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 얘기가 나오면 절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차학연이 피겨의 신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유려한 몸선과 유연한 신체는 동작을 더 우아하게 만들어주었고, 콤비네이션 점프를 누구보다 다양하고 정확하게 소화한다는 기술적 완성도. 무엇보다 대중을 사로잡은 건 연기를 할 때 드러나는 섬세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드높은 인기에 힘입어 출연하는 인터뷰와 예능에서 그는 항상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이었으니 그 누가 차학연이라는 이름을 모를까. 이번 올림픽에서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선수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의 발목 부상 정도일까. 차학연은 점점 커지는 통증에 어쩔 수 없이 연습을 중단하고 의무실을 찾았다. 스테로이드제를 처방받은 후 발목을 고정시킨 그가 의사의 조언에 따라 휴식을 취할 겸 찾은 곳은 컬링 경기장이었다. 혼자 방에 있거나 피겨 연습장에 가봤자 기분만 심란해질 것을 알기에 향한 걸음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연습만 하는 여타 경기장과 달리 이 곳은 각자 작전과 지시를 내리기 위해 적당한 소음이 있어 반대로 마음이 진정된다. 개막식까지 기껏해야 일주일. 괜찮을까. 어두운 생각에 빠지려다가도 오늘따라 유독 빨리 떨쳐낼 수 있던 이유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보던 경기가 꽤 재밌어 보여서였다. 룰이야 기본적인 것밖에 모르기에 왜 저기서 돌을 던지는지, 왜 저렇게 한참을 고민하는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던 돌이 정확히 다른 돌을 치고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나이스 샷이었다. 컬링팀도 잘하네. 남녀 혼성 팀인가. 경기가 끝난 건지 돌을 모두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감탄의 박수를 쳐주니 들은건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반응에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미끄러지듯 빙판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차학연 선수 맞으시죠?" "네, 정말 잘하시던데요? 그쪽은..." "김원식이에요. 저쪽은 제 친동생이고요." "남매가 함께 출전한거에요? 대단한데요." "어쩌다보니 그러네요. 여기까지 어쩐 일로.." "그냥 구경했어요. 보다시피 지금은 절대안정이라." "아..."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발을 살짝 들어 보여주자 그제야 압박붕대를 한 발을 봤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별 거 아니에요. 조금 심심한 거 빼면." "음.. 그럼 점심 같이 해도 될까요? 제 동생은 친구 팀네 간다고 하더라고요." "나야 환영이죠." ㅁ ㅁ ㅁ 컬링의 유망주 김원식은 제 앞에 있는 피겨의 신이라 불리는 사람이 꽤나 어린애 다운 구석이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다양한 음식을 뷔페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은 개인의 음식취향이 꽤 확실하게 나타나는 곳이었는데 그의 접시에는 달달한 양념의 음식과 과일뿐 이었기 때문이다. 음료도 익숙하게 저는 있는지도 몰랐던 꿀우유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그는 새삼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바라보았다. 어른스럽게만 보였는데, 아니 실제로 자기보다 연상이기는 하지만 그와는 다른 얘기였다. 어린시절부터 메스컴을 타던 천재 피겨 소년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생각이 깊고 야무진 이미지였다. 거기다 이미 두번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며 빛나는 까마득한 선배였기에, 어느새 말까지 놓자며 스스럼 없이 치대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은 쉬라고 그러더라고. 올림픽이 코앞인걸 뻔히 알면서 그랬다니까!" "그럼 많이 심각한 거 아니예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야. 운동 하다보면 있는 일인거 알잖아." "그래도..." 덕분에 그들의 대화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의 식사자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친밀해보였다. 그 분위기 속에서 학연이는 상대가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너야말로 어때?" "이렇게 큰 경기는 처음이라 좀 떨리긴 한데 괜찮아요. 그건 제가 마인드 컨트롤해야 하는 문제니까." "마인드 컨트롤 중요하지. 코치도 그렇고 다들 요즘 그것만 강조하지 않아?" "네? 당연히 그거야..." 얼떨결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 순해보여 학연이는 웃음이 나왔다. 연습 중에는 엄청 사나운 눈빚이더니. "괜히 그런 생각하면 더 떨린다. 갑자기 안하던 짓 하지 말고 그냥 노는 게 제일이야." "평소처럼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그랬거든. 조언이라고 해줄 게 이런것밖에 없네." "아니요. 도움이 많이 되는걸요. 감사합니다." 잘할거야. 제가 컬링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잘 알아보곤 했다. 본인이 그랬고 제 주변엔 항상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결과가 어찌 되었든 김원식이라는 선수는 잘할거라고 그는 확신했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 그는 말을 아꼈다. 이미 충분히 응원이 된 거 같고. 이럴땐 제가 정말 하늘같은 선배구나 라는 생각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학연이는 슬슬 동생에게 가봐야겠다며 일어난 원식이를 보내주고 이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그만 숙소로 가서 푹 쉬는 게 좋으려나.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지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머리를 헝클이며 고민하던 그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결국 다시 아이스 링크장. 이제 슬슬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몸과 나이인데도 이래서야 어찌할련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챙겨온 피겨 부츠를 쓰다듬었다. "차학연?" 그렇게 얼마나 혼자 있었을까. 청승 떨지 말고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 쉬는 중이었는지 편한 차림의 제 친구 택운이가 문가에 있었다. "어?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이번 부츠는 괜찮아?" 택운이 제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했지만 큰 의미 없이 물었던 저와 달리 무겁게 내리꽂는 뜻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피겨 부츠는 단순히 사이즈의 문제가 아닌 정밀한 장비였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완성도와 신체에 영향을 주는 문제였으니까. 다만 학연은 굳이 그런 얘기를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알아봐 준 그의 관심을 단순히 그 역시 스케이트화를 신는 선수이기 때문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차학연이 아니었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달려든 학연이의 무게를 감당하는라 한발짝 뒤로 밀려간 택운이 등을 조심스레 토닥여주자 그 웃음이 더 짙어진 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제대로 연습하기도 전에 발이 이 모양이라 좀 걱정이긴 하네." "의사는?" "넌 의사 말 안듣잖아." "...넌 들어야지." 얼핏 가벼운 어조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의 입에서는 위로나 응원의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한 층 밝아진 표정으로 학연은 한손에 스케이트화를 들고 그 반대에는 택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아이스 링크장을 나왔다. "우리 개막식날 같이 구경 나올까?"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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