의 내기였다. 야, 남자친구 먼저 사귀는 애한테 5만원씩 주기 할래? 감당 가능하냐, 내 윙크 한 방이면 다 넘어가는데. 그냥 생각없이 뱉었던 말이었다. 그냥 그렇게 내기가 시작됐고. 친구들은 저마다 호감있는 남자애한테 말을 거는데, 이상하게 나만 그럴 상대가 없었다 이거다. 그래서 그냥 나도 모르게 김정우를 쳐다봤는데, 하필이면 김정우는 내 쪽을 보고 있었고. 나는 윙크를 했고, 김정우는 곧장 나한테 질문을 던졌었지.
"어디 아파? 눈병 걸린 거 아니야? 눈이 좀 부은 것 같은데?"
어제 라면 두 개 끓여먹고 쳐자서 눈이 부은거야 병신아, 라고 말 하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진 못했다. 그냥 일미터 간격의 김정우가 너무 눈부셨거든. 그 애 뒤에 있던 건 햇살이 아닌 투박한 목재 사물함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나서는 한동안 김정우만 보면 윙크를 해댔다. 그때마다 김정우는 아직도 눈병이 안 나은 거냐며 시덥잖은 걱정을 해줬고, 나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서는 괜히 김정우한테 들이대고. 사람 심리가 참 웃긴 게, 별 생각이 없더라도 자주 말 섞고 또 자주 부딪히니까 매일 보는 얼굴도 달리 보이고 별 생각 없던 애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더라. 뭐, 잘생긴거야 굳이 두 번 생각하지 않아도 확실한건데, 이상하게 귀여워 보이는거 있지. 애가 종일 웃고 다니고, 욕 한마디 하는 걸 못 보고, 어딘가 좀 띨띨하고 멍청한건 확실한데 그게 좀 귀여워 보이더라.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김정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웃긴 애였다. 그냥 말 그대로 진짜 웃겼다. 예상을 빗나간다고 해야하나.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캐해석 난감한 스타일이라고 해두자. 좀 얌전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불쑥 튀어나와서 말같지도 않은 삼행시를 툭툭 던지질 않나, 덩치도 큰 게 누가 살짝만 밀면 잘 서있다가도 허둥대며 넘어진다. 그 모습이 진짜 바보같은데 너무 귀여운거 있지. 아, 나 진짜 김정우 너무 좋아해. 아니,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년 간 같은 반인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뭐, 별 건 아니지만 고1 수련회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본 적도 있고, 책상 두어개를 붙여 과자 한 봉지 까놓고 수다를 떠는 데에 우리 둘도 항상 껴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2분단 셋째 줄 왼쪽 자리, 김정우는 1분단 셋째 줄 오른쪽 자리. 이정도면 말 다 한거지? 그럼에도 아직까지 서로 연락처조차 모른다는 건 유머.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건 지금 이 상태로 김정우의 번호를 알게 되면 참지 못하고 매일 밤마다 자니...? 나야... 자나보네... 라는 카톡을 남길 것만 같기 때문이다. 김정우 앞에서 무뚝뚝 한 척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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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왜 손에 상자를 들고 있었냐면, 실은 저번에 김정우한테 립밤을 빌려썼다. 니베아 체리. 김정우 입술이 빨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 빌리게 된 과정도 웃긴 게, 난 그냥 입술에 각질이 거슬려서 거울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대뜸 나한테 립밤을 불쑥 내민다. 이걸 나한테 왜 주는거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거지, 고민 많이 했는데. 결국 나오는 말이라고는 손 치워라. 이게 끝이었다. 내 말에 김정우는 보일듯 말듯 입술을 비죽이며 손을 슬그머니 내빼고, 그 쌍커풀 진 눈이 아래를 향하고. 그 때 문득 생각이 들었던 거다. 김정우랑 뽀뽀하고싶다. 근데 뭐, 다짜고짜 뽀뽀를 할 수가 있어 아니면 키스를 할 수가 있어. 그랬다간 축구로 다져진 다부진 다리로 싸커킥 맞을 확률 219%다. 아무튼 그래서 멀어지는 김정우 손 번뜩 부여잡고 립밤부터 뺏어왔었다. 김정우 손은 되게 따뜻했고.
"어……."
"뭐. 쓰라고 준 거 아니야?"
"맞긴 한데…… 진짜 쓰게?"
그럼 진짜 쓰지 가짜로 쓰냐? 그냥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 립밤 뚜껑을 열었다. 참, 립밤도 주인 닮았는지 바닥을 보여가는데도 어느 한군데 파인 곳 없이 매끈했다. 그리곤 내게 꽂힌 김정우의 시선을 조명 삼아 무심 한 척 입술에 슥슥 문질렀다. 립밤을 돌려 뚜껑을 닫고는 아직도 멍청하게 내민 김정우의 큰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김정우에게 이렇게 말했지.
"넌 안그렇게 생겨서 이런 거 쓰냐."
"체리가 뭐 어때서. 에바킹스다, 진짜."
"이상한 말 좀 하지마, 애냐. 나 화장실 갈거니까 쌤 오면 말 좀."
알겠어, 라고 말하는 김정우 목소리가 청량해서 약 2.19초 동안 굳었던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보나마나 가방 한 켠 주머니에 립밤을 넣어두고 있을 김정우를 등지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근데 정우야, 이건 평생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실은 나 그 날 입술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물 한 잔 안 마셨다. 네 립밤 지워질까봐.
아무쪼록 립밤을 같이 쓴 건 조금 비위생적이기도 하고, 마침 립밤도 다 쓴 거 같길래 집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립밤을 샀다. 니베아 체리로. 립밤만 덜렁 주기는 뭐해서 작은 메모라도 적을까 하다가 날려먹은 포스트잇만 한 통인데, 이건 좀 부끄러우니까 다들 비밀로 해줘. 그래서 결국 선택한게 집에 굴러다니던 작은 상자에 넣어서 주는 건데, 분명 등굣길에는 꼭 줘야지하고 굳게 먹었던 마음이 교실만 들어가면 눈 녹듯이 사라져 흰 눈 사이에 콕 박힌 부끄러움이라는 돌멩이 하나만 남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교실에 앉아있는 김정우 때문이긴 하지만. 김정우는 나를 보면 여전히 이름을 부르며 해맑게 인사하고, 그럼 나는 또 말한다. 바보처럼 실없이 웃지 좀 마. 자리에 앉으면 옆 자리에는 친구가 어 왔어? 라는 인사를 건네며 화장을 고치고 있고, 앞자리에는 전교 일등이 주황색 귀마개를 낀 채 죽어라 공부를 하고 있고, 사람 한 명이 지나 갈만큼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옆에 앉은 김정우는 오늘도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나는 가방 옆주머니에 꾹꾹 눌러 담아둔 손바닥만한 상자를 꺼낼까 말까 219번 고민하고. 그래서 결국 9일째 못 주고 있는 거다. 남들이 알면 비웃고도 남았을 일이다. 나도 내가 웃긴데 남이 볼 땐 얼마나 우습겠냐고. 고작 립밤 하나를 못 줘서 일주일이 넘도록 끙끙대는 꼴이라니. 그런데 어쩌겠어, 부끄러운데.
믈론 김정우는 내가 립밤을 줘도 왜 주는 건지 모를 넌씨눈이고, 내가 오밤중에 자니...? 라는 카톡을 보내도 이유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만, 주는 내 입장은 그게 아니라 이거다. 김정우는 내가 매일 점심시간마다 밥도 거르고 음악실 청소를 하는 김정우에게 상자를 전해주기 위해 2층 교실에서부터 5층 음악실까지 달려간다는 것도 모르겠지. 거뵈, 지금도 언제 왔는지 제 자리에 앉아서 나한테 묻잖아. 근데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무슨 할 말?"
"그냥……. 너 요즘 점심시간마다 음악실 오길래.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서 그러는 건가 싶어서."
"그런 거 아닌데?"
아닌 게 아니다 이 새끼야. 김정우한테는 들리지 않을 마음의 소리를 외쳤다. 김정우는 또 그렇냐며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내 고개는 여전히 좌측을 향해있고. 이 눈치 없는 애를 어쩌면 좋지. 그냥 속 편하게 말 하고 싶다. 정우야 나 사실 너 좋…….
"근데…… 혹시 너……."
"……."
"음악실에 담배 숨겨 둔 거 너 아니지?"
너를 좋나 패버리고 싶은 것 같아…….
A-1
"야 김정우."
"어? 음악실엔 왜 왔어?"
"그…… 립밤……."
"립밤?"
"립밤 있잖아……."
"립밤 왜? 빌려달라고?"
"……초딩도 아니고 요즘 누가 니베아 체리 쓰냐? 존나 유치해."
"……?"
A-2
"야."
"깜짝이야, 또 왜 왔어?"
"뭐…… 난 오면 안되냐?"
"왜 이렇게 삐딱하지? 에바킹스다 너 진짜."
"개유치해. 아니, 아무튼. 그 있잖아……."
"응?"
"그거…… 엊그제……."
"엊그제 왜?"
"니베…… 니 뱃살 존, 존나 나왔더라. 관리 좀 해라."
"……?"
A-3
"설아야 나한테 할 말 있어?"
"없는데."
"일주일째 매일 음악실 출석하네. 나 청소 도와주게?"
"미쳤어?"
"그럼 왜. 밥은 먹었어?"
"남이사. 야, 너 그거 다 썼지?"
"어떤거?"
"그거…… 니 가방에 있는거 있잖아."
"뭐 말하는건지 모르겠어……."
"니…… 가방에 법정 숙제 써놓은거 있지? 가져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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